54. 증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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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증거
2023.03.08.
“헙?”
“아니,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
레스칼보다 오히려 기사들이 더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하지만 사실이 아니었다. 레스칼의 경우에는 충격을 드러낼 여유가 없었다.
“……그럴 수 없다.”
레스칼은 한참 만에 아주 작은 목소리를 내뱉었다.
라실리아도 그러리라 예상했다. 다른 인간을 좋아하지 말라는 대신 뭐든 해 주겠다는 건 자신을 떠나지 말라는 뜻이었지 그 반대가 아니었다.
“제가 폐하의 반려가 아니라는 게 명확해지면, 그땐 이혼해 주십시오.”
표식이 사라졌다고 해도 황제는 자신이 그의 반려라 믿고 있었다. 이제 표식은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자신이 죽는 것은 그 믿음이 깨지는 순간일 것이다.
이혼은 그때를 위한 안전장치였다.
그가 자신을 죽이기 전에 이혼이 진행된다면 어느 누구도 상처받지 않은 채 안전하게 떠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신께서 보여 주신 죽음도 피해 갈 수 있을 것이다.
“반려가 맞다면. 그럼 이혼하지 않아도 되는 건가?”
레스칼이 물었다.
답은 무엇도 상관이 없었다. 어차피 자신은 그의 반려가 아니니까.
“제가 폐하의 반려라면 이혼할 이유가 없겠지요.”
“그대가 끝내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래도 더는 이혼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그 질문에 대한 답도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질문이 틀렸다.
자신이 반려일 리도 없지만, 반려라고 하면 황제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네. 그러겠습니다.”
“그럼 좋아.”
레스칼이 성큼 앞으로 다가왔다. 피로 젖은 속눈썹으로 둘러싸인 금안이 코앞에서 번들거렸다.
“그렇게 하겠다. 기꺼이.”
“……감사합니다, 폐하.”
라실리아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주춤하며 답을 했다.
너무 가까워진 거리는 둘째치고, 갑자기 달라진 눈빛이 이상했다.
그렇게나 고통스러워 보이던 눈이 지금은 춤이라도 출 것처럼 즐거워 보였다.
너무 빠른 변화가 당황스러웠다.
“그럼 이제.”
레스칼이 두 팔을 뻗어 라실리아를 끌어안았다. 허술한 차림새로 끌어안기는 기분은 또 달랐다. 움직일 때마다 바스락대는, 옷 같지도 않은 한 겹 천 아래 황제의 단단한 몸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폐하, 불편합니다.”
“조금만 참아. 보여 줄 테니.”
“네? 뭘 보여 주신다는 말입니까?”
“그대가 나의 반려라는 증거.”
“……?”
바스락, 옷자락이 맨살에 쓸리는 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스륵, 그가 제 머리칼을 목덜미로 넘기는 소리가 간지러웠고, 초옥 귓가에 입술이 와 닿는 소리가 간질거렸다.
그 모든 간지러움이 낯선 두근거림이 되었다.
라실리아는 숨을 멈춘 채 제 몸에 전해지는 이상한 감각들을 인내했다. 그가 뭘 보여 준다는 건지 조금도 감이 오지 않았다.
“이제 됐나?”
레스칼이 물었다. 라실리아가 아니라, 리얀에게 한 질문이었다.
“네, 폐하. 다 됐습니다.”
그 말에 레스칼이 라실리아를 놓아주었다. 몸을 감고 있던 팔을 떼어 낸 그가 라실리아의 앞에 제 손을 내밀었다.
“알아보겠나?”
“이건……,”
몰라 볼 수가 없었다.
변이가 일어나던 손이 멀쩡해졌다. 놀란 라실리아가 눈을 들어 레스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얼굴도 마찬가지였다. 비늘의 흔적이 사라졌다. 황제는 여느 때처럼 찬연한 이목구비를 드러내고 있었다.
“이게…… 저 때문이라는 겁니까?”
“그래.”
“시간이 지나서 원래대로 돌아온 건 아닙니까? 블루문에도 시간이 지나면,”
“이렇게 빨리 돌아오진 않았어. 그리고 몸을 주체하기 어려울 만큼 고통을 느끼지도 않는다.”
“…….”
“그대 때문이야. 그대가 내게 있어서.”
혼란이 머릿속을 뒤덮었다.
‘어떻게 내가 진짜일 수 있는 건데. 나는 제국과 아무런 연관도 없는데. 나는 델라르타의 예언자일 뿐이야. 대체 왜…….’
그렇다면 아무런 연관도 없는 자신은 왜 황제와 연관된 미래를 보았을까. 왜 황후의 몸으로 되살아나 그에게 죽게 되는 걸까.
갈피를 못 잡는 얼굴로 서 있는 라실리아의 이마에 레스칼이 입술을 댔다.
“당장 믿기지 않는다면 계속 지켜봐. 그대가 나의 반려라는 증거는 차고 넘칠 테니까.”
“…….”
라실리아는 끝내 아니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재판은 무기한 연기되었다.
라실리아는 재판복을 입은 채 궁으로 돌아왔다. 라실리아가 맨발이라는 이유로 레스칼은 자신이 라실리아를 안고 가야 한다고 우겨 댔다. 그게 안 된다면 제 신발을 신어야 한다고 했다.
제 발보다 훨씬 더 큰 황제의 구두를 질질 끌고 가는 옆에서 황제가 맨발로 걷는다면 누군가가 「당신이 잊지 못할 황실의 이모저모」라는 수기를 남길지도 모를 일이었다.
결국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미리 길을 달려간 근위대가 라실리아의 구두를 가지고 오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황후궁의 경비가 곱절로 늘어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황궁 전체에 봉쇄와 추적 마법진이 빈틈없이 깔렸고, 마법사 길드는 내년 연구비 예산을 아주 넉넉하게 받을 수 있었다.
* * *
“아, 이런. 뭐라고?”
넓적한 일인용 소파에 눕듯이 기대앉아 포도주를 홀짝이던 말리크가 짜증을 부렸다.
“젠장.”
탕!
포도주가 담긴 주석잔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사방을 더럽혔다.
고위 신관이 포도주가 튄 신발을 주춤대며 쳐다보자 말리크가 손목을 휘저었다.
“으윽!”
그러자 고위 신관이 발등을 움켜쥐며 뒤로 넘어졌다. 다른 신관들이 그를 보며 숨을 죽였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그들도 몰랐다.
하지만 성자 말리크가 한 짓이라는 것은 확실했다. 성자 말리크의 이능은 그들이 이제껏 보아 온 신성력보다 뛰어났다.
기껏해야 남을 돕는 일밖에 못 하는 신성력에 비하면 말리크의 이능은 한계가 없었다.
가장 무서운 것은 인간의 의식을 가로채는 것이었다.
말리크가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인간은 의식을 빼앗겼다. 그리고 말리크가 원하는 일을 이루기 위해 제 목숨을 바쳤다.
말리크에게 공간의 제약이 없었다면 그는 진작 이 대륙의 새로운 신이 됐을 것이다.
말리크는 이곳, 신전의 한가운데 결계가 쳐진 이 공간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그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신관들은 가늠하지 못했다.
그들이 하나 알고 있는 유일한 사실은, 말리크를 거스르면 죽는다는 것뿐이었다.
“하……. 내 몸이 제대로 됐으면 고작 발목 하나 나가고 말지는 않았을 텐데.”
말리크가 뭘 잘못 먹었을 때처럼 떫은 표정을 지었다.
“시끄러우니까 그건 내보내. 그리고 너, 하던 말 계속해. 황실에서 뭐라고 했다고?”
“재판 거부권을 행사하겠다고 나섰습니다.”
“그게 무슨 소린데. 그럼 고발장은 소용이 없게 됐다는 거야?”
“그렇습니다.”
“아니, 뭐 그런 게 다 있어? 이쪽은 없는 증인을 만드느라 그 고생을 했는데 황실에서 거부해 버리면 그만이라는 거야?”
“그게…… 법이 그런 것이라……. 황실에서 눈치를 보게끔 귀족들에게도 고발장을 돌렸지만 그조차 소용이 없는 것 같습니다. 황제가 생각 이상으로 단호하다 합니다.”
“하, 배알도 없는 놈이네, 그거. 표식이 사라졌다는데도 그래? 궁금하지도 않은가?”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성자시여…….”
입술을 실룩대던 말리크가 손목을 휘저었다.
그러자 바닥을 구르던 주석잔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말리크의 손에 쥐어졌다. 안에는 다시 신선한 포도주가 그득 담겨 있었다.
포도주를 꼴깍 마셔 댄 말리크가 붉어진 입술을 닦으며 말을 이었다.
“공작이 말한 건 확실해? 황제는 약혼식 이후로 표식을 확인한 적이 없다고 했잖아. 설마 약혼식 때 한 번 본 그걸로 됐다는 거야?”
“피엘리온 공은 황제와 황후가 정식으로 접촉을 한 적이 없다고 확언했습니다. 황후 또한 황제에게 표식이 사라지는 것을 들키는 게 두려워 차라리 폐위를 원한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황제는 황후를 감싸고돈다는 건가?”
“그런 것으로 보입니다, 성자시여.”
“대체 왜?”
“그건 저희도 잘……,”
“하……. 짜증나네, 그거.”
말리크가 다시 주석잔을 집어던지고는 소파에 가로로 드러누워 허공으로 손톱을 튕겼다.
“왜 가짜를 붙들고 그 염병인 건데. ……설마 진짜였나? 아니, 가짜가 맞아. 내가 진작 바꿔치기해 놓은 건데…… 아, 가만. 나도 모르는 새에 바뀐 건가?”
말리크가 벌떡 소파에서 일어나 신관들에게 손짓을 했다.
“가서 누구 엉덩이 가벼운 놈들 좀 골라 와. 갈 길이 머니까 젊고 튼튼한 놈으로.”
신관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먼 곳이라면…… 어디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델라르타.”
“델라르타……?”
교류가 전혀 없는 작은 왕국은 이름조차 모르는 신관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 데가 있어. 신관이라면 통행증에 상관없이 대륙 아무데나 갈 수 있는 거 아냐? 제꺽 보내. 가서 황후하고 똑같이 생긴 여자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보고 오라고 해.”
“똑같이…… 생겼다고 하셨습니까?”
“그래. 뭘 자꾸 묻고 그래.”
“아, 알겠나이다. 하오나 아무리 작은 곳이라도 생김새만으로 사람을 찾기란 지극히 어려운 일입니다, 성자시여.”
“말 더럽게 많네. 사람 숨기는 데 제일 좋은 장소가 어디겠어?”
“네?”
“내가 지금 어디에 숨어 있냐고.”
그러니 델라르타의 신전을 뒤져 보라는 말 같았다.
“……알겠나이다.”
시키니 어떻게서든 따라야겠지만, 말리크가 하는 짓은 통 무슨 목적인지 감을 잡을 수 없는 경우가 더 많았다.
이번 재판만 해도 그랬다.
황실과 황후를 걸고넘어지려는 것은 알았지만 일말의 조심성도 없이 신전을 노출시킬 줄은 몰랐다. 고위 신관들은 행여나 황제가 황실 재단사의 일에 신전의 책임을 물을까 봐 내내 노심초사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황제가 아무리 껄끄러워도 제 집 안에 둥지를 튼 말리크만큼은 아니었다. 말리크는 손목을 휘젓는 것만으로도 지금 제 목을 부러트릴 수 있었다.
“아, 그리고 하나 더.”
말리크가 어깨를 붙들고 목을 돌리며 말을 꺼냈다. 목에서 우두둑 우두둑, 인간의 뼈에서 나는 소리라고 하기엔 소름 끼치는 소리가 번져 나왔다.
“앞으로 수도에 뭔가 재미있는 일이 생길 텐데, 적당히 소문 좀 내.”
“어떤 소문이 나길 원하십니까?”
“황후가 가짜라 황제가 미쳤……. 아, 소문은 좀 과장이 섞이는 게 좋으려나. 황제가 미쳐서 제국을 불살라 버릴 거라고 해. 뭐, 신탁이 내려왔다고 해도 좋고.”
“신탁이라고 하면 신전의 책임이 너무 커집니다, 성자시여…….”
“뭐?”
말리크의 눈이 번들거렸다.
신관들이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했다.
“책임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겁은 많아 가지고.”
말리크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후드득, 결계가 쳐진 방의 벽 하나가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이제 조금 있으면 그런 한가한 개소리는 할 겨를도 없어질 거야. 잔말 말고 시키는 대로 해. 황실은 개꼴이 나서 어디에 책임을 물을 정신도 없을 테니까.”
“아, 알겠…… 알겠나이다…….”
벽 하나가 뻥 뚫렸다.
밖에서 빛이 새어 들어왔다. 빛이 말리크의 등을 비추었다.
“엇……!”
“허, 아니 저……,”
신관들이 놀라 입을 벌렸다. 의심으로 두 눈을 비볐다.
빛이 닿는 등에 갑자기 날개가 돋아난 것처럼 보였다. 아주 크고 검은 날개였다. 새처럼 깃털이 덮인 날개가 아니라 박쥐처럼 뼈가 드러나 있는 날개였다.
만약 해가 정면에서 비쳤다면 신관들은 말리크의 이마에 돋아난 뿔을 보게 되었을 것이다.
아주 오래된 대륙 초기의 기록과 정확히 일치하는 마족의 모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