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안전한 이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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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안전한 이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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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안전한 이혼
2023.03.05.
“이래서 재판을 고집했던 건가.”
달아날 곳은 없었다.
라실리아는 맨발이었다. 맨발을 한 자신보다 몇 배는 빠르게 달릴 수 있는 그림자 기사들이 도망갈 길을 막았다.
저벅저벅…….
그사이 황제가 앞으로 다가왔다.
“이상해……. 좋아할 리가 없는데.”
라실리아의 코앞에서 뚝 걸음을 멈춘 레스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금안은 날카로우면서 동시에 혼란스러웠다.
“기억을 잃었다고 했잖아. 소공작만 기억할 리는 없을 테고.”
이어서 금안은 테르나덴이 보란 듯 움켜쥐고 있는 라실리아의 손을 향했다.
“일단 놔.”
“아니…… 싫습니다.”
테르나덴이 이를 질끈 물고 헛소리를 했다.
“놓을 수 없습니다.”
“안 놓으면?”
레스칼이 테르나덴의 반대쪽 손목을 움켜쥐었다.
“공이 뭘 할 수 있는데?”
“내가 여기서 누이를 놓아 버리면……, ……악!”
테르나덴이 말을 하다 말고 잇새로 비명을 내질렀다.
레스칼이 쥔 손목에서 우두둑 소리가 났다. 테르나덴의 표정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놔.”
“아니, 나는 못…….”
우두둑!
“으아악!”
결국 그 상황을 말린 건 라실리아였다.
“놓으십시오, 폐하.”
레스칼이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그대가 저것을 놓으면.”
“이미 놓았습니다.”
“…….”
어느샌가 라실리아는 테르나덴에게 잡힌 손을 뽑아 들고 있었다. 고통에 정신이 나간 테르나덴이 미처 모르는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누이!”
테르나덴이 안타까운 눈으로 라실리아를 불렀다.
라실리아는 그에게 유감이라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여 보였다.
“……그렇다면.”
휙!
레스칼이 테르나덴의 손목을 팽개치듯 놓았다.
“잡아 가둬라.”
“예, 폐하.”
세르벤이 재빨리 테르나덴을 붙잡아 근위대에 넘겼다.
“누이! 안 돼! ……안 된다고!”
테르나덴은 끌려가면서도 소리를 질렀다.
보답 받을 길이 없는 그의 애정은 어쩐지 마음이 아팠다.
“얘기가 길어질 것 같군.”
레스칼이 흐트러진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일단 궁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어.”
그가 라실리아의 손을 잡았다. 반사적으로 손이 움츠러들었다.
“…….”
레스칼이 다시 손을 뻗었다. 라실리아가 그를 피해 뒤로 물러났다.
“……. 그대는 아직 모르고 있는 것 같아.”
빈손을 잠시 쳐다본 레스칼이 말을 이었다.
“그대는 나 없이 어디로도 갈 수 없어. 일단 이 주변은 전부 봉쇄했다. 그대가 어딜 가려고 할 때는 추적진이 따라 움직일 것이다. 도망치는 건 끝났어.”
“그래서,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돌아가라는 겁니까? 다시 돌아가서 황후로 살라는 겁니까? 지금 이 상황에서요?”
계획은 실패였다.
폐위를 도와야 했던 공작은 신전에 의식의 일부를 빼앗겼고, 저를 도망치게 해 주려던 피엘리온 소공작은 근위대에 붙잡혔다.
이제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라실리아에게 남은 것은 황제가 저를 죽이는 결말이 언제 다가올 건지 가슴을 졸이며 기다리는 일이었다.
‘그렇게 살 수는 없잖아.’
라실리아가 이를 물었다.
‘그렇게 죽을 수는 없잖아. 그런 죽음은 받아들일 수 없어.’
그러니 뭐라도 해 봐야 했다.
“저는 그럴 수 없습니다, 폐하.”
“그럴 수 없다면. 그럼 무얼 할 수 있는데?”
레스칼이 입술을 비틀며 물었다.
“그대는 맨발이다. 맨몸에 걸친 옷 한 장뿐이다. 더는 도울 사람도 없어. 이 상황에서 그대는 무얼 더 하려는 건데.”
“최소한 제가 폐하 곁에 있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말은 할 수 있습니다.”
“……뭐라고?”
비틀린 입술이 표정 전체를 비틀었다. 익숙한 무표정이 이 순간 비틀리다 못해 쪼개진 것처럼 보였다.
“저는 폐하의 반려가 될 수 없습니다. 표식이 사라지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깨달았습니다. 그건 제가 폐하의 반려가 아니라는 증거임을. 더 늦기 전에 폐하의 진짜 반려를 찾으십시오. 폐하께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압니다.”
“헛소리를 하는군.”
레스칼은 그 말을 듣지 않았다.
“그대가 내 반려다.”
“아니요. 표식이 사라졌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대는 내 눈이 아니라 신전의 고발장을 믿는 건가? 그럴 이유가 없다. 그 어떤 신관도 그대의 표식을 확인한 적은 없어.”
이 자리에서 옷을 벗어 증명하지 않는 한 레스칼은 표식이 지워지고 있다는 말을 믿지 않을 것이다.
“제 마음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라실리아의 말은 좀 더 독해졌다.
“도무지 애정을 느낄 수가 없는 이가 어찌 반려 노릇을 하겠습니까. 저는 폐하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제 마음은 아마도, 기억이 나지 않아도 다른 이에게 있는가 봅니다.”
우두둑.
레스칼이 주먹을 쥐었다. 하얗게 튀어나오는 마디가 검은 비늘이 돋을 때처럼 아파 보였다.
“그게 소공작이라는 건가?”
“그와 연인 사이였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게 맞나 봅니다.”
“소문만 듣고 그걸 어떻게 아는데?”
“방금 보시지 않았습니까. 그가 저를 어떻게 위하는지. 저를 위해 가진 걸 전부 내던진 사람입니다. 애정을 품지 않기가 더 어렵습니다.”
“…….”
레스칼이 질끈 눈을 감았다.
“그럼 내가 가진 것도 가져가. 뭐든.”
“아니요. 그런 사람은 하나로 족합니다. 그리고 이미 소공작이 그런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는…… 믿지 못하겠어.”
레스칼이 눈을 떴다.
투둑, 금안의 주위로 까만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아니, 그림자가 아니었다. 검은 비늘이었다.
“폐하!”
그림자 기사들이 놀라 소리를 쳤다. 그렇다고 변이가 멈추는 건 아니었다.
“그대는 태어났을 때부터 내 것이었다. 내가 그대의 것이듯. 그대가 다른 자를 마음에 품을 리 없어.”
투둑, 이마가 갈라졌다. 갈라진 살갗을 타고 피가 흘렀다. 변이가 계속 진행되면 저 틈에서 뿔이 자랄 것이다.
“폐하…….”
라실리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블루문이 뜨지도 않았는데 황제의 모습이 달라지고 있었다. 그가 마족의 피를 통제하지 못할 만큼 커다란 동요를 겪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파도가 치는 것처럼 술렁대는 금안이 그 증거였다. 지금 황제를 뒤흔드는 동요가 고스란히 제게도 느껴졌다.
레스칼이 손톱이 붉어지기 시작한 손으로 라실리아의 손을 잡았다.
“그대의 힘으로는 나를 뿌리치지 못해. 이 자리에서 운 좋게 도망칠 수 있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그대가 어디로 향했든, 나는 그대를 찾아냈을 것이다. ……이대로 돌아간다.”
“폐하, 저는,”
라실리아는 어떻게든 레스칼을 설득해 보려고 했다.
“저를 가둬 놓으려는 자에게 애정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지금 폐하의 행동이 오히려 제가 반려가 아니라는 증거 같습니다. 부디 생각을 다시,”
그때였다.
우우우우웅.
재판을 기다리며 그 작은 방에 혼자 갇혀 있었을 때처럼 갑자기 허공에 검은 그림자가 번져 왔다.
“아……!”
테르나덴이 산 주술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 주술은 라실리아를 무사히 도망치도록 만들기 위함이었다. 라실리아가 도망칠 수 없게 되자 주문이 다시 살아났다.
“누이!”
그림자가 통로가 되고, 그 통로 안에서 테르나덴이 손을 뻗어 왔다.
“내 손을 잡아! 도망칠 수 있어!”
“미친……! 대체 무슨 놈의 주술사를 만난 거야! 데칸!”
리얀이 검을 쥐고 이쪽을 향해 뛰어왔다. 데칸이 두 손을 교차하며 눈을 감고 무언가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누이! 시간이 없어!”
통로가 조금씩 좁아졌다. 리얀이 미친 듯한 속도로 달려오는 중이었다.
라실리아가 테르나덴의 손을 잡았다.
“……윽!”
그 순간 고통이 느껴졌다. 완전히 비늘로 덮인 레스칼의 손이 제 손을 움켜쥐며 비늘이 살갗을 찔러 왔다.
“가지 마.”
“누이!”
툭, 투둑.
레스칼의 이마가 완전히 갈라졌다. 피가 후드득 쏟아지기 시작했다.
“누이! 뭐 하는 거야! 통로가 사라져 간다고!”
테르나덴이 비명처럼 들리는 고함을 질렀고, 반대로 레스칼의 목소리는 고통에 잠겨 낮아졌다.
“뭐든 해 주겠다. 내가 가진 건 뭐든 가져가. 뭐든 달라고 해. ……대신 다른 인간을 사랑하지 마라.”
“폐하…….”
“나를 좋아할 수 없다면 그건 받아들이겠다. 기다리겠다. 하지만 그게 그대가 다른 인간을 택할 수 있는 이유는 되지 못해.”
“…….”
후드득.
더운 피가 쏟아져 얼굴을 온통 적셨다. 붉어진 얼굴 사이로 유독 이질적인 금안이 도드라졌다.
그 모습은 끔찍하고 무서운 게 아니라 고통스럽게만 보였다.
“누이!”
통로가 절반 가까이 줄어들었다. 테르나덴이 안타깝게 라실리아를 불렀다.
“피엘리온 공! 황후 폐하의 손을 놓으십시오! 아니면 잘라 드립니다!”
마침내 통로 앞까지 도착한 리얀이 테르나덴의 손목을 노리고 검을 휘둘렀다.
“……엇?”
그러나 검은 통로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누이!”
마음이 급해진 테르나덴이 양손으로 라실리아의 손을 잡고 끌어당겼다.
“피엘리온 공!”
슷!
리얀이 다시 칼을 움직였지만 여전히 칼은 통로 밖을 미끄러질 뿐이었다. 칼을 던진 리얀이 통로 안으로 손을 넣으려 했다. 그러나 그것도 할 수가 없었다. 눈에는 보이지만 만질 수는 없었다.
리얀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데칸! 아직 멀었어? 빌어먹을! 난 아무것도 못 하겠어! 이 안에 들어갈 수도 없어!”
데칸은 대답 대신 주문을 더 빠르게 외웠다. 통로가 눈에 띄게 빠른 속도로 좁아져 갔다.
“누이!”
“뭐든 가져가. 내가 가진 거라면 뭐든.”
양쪽 다 누구도 손을 놓을 생각이 없었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라실리아가 테르나덴을 돌아보았다.
“누이……?”
“손을 놓도록.”
“누이!”
“공이 황후에게 품은 마음은 여기서 잘라 내겠다. 공은 공의 길을, 나는 나의 길을. 그간의 애정에 감사한다.”
“누이……. 누이가 왜…… 왜 그런…….”
망연해진 눈으로 테르나덴이 말을 더듬었다. 라실리아는 그가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의외로 손은 쉽게 빠져나왔다.
그 순간이었다.
“……됐습니다!”
우우우웅…… 핏!
데칸이 주문을 마쳤고, 통로가 사라졌다.
“누이……!”
테르나덴의 외침이 허공에 미약한 메아리를 남겼다. 보이지 않는 자의 목소리가 허공을 울리는 상황은 몹시 이질적이면서 동시에 애잔했다.
“이제 놓으십시오.”
라실리아가 레스칼을 향해 말했다.
그가 대답 없이 손을 쥐고 있자 라실리아는 다른 손으로 레스칼의 손을 잡고 억지로 붙들린 손을 잡아 뽑았다.
츳!
어딘가가 비늘에 긁혔다.
약지 안쪽이 베여 피가 방울방울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
그걸 본 레스칼이 손을 뻗으려고 했다.
“아니, 괜찮습니다.”
라실리아가 그를 말렸다.
잠시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라실리아는 레스칼을 떠날 수가 없어서 그를 선택한 게 아니었다.
피엘리온 소공작과 도망치지 않는 것을 선택한 것이었다.
남의 힘을 빌려 도망치는 게 아니라, 제대로 끝을 내기 위해서.
“폐하의 요구대로 다른 이는 잊겠습니다. 제 입으로 두 번 다시 피엘리온 공을 언급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기억하지 못하는 감정이 남아 있다고 하면, 그 감정도 기억에서 지우겠습니다.”
“그럼……,”
피로 물든 얼굴에 잠깐 온기가 떠올랐다.
“그 대가로 뭐든 해 준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요청하겠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라실리아의 말에 그 온기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이혼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