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결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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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결계
2023.03.01.
“시간이 없어. 곧 재판이 시작될 거야. 그땐 방법이 없어.”
테르나덴은 라실리아가 놀랄 틈도 주지 않고 빠르게 말을 내뱉었다.
“지금 도망쳐야 해. 내 손을 잡아, 누이.”
그러면서 그는 다짜고짜 라실리아의 손을 낚아채려고 들었다.
라실리아가 가까스로 테르나덴의 손을 피했다.
“내가 왜 도망쳐야 하는데?”
“공작님이 당했어.”
“……뭐라고? 누구한테? 어떻게?”
“그러니까……, ……하, 제길. 시간이 없는데.”
테르나덴이 초조하게 닫혀 있는 문을 보며 부지런히 입을 움직였다.
“공작님한테 들었어. 누이가 하려는 짓. 스스로 죄를 인정하고 폐위당하기로 했다면서. 그건 틀림없는 사실이지?”
“그래.”
“공작님은 그걸 원치 않았던 것 같아. 내게 다시 주술사를 데려오라 하셨어. 표식을 되살릴 수 있는 방법을 물어보셨겠지. 하지만 똑같은 주술을 똑같은 사람에게 다시 쓸 수 없다는 건 나도 아는 일이야. 그건 불가능해. 그래서 공작님도 포기하고 신전과 거래를 한다고 하셨어. 누이가 시킨 대로.”
거기까지는 잘못된 게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테르나덴이 저렇게 초조하고 다급한 얼굴을 하고 있진 않을 것이다.
“그런데? 혹시 거래가 잘못되기라도 한 거야?”
“아니.”
테르나덴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말을 했다.
“공작님이 이상해졌어. 신전에 다녀온 뒤로.”
“이상해졌다니. 어떻게?”
“나는 잘 모르겠는데 주술사가 그랬어. 의식의 일부를 빼앗겼다고.”
“그게…… 무슨 말이야?”
의식을 빼앗겼다는 말이 불길했다.
순간 머릿속에 황실 재단사가 스쳐 지나갔다. 아무런 이상이 없어 보였지만 모든 생각과 행동이 단 하나의 목적으로 이어지던 그 상태가.
“말했듯이 나도 몰라. 그런데 정상이 아니랬어. 빼앗긴 의식이 돌아오려면 그걸 빼앗아 간 자가 원하는 바를 이루는 방법밖에 없다고 했어. 주술이 아니라서 주술사가 개입할 수도 없대. 그게 무슨 말인지 알겠어?”
테르나덴이 라실리아의 어깨를 붙들었다.
“신전의 누군가가 누이를 노리고 있다는 말이야. 주술도 아니고 마법도 아닌, 알 수 없는 힘을 지닌 누군가가! 재판 따위 공정하긴커녕 엉망진창일 거라고. 결과가 어떻게 될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해. 도망쳐야 해.”
“신전에서 황실을 상대로 뭔가 일을 벌이고 있다는 건 알아. 지금 그 대상이 나라는 것도. 하지만 재판이잖아. 법을 따르는 흉내는 내야지. 황법에 의하면 황족은 살인으로 처벌받지 않는다고 했어.”
“지금 그게 문제일 것 같아?”
테르나덴이 칼날처럼 날카로운 목소리를 내뱉었다.
“놈들이 파고드는 건 표식이야. 누이에게 레스칼의 반려가 될 자격이 있는지 물어 댈 거라고.”
“그래. 표식이 사라졌으니까 폐위를……,”
“표식이 사라졌는지 아니면 처음부터 없었는지 누가 알 수 있는데?”
“뭐?”
“표식이 사라지는 건 이제껏 없었던 일이야. 당연히 그걸 따지고 들 거야. 표식이 처음부터 없었다고 하면 피엘리온 가문은 반역을 저지른 거야. 누이나 공작님이나 나나, 다 같이 교수대에 매달리는 처지가 될지도 모르지.”
“…….”
라실리아가 굳었다.
“이 옷, 괜히 입힌 게 아니야. 누이는 저 밖에서 표식을 공개하게 될 거야. 수도의 귀족들이 전부 보는 앞에서. 그중에는 물론 황제도 있을 테고.”
“그게……,”
거래는 사라졌다. 거래를 이뤘어야 할 공작은 신전의 수중에 떨어졌다. 그들이 공작에게 무슨 목적을 주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황실 재단사가 하지 못한 일을 하게끔 만들지 않았을까.
재판을 위해 마련한 안전장치가 사라졌다.
신전이 바라는 것은 폐위보다 더 끔찍한 결말이었다.
물론 황제는 그런 일은 막으려 들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끝이었다. 이제 다시는 황제를 떠날 기회를 만들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까 도망치자, 누이. 그 방법밖에 없어. 공작님도 믿어서는 안 돼. 나밖에 없어, 누이.”
“…….”
라실리아는 입술을 물고 테르나덴이 내미는 손을 바라보았다.
“주술사가 이 나라를 벗어나도록 도와줄 거야. 당장은 힘들겠지만 나머지는 그때 가서 생각해. 누이가 나 하나로 만족 못 한다는 건 알아. 하지만……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재판을 받고 있을 수는 없잖아.”
“그러면……,”
“제발, 누이. 내가 얼마나 더 빌어야 하는데? 제발 한 번이라도 내 말을 좀 믿어 봐. 누이도 알잖아. 이 세상에서 누이를 제일 아끼는 사람은 나라는 걸.”
그때였다.
-제발. 더 늦기 전에. 제발 내 말을 믿어 줘. 나는 그저 누이를 살리고 싶을 뿐이야. 날 사랑하지 않아도 괜찮아. 일단 도망쳐야 해.
테르나덴의 속마음이 생생하게 들려왔다.
귀로 들려오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눈으로 보는 것에 더 가까웠다.
테르나덴은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그의 속마음이 들려오는 이유는 몰랐다. 어쩌면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일지도 몰랐다. 지금이 아니라면 영영 도망칠 수 없을 테니까.
“어떻게, 어디로 갈 건데?”
“하아, 다행이다.”
라실리아가 손을 내밀자 테르나덴이 그 손을 잡아 이마에 붙였다. 그는 진심으로 안도하고 있었다.
“내가 들어온 곳으로. 누이를 데려올 수 있게 하는 주술이야. 누이가 안 가겠다고 하면 저 문은 그대로 사라졌을 거야.”
“……? 그럼 너는?”
“나도 여기 남았겠지. 이 방은 달아날 곳이 없으니까.”
“아…….”
제 인생을 전부 걸 정도로 황후를 사랑한 인간이 여기에 있었다.
‘내가 황후가 아니라고 말해 줘야 해.’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은 일단 여기서 달아나야 했다.
“가자.”
테르나덴이 라실리아를 주술로 만들어진 통로로 이끌었다.
이것으로 벗어날 수 있기를.
전부 잊기를.
그렇게 빌며 라실리아는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는 통로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 * *
“……엇?”
황실 마법사 길드 소속의 상급 마법사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는 오늘까지 일주일 간 하리오스 대신전 주변에 깔아 둔 봉쇄 및 추적 마법진을 점검하던 중이었다.
마법이란 구시대의 유물이었다.
학문으로 치자면 배울 게 끝도 없었는데, 성과는 그에 미치지 못했다.
이 봉쇄 마법진만 해도 그랬다. 이 정도 마법진을 구동시키려면 어림잡아 삼십 년은 마법 공부를 해야 했는데, 그러느니 그냥 기사 백 명을 시켜 경계를 세우는 편이 훨씬 합리적이었다.
그런저런 이유로 마법사의 숫자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었다. 무엇보다 몇십 년씩 공부에만 매진할 만큼 뒷바라지를 해 줄 만한 집안에서 태어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제국의 마법사들은 대부분 황실 길드 소속이었다.
일단 길드에 가입하면 생활비와 연구비가 해결되었다. 늙어 죽을 때까지 마법에 파묻혀 살 수 있었다. 그 덕에 황실에서 동원령이 내려오면 군말 없이 따라야 했지만, 그런 경우는 드물었다.
이번은 그 드문 일 중 하나였다.
때마침 올해 연구비 예산 책정을 앞두고 있는 시기라 길드 마스터는 아낌없이 상급 마법사들을 보내왔다.
오늘 대신전에 동원된 상급 마법사들은 모두 일곱, 보조 마법사들이 그 곱이었다.
“마법진에는 아무 이상이 없는데…….”
상급 마법사 프리안이 다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봉쇄 마법진에는 뚫린 곳이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추적 마법진이 움직이고 있었다.
황실에서 요구한 것은 대신전 주변에 결계를 치는 것이었다. 그 어떤 자가 드나들건 간에 황실에서 신원을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봉쇄와 추적 마법진을 연쇄적으로 걸어 놓았다. 진 하나가 움직이면 다른 것들도 따라 반응하게 되어 있었다.
“왜 추적진 하나만 따로 움직이지?”
“엇? 그건 누가 결계를 뚫고 빠져나갔다는 뜻인데요?”
“근데 왜 봉쇄진은 잠잠할까요?”
프리안의 보조 마법사들이 스승을 따라 고개를 갸웃댔다.
평생 마법밖에 모르는 이들은 상급 마법사라 해도 실전 경험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마법 이론에는 해박할지 몰라도 돌발 상황에 대한 반응은 느렸다.
“으음…… 글쎄다.”
“진이 불완전했다거나?”
“스승님이 룬 문자를 쓰실 때 오타를 내셨다거나?”
프리안이 울컥 인상을 썼다.
“안 그랬어!”
“그럼 왜 그럴까요?”
“연계진이라 추적진 하나만 잘못될 리가 없는데요.”
계속 고개를 갸우뚱대며 묻기만 하는 제자들을 스승이 째려보았다.
“멀뚱히 서서 묻지만 말고 답을 찾아와!”
“어? 스승님도 모르시는 걸요?”
“저희가요?”
“아, 어디서 물어보고 오든지! ……가만.”
프리안이 갑자기 고개를 홱 옆으로 돌렸다.
“저쪽 진도 움직이는데?”
“응?”
“네에?”
“저쪽 것도 추적진이야!”
하나면 몰라도 두 개씩이나 이상하다는 건 문제를 의미했다.
내년 연구비가 걸려 있노라고 저를 따로 불러 신신당부하던 마스터의 얼굴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추적진만 움직인다는 건 여길 빠져나간 게 있다는 건데……. 그러나 봉쇄진이 움직이지 않았다는 건……. 가만, 여기가 신전이었지.”
프리안이 제자들에게 물었다.
“혹시 신성력 중에 순간 이동, 뭐 그런 것도 있더냐?”
제자들이 손사래를 쳤다.
“에이, 그럴 리가요.”
“분야가 완전 다르지 말입니다. 신성력은 다섯 분야밖에 없습니다. 예지, 치유, 정화, 번성, 그리고 저주. 그 외에는 없지요.”
“그럼 뭐가 있는데! 마나와 서로 영향을 주고받지 않으며 순간 이동을 할 수 있는 게!”
“어…… 그런 건……. 아!”
“주술이라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정답이었다.
“오, 그래! 주술! 주술이 있었어! 주술로 봉쇄를 뚫고 들어왔으니 진은 잠잠했지만, 봉쇄를 걸어 놓은 인물이 사라졌으니 추적진이 움직이는 게야!”
프리안이 갑자기 신이 나서 양손을 치켜들었다.
다시 말하지만 요새 마법사들은 실전 경험이 거의 없었다. 마법을 써먹을 기회가 별로 없었다는 말이었다. 이 정도 대규모 연쇄진은 이론만 알 뿐, 연구실에서 실험해 볼 수도 없는 것이었다.
“내 지팡이! 지팡이 가져와! 그리고 어서 가서 근위대에 알려!”
제자들이 후다닥 움직여 하나는 지팡이를 가져오고, 하나는 근위대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프리안이 혼신의 힘을 다해 지팡이를 휘둘렀다.
“추적! 추적의 추적! 추적 대상을 봉쇄!”
우우우웅!
그의 손짓에 따라 신전 주위에 빼곡히 그려 놓은 마법진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저기에 마차를 세워 뒀어.”
주술로 만들어진 다른 차원의 통로를 걷는 기분은 몹시 이상했다. 환하면서도 어두웠고, 시간이 빠르면서도 느렸다. 생각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 듯하다가도 머릿속이 텅 비었다.
그 이상한 길이, 어느 순간 끝났다.
라실리아는 자신이 벽을 등지고 서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낮지만 매끄러운 그 벽은 신전을 에워싼 벽이었다.
“신전을 나온 거야?”
“응.”
테르나덴이 라실리아의 손을 끌어당겼다. 손이 차가웠다. 식은땀이 고여서였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저 나무 뒤에……. 아, 저기 있네.”
테르나덴이 공작가의 마차라고 하기엔 아주 평범하게 생긴 검은 사두마차를 가리켰다.
“이제 다 됐어. 저 마차를 타면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거야. 이대로 국경을 넘으면 돼. 일단 트리니다드로 가자. 누이가 그런 곳에 갔다고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야.”
차갑던 손바닥에 조금씩 온기가 돌아왔다.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다는 증거였다.
‘그래……. 돌아가는 거야.’
라실리아가 다시 한번 마음을 다독이고 걸음을 빨리하던 그 순간이었다.
우우우우우웅…… 쾅!
땅이 흔들린다 싶었다. 마차 밑에 푸른빛이 언뜻 고이는 것도 같았다.
쾅! 콰직!
그 빛이 떠오르며 순간 마차가 부서졌다.
“엇! 어, 어떻게?”
테르나넨이 두 눈으로 보면서도 믿지 못하겠다는 듯 소리쳤다.
마차를 부순 푸른빛 위로 그보다 진한 색의 다른 빛 무리가 떠올랐다.
우우우우웅…… 팟!
그 빛마저 사라졌을 때, 부서진 마차 위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생겨났다.
유감스럽게도 모두 얼굴을 아는 이들이었다.
“황후 폐하.”
착잡한 표정으로 저를 부르는 이는 리얀이었다. 그리고 세르벤이, 데칸이, 그리고…….
“일단 그 손은 놨으면 하는데.”
오늘따라 창끝처럼 뾰족한 시선을 한 황제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