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누군가의 상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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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누군가의 상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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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누군가의 상처
2023.02.26.
“……네?”
놀랐다. 놀랄 수밖에 없었다.
델라르타로 돌아가기 위해 라실리아는 부정한 황후로 남는 것도 감수했다. 어떤 오욕을 뒤집어쓰더라도 폐위가 될 생각이었다.
그런데 가도 된다고 했다.
이렇게 간단히 해결될 일이었던 걸까.
“요양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지. 거리가 좀 멀긴 하지만.”
“그렇다면……,”
“수도를 오래 비운다고 뭐라고들 하겠지만, 감당하겠다. 내게는 그대의 기억을 되찾는 게 더 중요해.”
“……폐하께서 같이 가시겠다는 말씀이로군요.”
어쩐지.
그렇게 간단할 리 없었다.
“나는 그대와 떨어져 있지 못해. 알고 있잖아. 블루문은 늘 뜰 것이다.”
“그렇겠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잠깐 흔들렸다.
같이 가는 거라면, 모두와 헤어지지 않아도 될 테니까.
제 생각이 당혹스러워 라실리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신이 나간 모양이었다.
지금 제 곁에 있는 모든 것은 진짜 반려를 위한 것이지 자신에게 주어진 게 아니었다.
“좀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제가 가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폐하께 그 먼 길을 동행해 줄 것을 부탁할 수는 없으니까요.”
“부탁해.”
금안이 제 시선을 옭아맬 것처럼 다가왔다.
“약속했잖아. 부탁할 일이 생기면 그렇게 하겠다고. 가고 싶으면 부탁을 해.”
그리고 황제는 무언가를 얻어낼 것이다. 사소하고 하찮지만, 갈수록 무시할 수 없어지는 무언가를.
“괜찮습니다.”
라실리아는 거기서 미련을 잘랐다.
모두를 위해서 자신은 제자리로 돌아가야 했다. 그래야 황제도 제자리에 맞는 사람을 찾을 것이다.
“……거절할 줄은 몰랐는데.”
레스칼이 느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델라르타에 가고 싶어 했던 게 아니었나?”
“지금은 재판을 앞두고 있잖습니까.”
“그러니까 재판이 델라르타에 가는 일보다 그대에게 중요하다는 말인가?”
“……순서가 그렇지 않습니까.”
“순서는 상관없다면? 재판은 미룰 수 있다. 델라르타에 먼저 다녀올 수도 있어.”
하지만 황제가 동행할 것이다.
그럼 상황은 달라질 게 없었다.
라실리아가 억지로 입안에 들어온 꿀을 뱉어 내듯 레스칼이 한 달콤한 말을 머릿속에서 떨쳐 냈다.
“그럼 저는 또 부탁을 해야 되겠지요.”
“내게 부탁하는 일이 그렇게나 싫은가?”
부탁이 싫은 게 아니라 그가 부탁의 대가를 요구하는 게 싫었다. 그 사소하고 하찮은 요구들이 제게 남기는 감정들이 싫었다.
“……네.”
그 말을 들은 레스칼이 눈썹을 찡그렸다.
“이해할 수가 없군.”
“이해를 부탁드리진 않았습니다.”
“…….”
뭉개듯 입술을 다물고 있던 레스칼이 불쑥 질문을 던졌다. 시선은 여전히 라실리아에게 단단히 박힌 채였다.
“그거 아나?”
“무얼 말입니까?”
“기억을 잃은 뒤로 그대가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은 전부 내 예상과 어긋난다는 걸.”
“그렇……습니까?”
“그리고 그게 의미하는 건,”
레스칼이 뜬금없이 라실리아의 머리칼을 한 줌 쥐었다.
고개를 숙인 그가 머리칼을 코끝으로 가져가 숨을 들이쉬었다.
“그대가 하는 모든 게 기억을 잃기 전 카르타헤나 피엘리온과 다르다는 것이다.”
동작만큼이나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아니, 의미심장한 말이라서 지금 그의 행동이 다르게 느껴지는 것인지도 몰랐다.
레스칼이 희미한 웃음을 띠운 채 머리칼을 놓아주었다.
“역시 달라. 카르타헤나에게서는 한 번도 몸에서 나는 냄새가 좋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다.”
“…….”
말이 없는 라실리아를, 레스칼이 평소와 다르지 않은 무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라실리아는 이제 엇비슷한 무표정들을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 그가 짓고 있는 표정은 이상하게도 다정했다.
“재판은 걱정하지 말도록. 그대가 기억하지 못하는 죄를 신관들이 덮어씌운다고 해도 그대는 무사할 것이다.”
다정한 표정으로 그가 하는 말은 다정하지 않았다.
황제는 마치 라실리아가 재판을 통해 무얼 바라고 있는지 알고 있는 것처럼 말을 했다.
“그럴 수 있는 건가요? 신 앞에서 받는 재판입니다. 결과 또한 신의 이름으로 정해질 텐데요. 폐하께서 그 결과에 손을 댈 수는 없지 않습니까.”
“필요하다면 그럴 것이다.”
“법을 어기는 일을 싫어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래서 슈라이든 공녀에게도,”
“그건 내 일이었다. 지금은 그대의 일이고.”
레스칼의 입을 빌리자 그것은 세상에서 제일 당연한 말이 되어 버렸다.
라실리아는 표식이 사라졌을지도 모르는 황후를 여전히 제 반려로 대하는 황제를 이해할 수 없었고, 이해할 수 없는 만큼 마음이 무거웠다.
‘폐위가 그렇게 쉽지는 않겠지……. 하지만 지금으로는 그게 최선이야.’
라실리아는 안타까운 눈으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적어도 그건 진심이었다. 그가 어서 제 피를 다스려 줄 진짜를 만나길 기도했다.
“그렇다면 저는 폐하를 믿고 마음 편히 재판을 받아도 되겠군요.”
“……어떻게 해서든 재판을 받겠다는 말이로군. 심지어 결과가 정해져 있다고 해도.”
“네. 말씀드린 대로요.”
레스칼은 분명 폐위에 반대할 것이다. 그러나 신전과 공작은 최선을 다해 폐위를 지지할 것이다.
신전은 황후를 재판장으로 끌어내기 위해 황실 재단사를 이용하는 짓도 서슴지 않았다. 그렇게 호락호락 황제에게 재판 결과를 양보하진 않을 것 같았다.
결국 뚜껑을 열어 봐야 했다.
“밤이 늦었습니다. 이제 그만 가서 잠을 청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정중하긴 해도 그만 나가 보라는 말이었다.
시간이 한참 흐르긴 했다.
모르는 사이에 밤하늘의 색이 달라지고 있었다. 새벽의 푸른빛이 섞여서 그럴 것이다.
“그 전에.”
레스칼이 라실리아의 손을 끌어왔다. 얘기를 하는 동안 덴 것을 잊고 있었던 손가락 위에 그가 입술을 댔다.
“용서를 구하지. 그대를 다치게 한 것에.”
“……? 폐하와는 상관없는 상처입니다.”
“덜 자란 새가 만든 상처이니 내가 만든 것과 다름없다.”
레스칼은 아주 천천히 손을 놓았다. 그가 어떻게 손을 잡는지, 어떻게 입술을 댔는지, 어떻게 다시 놓아주는지 모두 똑똑히 기억할 수 있을 만큼 느리게.
“부디 빨리 낫기를. 그리고 낫게 되면 나를 용서하기를.”
“…….”
라실리아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동안, 레스칼이 느린 걸음으로 사라졌다.
누가 만들었든 같은 상처라는 말은 라실리아를 내내 잠들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건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제게 화를 내고 울음을 터트렸던 피피의 마음도 황제의 마음과 같다는 의미였으므로.
* * *
“옷이 너무 불편하겠어요, 황후 폐하. 이를 어쩌면 좋아…….”
이베트가 안쓰러운 얼굴로 발을 동동 굴렀다.
엘리아든의 재판 절차는 엄격했다.
라실리아는 재판이 있기 사흘 전부터 아무와도 접촉하지 못했다. 이베트도 예외가 아니라 사흘 동안은 얼굴을 보지 못했다.
문 앞에 신전에서 보내오는 빵과 물을 두고 갈 뿐이었다.
재판 당일이 되어서야 이베트가 옷을 입혀 주기 위해 방에 들어올 수 있었다.
아무런 색도, 장식도 없는 거친 무명옷은 재판을 받는 자라면 신분의 예외 없이 입어야 했다. 재판은 공정해야 하니 겉모습에 현혹되지 않기 위한 의도였다.
그건 이해하지만 하나 곤란한 일이 있었다.
최소한의 속옷도 입을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소매가 붙어 있는 긴 자루 같은 옷을 맨몸에 걸치는 건 꽤나 곤혹스러웠다.
이베트는 옷 같지 않은 옷을 어떻게든 수습해 주려고 애를 쓰며 말했다.
“사흘간 괴로우셨죠. 아무 데도 나가지 못하시고 식사도 그렇게 형편없는……. 아니, 신전에서는 결백한 빵이라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뭐 대단한 빵이 되는 건 아니잖아요. 사람이 어떻게 빵하고 물만 먹을 수 있느냔 말이죠.”
“사흘이 그리 길진 않았다. 마음 쓸 것 없어.”
“네……. 그리 말씀하신다면요.”
이베트가 기운 빠진 목소리로 작게 대답했다.
지난 사흘간 부실한 식사와 재판을 앞둔 중압감으로 혹시 병이라도 나시면 어쩌나 오만 걱정이 앞서 죽을 맛이었는데, 정작 황후는 불평 한마디 없이 점잖기만 했다.
이베트는 그게 황후답다고 감탄하면서도 라실리아에게 못내 서운했다.
“옷은 다 되었습니다, 황후 폐하. 이런 거지같은…… 앗, 죄송합니다. 하여간 이런 흉측한 주머니 같은 옷을 입으셔도 황후 폐하께서는 너무너무 아름다우세요.”
옷을 다 입혔다는 말에 라실리아는 긴장을 풀었다.
이베트에게 표식이 있는 부분을 감추기 위해 계속 몸의 각도를 신경 써야 했다.
“못나 보이지 않는다니 다행이네. 이제 신전으로 출발하면 되는 건가?”
“네. 시간이 되면 근위대가 모시러 올 거예요. 마차를 타고 이동하시면 됩니다. 잠시만 기다리셔요.”
“그래.”
이제 곧 황궁을 벗어나게 될 것이다.
편지는 화장대 서랍 안쪽에 넣어 두었다. 누군가 청소를 하다 발견하게 될 것이다. 가능하면 그 사람이 이베트가 되었으면 했다.
그 외에는 딱히 준비랄 것도 없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피피를 못 보고 떠나게 된다는 점이었다.
“아직 화가 안 풀린 모양이지.”
라실리아가 창문을 보면서 무의식중에 작게 내뱉자 이베트가 두 손을 꼭 마주 잡았다.
“아…… 렌 님이…….”
“혹시 내가 없는 사이에 돌아오거든 미안하다고 전해 줘. 그리고 고마웠다고.”
“네, 황후 폐하. ……아? 그런데 그 말은 이상해요. 왜 꼭 렌 님을 다시는 못 볼 것처럼 말씀하세요?”
왜냐면 그럴지도 모르니까.
“돌아오면 전해 줘.”
라실리아는 그렇게만 말하고 창문에서 시선을 돌렸다.
똑똑.
“황후 폐하. 모시러 왔습니다.”
그리고 떠날 시간이 되었다.
* * *
하리오스 대신전은 이제껏 본 적이 없는 크기였다.
수도 북쪽의 가장 높은 언덕 꼭대기에 지어 놓은 웅장한 신전은 한눈에 다 담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규모로 따지면 황궁에 비해 얼마 작지도 않을 것 같았다.
‘어마어마한 곳이네.’
저 크기를 유지하려면 엄청난 숫자의 신도와 신관이 필요할 것이다.
‘그래서 황실을 상대로 고발장을 쓸 수 있었던 걸까.’
신전을 향하는 언덕 입구에는 벌써 엄청나게 많은 마차들이 몰려 있었다. 오늘 재판에 참석하기 위해 온 귀족들의 마차였다.
그들이 각자 수행 기사를 데려온 탓에 신전은 재판이 아니라 전쟁이라도 벌어지는 분위기였다. 물론 그 분위기를 만드는 데는 신전으로 가는 길을 빈틈없이 에워싼 제국 근위대가 가장 큰 몫을 했다.
“도착했습니다, 황후 폐하. 내리십시오. 여기서부터는 걸어 올라가야 합니다.”
“알겠다. 문을 열어라.”
“네, 황후 폐하.”
달칵.
세르벤이 마차 문을 열었다.
“재판 전이라 손을 빌려드릴 수 없음을 양해해 주십시오. 혼자서 내리셔야 합니다.”
재판복을 입은 자는 아무와도 몸이 닿을 수 없었다.
라실리아는 뻣뻣하고 거친 옷을 양옆으로 잡고 마차에서 내려섰다. 재판복에는 다른 신발을 신을 수 없기에 라실리아는 지금 맨발이었다.
“재판장으로 안내하겠습니다.”
라실리아가 바닥을 딛는 것을 확인한 세르벤이 근위대에게 손짓을 했다.
척척척척.
마차를 호위해 온 근위대가 보폭을 맞춰 언덕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먼저 앞서가던 귀족들이 전부 걸음을 멈추고 라실리아가 지나가길 기다렸다.
그렇게 삼십 분 가까이 언덕길을 오르자 신전의 정문이 나타났다.
라실리아는 재판장 바로 옆에 딸린 아주 좁은 방으로 안내되었다.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재판이 시작되면 나가야 했다.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죄송하지만 절차에 따라 밖에서 문을 잠그겠습니다.”
라실리아를 의자 하나 덜렁 있는 대기실에 데려다 놓은 세르벤이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창문이 없어서 예언자의 방을 떠올리게 하는 그곳은 라실리아에게는 별로 불편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도록.”
“송구합니다, 황후 폐하.”
탁, 철컹!
문이 닫힌 뒤 빗장이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라실리아는 의자에 앉아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오늘이 마지막이었다. 이제 곧 결말이 날 것이다.
……아니, 어쩌면 아닐지도 몰랐다.
우우우우웅.
아무런 장식이 없는 벽 한 쪽에, 갑자기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
그림자는 점점 크고 깊어졌다. 그러자 그림자가 아니라 구멍이 되었다. 벽이 어딘가로 연결되었다는 뜻이었다.
“무슨……!”
라실리아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누이! 나야.”
문만큼이나 커진 구멍에서, 난데없이 피엘리온 소공작이 걸어 나왔다.
몹시 다급하고 절박한 표정을 한 그가 라실리아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시간이 없어, 누이. 지금 도망쳐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