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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신의 영역 (50/96)


50. 신의 영역
2023.02.22.



“네?”

“뭐라고요, 폐하?”

둘 다 질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리얀은 혹시 뭘 잘못 들었나 싶어 귀를 양옆으로 잡아당겼다.


“사람을 바꾸다니요?”

“몸을 바꾸는 그런 것.”

“네?”

“네에?”

데칸이 당황해 주춤대다 이어서 고개를 흔들었다.


“그건 인간이 넘보지 못하는 영역입니다, 폐하. 그 어떤 주술로도 가능하지 못하리라 봅니다.”

“그런가.”

레스칼의 반응은 그 정도였지만 리얀은 그가 던진 말을 놓치지 않았다.


“폐하께서는…… 그러니까 황후 폐하가 기억상실이 아니라 아예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계신 겁니까?”

“그게 가장 말이 될 것 같은데.”

레스칼의 금안이 느리게 움직였다.


“황후는 달라졌어. 말투도 몸짓도 하는 짓도 달라.”

“그야…… 그건 그렇지만.”

황후가 아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는 말을 먼저 꺼낸 이는 리얀이었다. 아예 다른 사람이 된 거라면 좋겠다고 한 것도 리얀이었다.

그래도 그건 머리가 선뜻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데칸도 주술로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하는데……. 아니, 대체 그런 게 어떻게…….”

“생각해 봐. 황후가 달라지고 나서 불사조가 깨어났다. 황후는 내 변이를 다스리지.”

“네, 하지만 그건 황후 폐하께서 반려라는 증거이지 어느 날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되셨다는 증거일 수는 없습니다.”

“그전까지는 없던 일이었다.”

“그게, 음……. 폐하께서 반려라는 자각을 뒤늦게 하셨듯이 황후 폐하께서도 뒤늦게……,”

“아니면 진짜가 황후가 되었기에 내가 그걸 알아본 것일 수도 있고.”

“으음…….”

“마족의 피와 반려는 한 쌍으로 태어난다고 했다. 서로를 자각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는 말은 어디에도 없었어.”

“아니, 무려 칠백 년 전에 만들어진 주술인데 세월이 그만큼 흘렀으면 좀 느려질 수도 있고 약해질 수도 있고 그런 거 아닙니까.”

“그게 더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몸이 바뀌었다는 말보다?”

“아니, 그……. ……하, 잘 모르겠습니다.”

열심히 눈을 굴리며 생각하던 리얀이 결국 포기했다.

황후에 관해서는 무엇도 속단할 수가 없었다. 전부 다 상식 밖이었다.


“지금 황후가 다른 사람이라는 내 말이 맞다면, 델라르타 출신일 것이다.”

“음? 네?”

갑자기 나오는 낯선 말이 분위기를 바꾸었다.


“황후가 델라르타의 신전을 언급한 적이 있었어. 기억상실을 치유하기 위해서라고는 했지만.”

“그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피엘리온의 소공작이 알려 준 정보라고 하셨고요.”

“하지만 신전은 제국에도 많다. 치유의 신을 모시는 신전이라고 해도 너무 멀지 않은 곳에 있어. 델라르타의 신은 치유의 신이 아니지 않나?”

“네. 물과 번영의 신입니다.”

데칸이 빠르게 나섰다.


“그렇다면 피엘리온 소공작에게 확인하면 되겠군요. 소공작이 정말로 델라르타 신전의 치유력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게 맞는지.”

“그래.”

“지금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데칸이 언제 있었냐 싶게 자리를 떠났다.

……털썩.

그가 사라지자 레스칼이 바짝 세우고 있던 등을 카우치에 기댔다. 피곤한 듯 눈을 가렸지만 리얀은 왠지 그가 좀 전과는 다른 표정을 짓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폐하. 제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말입니다……. 지금 뭔가 좋은 생각을 하시는 것 같은데, 맞습니까?”

“……네 눈에도 그렇게 보이나?”

“네, 조금. 아니, 꽤 많이요.”

한숨이라고 하기엔 미소를 더 많이 닮은 숨소리가 레스칼의 입술에서 흘렀다.


“황후가 다른 사람과 바뀐 거라면.”

“네, 폐하.”

“소공작을 좋아하는 게 아니야.”

“아, 저런?”

“다른 인간을 좋아하고 있는 게 아니야.”

“그게 그렇게 좋으신 겁니까?”

레스칼은 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달라진 표정으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황후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로 그가 얼마나 안도하고 있는지.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황후가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고, 그래서 진짜 반려가 된 것이라고 해도 문제는 여전했다.

어쩌면 더 심각할지도 몰랐다. 진짜 반려가 레스칼을 거부하고 있었다.


“황후가 재판을 받겠다고 한 이유와 연관이 있을 것이다.”

방금 전까지 달고 부드러운 꿈을 꾸는 것 같았던 레스칼의 금안이 다시 예리하게 변했다.


“그걸 알아야 해.”

“물론입니다.”

“데칸이 소공작에게 확인을 마치면 그 즉시 움직여. 피엘리온 가에 사람을 붙이고, 가능하다면 트리니다드에서 온 주술사를 확보해라. 그리고 재판일에는 신전에 결계를 쳐.”

“결계라면…… 방어진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마법진도 포함해서.”

“알겠습니다. 간만에 마법사들을 굴리게 생겼군요. 매일 하는 일 없이 밥만 축낸다 싶었는데.”

리얀의 대꾸는 가볍게 들렸지만 내용은 그렇지 못했다.

신전에 마법진을 치고 근위대로 방어진을 세우라는 것은 그만큼 심각한 일에 대비를 하겠다는 뜻이었다.

재판은 결코 순탄히 끝나지 않을지도 몰랐다.

데칸은 정확히 세 시간 뒤에 돌아왔다.

피엘리온 소공작은 델라르타라는 작은 왕국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 * *

툭. 툭.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잠을 깨웠다.

툭. 툭.


“누구…… 피피?”

어렵게 든 잠이 훌쩍 달아났다. 라실리아는 며칠 동안 말도 없이 사라져 있던 피피가 다시 나타났다는 사실에 기뻐 활짝 창문을 열었다.


“그동안 어디 있었어?”

“피.”

“말 안 해도 괜찮아. 이젠 화가 다 풀렸어? 그럼 어서 들어와. 같이 자자.”

“피!”

그럴 수 없다고 했다.


“삐이, 피이. 피!”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고 어서 말을 하라고 했다.


“……그럴 수가 없어.”

황제와 피피는 서로 말이 통하니 피피에게도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해야 했다.


“삐! 삐이!”

“왜냐면……. ……사실이니까.”

“피? 삐이……, ……삐잇!”

화륵!

충격으로 비틀대던 피피가 울컥 소리를 지르자 몸에서 빨간 불꽃이 일었다.


“피피!”

라실리아가 저도 모르게 피피에게 손을 뻗었다.


“아, 뜨거워!”

진짜 불이었다. 불에 닿은 손가락이 데였다.


“……삐,”

피피가 저도 놀랐는지 날개를 움칫했다. 불꽃은 사라졌지만 피피가 훌쩍 뒤로 멀어졌다.


“괜찮아. 많이 데지 않았……,”

“피이!”

거짓말쟁이.

피피가 그런 말을 남기고 까만 밤하늘 너머로 날아가 버렸다.


 


“……진짠데.”

라실리아가 발갛게 달아오른 검지를 내려다보았다.

불에 닿았을 땐 차가운 것을 대어 열기를 식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야비하지. 널 상처 입힌 건 난데. 네가 준 상처를 나 혼자 낫겠다고 치료하면.”

상처는 그냥 놔두기로 했다. 이 정도라도 아파야 할 것 같았다.


“진짜를 찾으면……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게 될 거야.”

그게 지금 자신에게는 변명이자 위안이었다.

침대로 돌아가려던 라실리아는 잠옷 위에 가운을 걸쳤다.

어차피 잠은 달아났다.

재판이 멀지 않았으니 미리 해 둘 일이 있었다.

슈라이든 공작에게 편지를 써 둘 생각이었다.

생각해 보니 엘리아든의 재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유죄를 시인하고 폐위를 선고받은 황후가 다시 황후궁으로 돌아올 수 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최악의 경우 인사조차 없이 다신 보지 못하게 될 수도 있었다. 그럴 때를 대비해 이베트의 신분을 보장해 달라는 부탁을 남겨야 했다.


‘황후가 폐위되면 제1시녀에게 무슨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공녀 신분이라면 궁인처럼 함부로 대할 수가 없으니 나을 것이다.


‘어쩌면 황궁에서 계속 일할 수는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리고 피피도 부탁해야 했다. 불사조라고 해도 피피는 라실리아의 눈에 아직도 너무 작았다.


‘아, 그리고 그 새들도. 다시 돌아올지도 모르니까. 그때는 시그레스 경이 너무 괴롭히지 않도록 말해 달라고 해야겠어.’

편지가 아주 길어질 것 같았다.

가운을 여민 라실리아가 침실에서 사실로 이어지는 문을 열었다.


“…….”

그리고 발을 멈췄다.

며칠 동안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황제가 옆방에 있었다.

* * *

자고 있던 게 아니었다.

이쪽을 보는 시선은 선명하고 뚜렷했다.

마치 자신이 여기로 올 것을 알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어쩐…… 일이십니까.”

작게 새어나오는 목소리가 도무지 제 목소리 같지 않았다.


“그대가 자지 않을 것 같아서.”

“……그래도 깨어 있기엔 너무 늦은 시간입니다. 돌아가서 주무십시오.”

“나만 가서 자라는 건 불공평한데. 그대는 안 잘 생각이잖아.”

“…….”

공평을 따질 일이 아닌데 듣고 보면 또 들을 만했다.

그간 황제가 말하는 방식에 너무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그럼 공평하게 저도 침대로 돌아가 눕겠습니다.”

“……아직 안 돼.”

아차 하는 사이 황제가 제 앞으로 불쑥 다가왔다.

피하기에 그는 너무 빨랐다.


“왜 안 됩니까?”

“치료를 하지 않았잖아.”

“……네?”

자신이 손가락을 데였다는 걸 그가 알 리 없었다.

알 리가 없었는데 레스칼이 정확히 다친 손을 들어 데인 곳을 찾았다.


“아프겠는데.”

“어떻게……,”

“그냥 알았어.”

“그냥 알 수 있는 일입니까?”

“덜 자란 새가 알았으니 나도 아는 모양이지. 가끔 감각이 연결되는 때가 있다. 아마도 그대에게 무슨 일이 생길 때일 것이다. 손가락을 다친 것처럼.”

“…….”

라실리아가 할 말을 잃었다.

그가 이럴 때마다 자신이 가짜라는 사실을 잊어버릴 것 같았다.

반려를 지키기 위해 제 심장을 떼어 불사조를 만들어 준 마족과 그 새가 지키는 반려. 반려에게 생기는 상처를 마족과 불사조는 감각을 연결해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피피가 만든 상처를 황제가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조금도 이상하지 않았다.

자신이 가짜라는 점을 제외하면.


“손을 식혀야 해.”

“다 식었습니다.”

라실리아는 아픔을 각오하고 그에게 붙들린 손을 잡아 뽑았다.

아직도 화끈대는 살갗이 레스칼이 낀 황실의 반지에 쓸렸다.

작은 상처였지만 충분히 아팠다.

그래서 자신이 지금 저지르고 있는 짓을 잊지 않았다.


“돌아가세요. 시간이 늦었습니다.”

“늦지 않았을 텐데.”

황제가 다시 손을 붙들며 말했다. 라실리아가 손에 힘을 주었지만, 그에게는 놓아줄 생각이 없는지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델라르타라면. 이제 막 해가 질 시간이지 않나?”

“그게 무슨……,”

어두워서 다행이었다. 밤이 한창 깊어지는 시간이라 정말 다행이었다.

아니라면 얼굴에 핏기가 빠져나가는 걸 들켰을 테니까.

라실리아는 필사적으로 당황을 감추었다.


“왜 갑자기…… 먼 나라의 이야기를 꺼내십니까.”

“그대를 생각하다 얼마 전 그곳에 가고 싶어 했던 게 떠올랐다.”

레스칼이 손을 들어 올려 발갛게 데인 부분을 혀로 쓸었다.


“읏,”

첫 감촉은 차가웠다. 그러다 곧 다시 뜨거워졌다.

이어서 몸이 떨려 왔다.

이게 살갗이 혀에 닿은 반응인지, 아니면 비밀을 들킨 것 같다는 두려움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어깨를 떨며 더 이상 손을 놓으라는 말을 하지 못하는 라실리아에게 레스칼이 말했다.


“원하면 가도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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