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헛소문의 부작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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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헛소문의 부작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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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헛소문의 부작용
2023.02.15.
“네? 소문…… 이라고요?”
이베트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소문이…… 그러니까 소문이 돌고 있긴 한데…… 갑자기 왜…… 어, 어떤 소문을 말씀하시는 건지요…….”
희한하게도, 목소리가 이중으로 들려오고 있었다.
-어떡해. 설마 내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나? 그걸 들으신 거라면 어쩌지.
라실리아의 눈이 놀라움으로 벌어졌다.
“이건 그러니까…….”
“황후 폐하? 왜 그러세요?”
이베트가 걱정을 가득 드리운 채 곁으로 다가왔다.
‘뭐야, 이게…….’
꿈이 깨어나던 순간의 장면이 되살아났다.
-네가 마지막까지 닮지 않길 바라는 건 이거야.
자신을 바라보는 금안에 걱정이 가득 들어찼다. 지금의 이베트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마음을 들여다보게 되는 것.
그게 나쁜 일인지 물었다.
그러자 금안은 따듯하다 못해 슬퍼졌다.
-더는 인간을 믿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애정을 품지도, 연민하지도 않게 될 것이다. 인간의 마음이란 믿지 못할 정도로 혼탁하니까.
그가 말한 일이 방금 일어났다.
“황후 폐하……. 저어, 괜찮으신가요?”
“공녀, 지금…….”
“네, 황후 폐하.”
라실리아가 이베트의 소매를 덥석 붙들었다. 이베트가 잔뜩 놀란 토끼 눈을 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
“네?”
휘둥그레진 눈이 좌우로 흔들렸다.
“어, 그, 그냥…… 황후 폐하께서 좀 놀라신 것 같아 보인다고……,”
“그게 다인가?”
“네, 네.”
“…….”
라실리아가 이베트의 팔을 놓고 고개를 흔들었다.
사방은 좀 전과는 다르게 조용했다. 놀라서 거칠어진 숨소리가 이베트의 입에서 작게 새어나올 뿐이었다.
‘그런 꿈을 꿔서 잠시 착각했던 걸까.’
계속 이베트를 쳐다보았지만 이베트는 통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깜박대기만 할 뿐, 생각이 들려오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래. 그런 모양이야.’
라실리아가 머릿속을 헝클이던 혼란을 닫아걸었다.
어쨌거나 그런 일이 제게 일어날 이유는 없었다. 일어나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삐이?”
피피가 다가와 콕콕 손등을 쪼았다. 아프게 하려는 게 아니라 자신을 봐 달라는 의도였다.
“괜찮아. 방금 깨어나서 정신이 좀 없었을 뿐이야.”
소문 어쩌고 하던 것은 이베트가 실수로 흘린 혼잣말이었을 것이다.
라실리아가 피피를 쓰다듬으며 다시 이베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소문은 궁인들 사이에서 떠도는 건가?”
“헛, 그, 그게…….”
“말을 해 줬으면 하는데. 나에 관한 소문이라면 나도 알아야 하니. 내가 피엘리온 소공작을 잊지 못해 폐하를 거절하는 거라고?”
이베트가 고개를 푹 수그렸다.
“네에, 그게요……. 어제 갑자기 두 분 사이가 안 좋아지셔서…… 그걸 두고 말이 좀 오가는 중이라……. 황제 폐하께서는 누가 봐도 황후 폐하께 반해 있으시니……. 그런데 황후 폐하께서는 아닌 것 같으시고……. 그래서 그런 소문이 나는 것 같습니다.”
라실리아가 대놓고 물으니 이베트도 자신이 실수로 혼잣말을 흘린 것이라 착각하게 되었다.
“송구합니다, 황후 폐하. 제가 제 입을 단속 못 해서……. 잠을 깨운 것도 큰 죄인데 뜬소문으로 심기를 불편하게 해 드리고……. 아아, 정말. 제가 왜 그랬을까요.”
“공녀가 소문을 퍼트리고 다니는 게 아니라면 내가 탓할 수는 없는 일이지. 그리고 잠은 깨어날 때가 되어 깬 거야. 공녀가 마음 쓰지 않아도 된다.”
이베트는 조금 울컥하는 표정이었다.
“매번 그렇게 관대하시니까 제가 자꾸 주제 파악을 잊게 되는 것 같아요. 마냥 다 괜찮은 줄 알고……. 앞으로는 진짜, 진짜 조심하겠습니다.”
“그렇게 자신을 꾸짖을 일은 아닌 것 같은데. 하여간 그런 소문은 곤란하군. 다음부터 그 얘기를 하는 자가 있으면 내 앞에 데려……, ……아니, 됐어. 못 들은 말로 해.”
“아니, 왜요? 헛소문이라면 당연히 바로잡아야지요! 황후 폐하께서는 요새 피엘리온 소공작님을 만나시지도 않는 걸요!”
그러자 뭔가 짚이는 게 있었다.
“혹시 이전에는 자주 만났던가?”
“네? 아, 제가 궁에 들어오기 전 일은 저도 잘…….”
어려워하는 얼굴을 보니 그게 맞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다른 궁인들은 알고 있겠지. 그렇다던가?”
“음, 그게……. 그렇다고는…….”
“알았다.”
라실리아가 아무 일 없는 듯 평온한 게 이베트에게는 영 이상한 모양이었다.
“황후 폐하. 이것도 주제 넘는 일 같습니다만…… 그래도 하나 묻는 걸 허락해 주셨으면 합니다. 잘못된 소문인데 왜 가만히 놔두려 하시나요? 피엘리온 소공작님은 어쨌거나 한 집안 사람인 거잖아요. 무척 언짢으실 것 같은데요……. 그리고 폐하께서도 몹시 슬퍼하실 테고요.”
“만일 사실이라면?”
“네?”
이베트가 머리를 한 대 맞은 것처럼 입을 벌렸다.
“기억을 잃기 전 내가 피엘리온 소공작을 연인으로 삼았고 깊이 연모했다면.”
“그게…… 저는 통 믿을 수가 없습니다, 황후 폐하. 황후 폐하께서는 폐하의 반려이신데 어떻게…….”
“기억을 잃은 뒤로는 폐하를 연모하는 감정을 떠올릴 수가 없어.”
“황후 폐하…….”
“그런 걸 보면 나는 진짜 반려가 아닌 모양이지.”
라실리아가 쓰게 웃었다.
앞에 한 말은 거짓이었지만 뒤에 한 말은 진심이었다.
자신은 진짜가 아니었고, 그래서 일을 바로잡아야 했다.
“소문은 더 이상 신경 쓰지 말도록. 입단속을 한들 그게 진실이었다면 어차피 막지 못할 테니.”
“삐이? 삐!”
피피가 고개를 들고는 표정이 이상하다고 했다.
헛소문이 문제라면 자신이 열심히 떠드는 인간들을 찾아다니면서 벌을 주겠다고 했다.
라실리아가 웃으면서 피피를 안아 들었다.
“호르세드 경처럼 얼굴을 다 쪼아 놓으려고? 아니, 그러면 안 돼.”
“삐?”
“안 된다면 안 되는 거야. 얼굴이 쪼이면 사람들은 더 화를 낼 걸.”
“피이이. 피이.”
“머리털을 뽑아도 마찬가지야. 너는 너무 귀여우니까 너한테는 화를 내지 못하고 대신 나한테 화를 내겠지. 소문을 덮으려고 저 작은 새를 무자비하게 부려먹는 황후라고.”
“삐잇! 삐!”
“그러니까 괜찮아.”
“……삐이?”
피피는 라실리아가 혹시 정말로 피엘리온 소공작이라는 인간을 마음에 품었는지 물었다.
“글쎄.”
“삐!”
피피가 화를 냈다.
어떻게 다른 인간을 좋아할 수 있느냐고 했다.
“나도 몰라. 그런데 좋아하는 건 마음대로 안 되는 거잖아.”
“삐! 피!”
피피가 푸다다닥 날아서 방 안을 홱홱 맴돌았다. 그래도 성이 안 풀리는지 창밖으로 휙 날아가 버렸다.
“앗, 렌 님이…….”
이베트가 안타까운 얼굴로 피피가 사라진 창밖을 살폈다. 피피는 그새 나는 속도가 더 빨라졌는지 벌써 보이지도 않았다.
이베트가 속상하다는 듯이 작게 중얼거렸다.
“……화가 나셨네요.”
“응.”
“그럼 안 되지…… 않나요?”
“좋아하는 것처럼, 화를 내는 것도 마음대로 안 되는 일이겠지.”
“그야 그렇지만…….”
이베트가 입을 다물었다.
그 뒤로 꽤나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황제도 피피처럼 화를 내겠지. 둘은 똑같으니까.’
그래서 표식이 사라진 황후를, 다른 이를 못 잊겠다고 하는 황후를 기꺼이 폐위하기를.
그리고 잊기를.
진짜를 찾기를.
부디.
그렇게 오후가 지나갔다.
* * *
……쾅!
알현실의 문이 부서질 듯 열렸다.
“끌어내.”
누군가의 목덜미를 쥐고 문까지 끌고 온 레스칼이 그를 팽개치며 한 말이었다.
당연한 말이었지만 황제의 알현실에 드나드는 인간은 백이면 구십구 정도가 귀족이었고, 당연히 이런 대접은 어디서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폐하! 이 몸은 선황의,”
쾅!
그러나 제대로 된 항의가 시작되기도 전에 레스칼은 문을 닫아 버렸다.
“쯧쯧……. 앞서 쫓겨난 인간들을 못 봤나. 왜 굳이.”
리얀이 혀를 찼다.
방금 알현실에서 쫓겨난 귀족, 라시트 백작이 홱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는 선황의 일곱째 아우의 친우였다. 따라서 자신을 황제의 삼촌 그 비슷한 어느 위치라고 생각하는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라시트 백작은 황제에게 시기적절한 현명한 조언을 하는 게 자신의 역할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특히나 수도에 황제의 부부 관계에 대한 불미스러운 소문이 파다하게 번지는 지금이라면 자신의 조언이 반드시 필요할 터였다.
그런 충심으로 달려왔더니, 황제는 소문이라는 말을 입에 담자마자 제 목덜미를 잡아 알현실 밖으로 팽개쳤다.
라시트 백작이 파르르 주먹을 떨다 리얀을 홱 노려보았다.
“방금 뭐라 했느냐!”
리얀은 태평하게 백작의 시선을 받았다.
“함부로 일어나지 마십시오. 내던져진 자세로 보아 꼬리뼈의 충격이 예상됩니다.”
“헛, 그래? ……아니, 방금 뭐라고 했냐니까!”
“공에 앞서 알현실을 찾은…… 음, 체면 보호를 위해 모 귀족이라 하지요. 아무튼 모 귀족께서는 엉덩이뼈에 금이 갔다고 합니다. 제 발로 일어나지 못해서 근위대가 들것에 실어 옮겼습니다.”
“뭐…… 뭐라고?”
물론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리얀이 하도 천연덕스러워 라시트 백작은 그대로 속아 넘어갔다.
“그 헛소문으로 폐하의 심기가 무척 불편하신데 거기에 대고 황후 폐하의 험담을 하려고 들었답니다. 눈치가 없어도 그렇게 없을 수가. 엉덩이뼈에 고작 금이 간 게 천만다행입니다. 폐하께서 그나마 체면은 봐주셨다는 말이니까요.”
“어, 어……?”
“공께서도 아시겠지만 황후 폐하는 그 반려시잖습니까. 반려를 두고 한 집안 사람을 연인이니 뭐니 지껄이는 자가 과연 제정신일까요?”
“어, 음…….”
“그리고 폐하께서 제정신이 아닌 자를 상대할 이유는 없으시지요. 가뜩이나 정무가 차고 넘치는데요.”
“으음…….”
리얀이 먼지를 털어 주는 척, 백작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참, 폐하의 수호기사로서 저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이 헛소문을 어디서부터 바로잡아야 될지. 이러다가 알현실을 찾는 수도의 귀족들은 전부 엉덩이뼈가 부러지게 생겼으니 말입니다……. 쯧쯧.”
“…….”
마침내 백작은 그 소문에 대한 황제의 입장을 알아들었다.
뼈가 부러지기 싫으면 입 닫고 가만히 있으라는 말이었다.
“아, 이제 좀 충격이 사라지셨나요? 일으켜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래다오.”
결국 백작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호리호리해 보이는 근위대 기사는 힘이 좋은 모양이었다. 제 몸을 가볍게 잡아당겨 번쩍 일으켰다. 미리 말을 들은 탓인지 멀쩡한 엉덩이뼈가 괜히 시리고 그러는 것 같았다.
라시트 백작이 떠나간 뒤 알현실은 그나마 좀 한가해졌다.
백작이 열심히 말을 퍼트리고 다닌 게 확실했다.
이제는 황제의 얼굴에 대고 부정한 황후는 황후의 자격이 없으며, 이번 재판에서 신전의 편을 들어 황후의 표식이 정말 남아 있나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고 지껄여 대는 정신 나간 귀족들은 찾아오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레스칼의 상태가 나아진 것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