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오해와 벽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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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오해와 벽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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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오해와 벽시계
2023.02.12.
“그렇다면 부탁은 없는 걸로 하겠습니다.”
“……재판을 받겠다고?”
레스칼의 표정에 금이 가는 것 같았다.
별로 틀린 표현도 아니었다. 레스칼은 진심으로 충격을 받았다.
“나와 입을 맞추는 게 싫어서……?”
“아니요. 그래서가 아닙니다.”
라실리아가 깍지 낀 손가락을 풀어냈다. 그가 놓아주려 하지 않아 제법 길게 실랑이를 벌여야 했다.
“황실에서 고발한 쪽을 압박해 재판을 무마시킨다면 명예롭다 할 수 없으니까요.”
“……그대는 기억을 잃었다면서 황실의 명예를 위해 명예롭게 시작되지 않은 재판을 감수할 생각인가?”
자신이 황제라도 그 어설픈 변명을 믿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식이라면 표식에 대한 의혹은 계속 끊이지 않을 겁니다.”
“상관없는 일이다. 지금은 주술의 존재조차 부정하는 자들이 더 많아. 오래전 일인데다 블루문이 뜰 때마다 변이하는 황제가 매번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대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제가 황후가 된 것은 표식을 지니고 태어났기 때문이 아닙니까?”
“말했듯이 표식은 표식일 뿐이다.”
“다른 사람들은 눈으로만 반려를 구분할 수 있을 테니까요. 사람을 열일곱 명이나 죽인 자를 황후로 계속 둬야 한다면 확실한 증거가 필요할 겁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대가 열일곱 명을 죽였다는 증거는 없어.”
“그렇다면 재판에서 밝혀지겠지요.”
“…….”
“황실의 명예뿐 아니라 제 명예를 위해서라도 재판은 필요합니다. 그러니 재판도, 그에 따를 결과도 받아들이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니 자신이 엄청나게 고결한 인물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사실은 그저 달아나려는 것뿐이지만.’
레스칼이 미미하게 미간을 구긴 채 이마를 쓸었다.
“무의미한 짓이다. 신전이 하고자 하는 건 시빗거리야. 그대가 생각하는 것처럼 고상한 이유로 죄를 쫓는 게 아니라.”
“하지만 그래도 적법한 절차를 밟지 않았습니까. 황실이 그보다 못할 수는 없습니다, 폐하.”
“이해할 수가 없군. 왜 복잡한 일을 자초하는지.”
그래야 달아날 수 있을 테니까.
내가 당신을 사랑하게 되기 전에. 당신이 나를 죽이기 전에.
“그렇다면 입맞춤이 싫어서라고 생각하십시오. 저는 폐하와 입을 맞추길 바라지 않습니다.”
순간 레스칼이 얼어붙기라도 한 줄 알았다.
“……왜?”
굳은 채 한참 라실리아를 바라보던 레스칼이 억지로 입술을 떼어 물었다.
“기억을 잃었으니까요. 그 기억에는 폐하에게 품은 애정도 포함되어 있나 봅니다. 도무지 폐하에게서 느껴지는 거리감을 줄일 수가 없습니다.”
“…….”
이제 레스칼은 얼어붙은 채 숨도 쉬지 않는 무언가가 되었다.
이상하게도 그를 보는 마음이 지끈거렸다.
‘안 돼. 이런 감정은.’
감정은 위험했다. 시작하기 전에 잘라 내는 게 맞았다.
라실리아는 애써 냉정하게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는 눈을 제외하고도 반려를 알아보실 수 있다고 하셨지만 저는 아닌가 봅니다. 제가 왜 반려가 될 수 있는지 조금도 모르겠습니다.”
“…….”
눈가가 일그러지는 게 보였다.
차라리 블루문이 뜨는 날이었으면 싶었다. 그렇다면 그가 아프다는 핑계로 저 눈가를 만져 주는 일쯤은 용납할 수 있을 테니까.
“폐하의 반려로 돌아오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맹세는 지키지 못할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
아무 말 하지 못하는 레스칼을 두고, 라실리아가 몸을 일으켰다.
“얘기가 끝났으니 이만 가 보겠습니다.”
“……잠,”
레스칼이 손을 뻗었으나 이미 늦은 일이었다.
라실리아는 응접실을 나서고 있었다.
* * *
“뭐? 그게 말이 돼?”
“아니, 안 되지.”
“……정말 이상합니다.”
라실리아가 레스칼에게 입맞춤이 싫으니 대신 재판을 받겠다는 폭탄선언을 한 뒤로, 황궁은 거대한 무덤이 된 것 같았다.
몹시 조용했다.
레스칼은 그 뒤로 입을 다물었고 라실리아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두 사람의 눈치를 보느라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그 와중에 속이 타들어 가는 그림자 기사 셋이 황제궁과 황후궁의 중간 지점에서 만났다. 다들 맡은 바 임무가 있는 몸들이었지만 지금은 알 바가 아니었다.
레스칼은 리얀이 대놓고 볼 일 좀 보고 오겠다는데도 무슨 일이냐고 한마디 묻지 않았다.
“폐하께서는 그 뒤로 완전……. 아, 그래. 서궁 끝방의 시계가 되신 것 같아. 안에 장치가 뭐 어떻게 고장이 나서 멎어 버린 그 벽시계 있잖아.”
“황후 폐하는 그림이 되신 것 같아. 창가에 앉아서 한마디도 안 하셔.”
둘 다 별다를 게 없다는 말이었다.
리얀이 울컥 성질을 냈다.
“아니, 폐하는 그렇다 치고 황후 폐하께서는 또 왜? 당신 뜻대로 됐으니 축배라도 드셔야 되지 않아?”
“난들.”
머리를 맞대 봤자 황후가 무슨 생각인지 알아낼 뾰족한 수가 튀어나오는 건 아니었다.
“달리 생각이 있으신 게 아닐까요.”
데칸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음? 누가?”
“황후 폐하께서 말입니다.”
“무슨 생각?”
“재판이 시작되면 증거가 나오기 마련이니까요. 저들이 노렸던 것은 처음부터 궁인들의 목숨이 아닌, 표식이었습니다.”
리얀이 눈을 좌우로 굴렸다.
“음……. 그래. 비록 황실 재단사를 그 꼴로 만든 걸 함께 엮을 증거는 없었지만 뱀대가리들 짓이라는 건 확실하지.”
“그러니 재판을 통해 놈들을 끌어내려고 하신 게 아니었을까요?”
“아?”
리얀이 순간 눈을 반짝댔고, 곧이어 세르벤이 한숨을 내쉬었다.
“요컨대 두 분이 지금 삽질하는 근위대가 영 못미더우신 나머지 황후 폐하께서 스스로 미끼가 되어 뱀대가리들을 잡아내려고 나서신 거라는 말이지? 틀렸어.”
“가능성이 있는 얘깁니다. 황후 폐하께서는 영리하신 분이고 상황 판단도 빠르십니다. 재판이 열린들 결과가 치명적이지 않다는 것도 알고 계실 테고요.”
리얀이 끼어들었다.
“맞아. 게다가 황후 폐하는 진짜잖아. 표식이 조금 안 보인다고 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단 말이야. 신관 놈들이 죽을 자리 못 찾고 덤벼대는 꼬라지가 짜증나는 거지, 재판은 별게 아니잖아.”
세르벤이 쯧쯧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다 좋아. 그런데 두 분이 일부러 그러시는 거라면 폐하께서 지금 벽시계가 되셨겠어?”
“아…….”
“그건…… 그렇군요.”
그림자 기사들이 기운 빠진 표정으로 어깨를 늘어트렸다.
“그럼…… 정말 생각하기도 싫지만, 황후 폐하께서는 진짜 반려임에도 폐하가 싫으신 걸까?”
이렇게 말한 리얀이 제 앞머리를 한 움큼 거세게 잡아당겼다.
“빌어먹을. 나는 틀림없이 황후 폐하께서도 마음이 움직이는 중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 그게 맞지. 너도 봤잖아, 세르벤. 블루문의 첫 번째 날 말이야.”
“음……. 봤지.”
황후는 변이한 황제를 밤새도록 안아 주었다. 피로 젖은 얼굴을 꼼꼼히 닦아 주기까지 했다.
“반려가 아니라면 못 할 일이잖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럼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한 건가……?”
세르벤이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생각을 너무 하다 보니 두통이 생길 것 같았다.
“사 년이라는 시간은 이전 연인을 잊기엔 아직 이른…… 뭐 그런 걸지도.”
“피엘리온 소공작 말이야? ……젠장. 그런 인물을 폐하와 비교해야 하다니. 얼핏 보면 그럴싸해 보여도 하나하나 뜯어보면 폐하의 발끝에도 못 미친다고.”
“고상하신 황후 폐하께서는 외모 대신 내면의 아름다움을 따지실 수도 있지.”
“피엘리온 소공작의 내면을 네가 본 적이나 있어? 그게 아름다울 거라고 확신해?”
“그건 아니지만……. 그럼 리얀 너는 폐하의 내면이 소공작의 내면보다 아름다울 거라고 확신할 수 있어?”
“어, 음……. ……그건 없던 얘기로 하자.”
“동감.”
두 사람의 대화에 한숨을 삼킨 데칸이 현실적인 문제를 꺼내 들었다.
“그렇다면 이대로 재판이 진행되는 걸 두고 봐야 하는 겁니까? 아직 성 말리크 기사단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신전에서 무슨 목적으로 일을 벌이는지도 말입니다.”
“으아, 맞아. 그랬지.”
“지금은 눈을 가린 상황이나 다름없습니다. 아무리 황후 폐하께 무리가 가지 않는 재판이라 하더라도, 저쪽의 의도를 정확히 모르는 이상 예기치 못한 변수는 얼마든지 생길 수 있습니다.”
“그 말도 맞아.”
그림자 기사들이 진지해졌다.
“방패 쪽은 여전히 움직이고 있는 거 맞지? 혹시 네가 강등됐다고 말 안 듣고 그러는 거 아냐?”
“그런 일은 없습니다.”
“그래, 뭐. 거기가 그럴 일은 없겠다만. 일단 지금 믿을 건 방패밖에 없어. 너희가 얼마나 알아내느냐가 관건이야.”
“어깨가 무겁군요.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다들 돌아갈까. 자리를 오래 비울 수는 없으니.”
그러자 리얀이 세르벤의 옷자락을 붙들고 울상을 지었다.
“세르벤. 오늘 하루만 나하고 바꾸자. 나는 도무지 폐하를 지켜볼 자신이 없어.”
“황후 폐하는 다를 것 같아?”
“아니, 그래도 그쪽은 분위기가 좀 낫겠지. 상냥한 시녀도 있고 성질 화끈한 불사조님도 계시잖아.”
“어차피 나는 강등돼서 곁에는 못 있어. 복도에 발만 걸치고 있다고.”
“쳇.”
리얀이 혀를 차며 억지로 엉덩이를 들어 올렸다.
“하아…… 가기 싫다. 고장난 폐하는 보고 싶지 않다. 싫다, 정말.”
“어리광 피워도 못 받아 줘. 어서 가.”
“하아. 싫다.”
리얀이 느릿느릿, 황제궁을 향해 걸어갔다.
나머지 둘도 썩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각자의 자리를 향해 돌아섰다.
* * *
창밖으로 노을을 바라보던 사이에 선잠이 들었다.
선잠이 꿈을 데려왔다.
-그렇게 단순하진 않을 것이다.
손바닥에는 비늘이 없었다. 그의 몸에서 유일하게 마음껏 맞닿아도 상처 입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부분이었다.
제 손바닥을 마주 대고 웃었다.
-내 피를 종속하는 일이다. 인간의 육신에 예기치 않은 결과를 불러올 수도 있어.
이름 모를 마족의 금안은 그때와 똑같았다.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것을 바라보듯 애틋하고 간절했다.
-네가 아플지도 몰라. 어쩌면 나와 비슷해질 수도 있겠고.
그래도 괜찮아.
마주 댄 손바닥을 움직였다. 살갗이 마찰하며 간지러운 동시에 따듯해졌다.
나는 이렇게, 당신을 전부 쓸어 보고 싶어.
-……너는 내게 있는 줄도 몰랐던 감각을 알려 준다.
그럼 좋은 게 아닐까.
-아니, 곤란해. 지금 같은 건.
검은 비늘은 표정을 전부 감추었다. 그래서 그가 온전히 인간이 됐을 때 지을 표정을 상상하게 만들었다.
어쩐지 곤란하다는 말을 하며 귓불이 살짝 붉어지지 않을까 싶었다.
-인간이 되고 싶지만 그 대가로 네가 아파지는 건 원치 않아.
구체적으로 말해 줬으면 싶었다. 어떻게, 어느 정도로 아파질 수 있는지. 참을 수 있을 정도인지.
-나도 정확히는 모르겠다. 하지만 단 한 가지, 네가 닮지 않았으면 하는 게 있다.
그게 뭔데.
-그건 너를 몹시 아프게 만들 것이다.
저를 보는 눈이 아파 보여서 진심이라는 걸 알았다.
그러니까 그게 뭐냐고.
-그건……,
거기까지 했을 때 피피의 목소리가 설핏 잠을 깨웠다.
“삐!”
“앗, 쉿. 쉿.”
이베트가 손가락을 입에 대고 아주 작은 소리를 내자 피피도 입을 다물었다.
조심조심 제 몸에 담요를 둘러 주는 게 느껴졌다. 일어났다고 알리고 싶었지만 몸이 너무 무거웠다. 그냥 이대로 더 자도 될 것 같았다.
그런데 이런 말이 들려왔다.
-하아, 난 정말 모르겠어. 황후 폐하는 정말로 그렇게 폐하와 입을 맞추기 싫으셨던 걸까? 그렇다고 재판을 받으시겠다니, 그건 너무 말이 안 되는 일이잖아. ……정말로 소문처럼 피엘리온 소공작을 못 잊으셔서 그러시는 걸까?
그런 말에는 더 이상 눈을 감고 있을 수가 없었다.
“공녀.”
라실리아가 눈을 뜨고 이베트를 불렀다.
“어마, 황후 폐하. 깨셨나요?”
“그런 소문을 떠들고 다니는 게 누구지? 황궁에서 들은 얘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