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고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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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고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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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고발 (2)
2023.02.08.
놀라서 거듭 눈을 부릅 치켜뜨는 공작과는 달리 라실리아는 침착했다.
“저는 그 벌이 폐위로 그치기를 바랍니다. 목이 잘리는 일은 피하고 싶군요.”
“그게……. ……아니, 그럴 일은 없다. 그럴 일은 없어! 네 이름은 피엘리온이다! 황제가 아닌 그 누구라도 네 목을 자를 수는 없어!”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내가 유죄를 인정하는 조건으로 법관 측과 미리 판결을 확정지을 수 있겠습니까?”
“그야 할 수는 있지만……. ……아니, 안 돼.”
공작이 라실리아의 어깨를 울컥 쥐었다.
“카르티, 내 어여쁜 딸아. 폐위는 안 될 말이다.”
어깨살을 파고드는 손가락이 통증을 남겼다.
공작은 그렇게나 절박했다.
“그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공.”
“아니, 있을 것이다. 재판을 미뤄 보마. 그사이 뭔가 방법이 나올 게야. 신전을 하나 새로 지어 줘서라도 일을 무마할 방법을 찾으마. 폐위는 안 돼.”
“……폐하의 눈을 계속 속이지는 못할 겁니다.”
“어째서!”
피엘리온 공작의 음성이 격해졌다.
“주술은 틀림없었다. 주술사가 몇 번이나 확인했어! 주문이 잘못되었으면 반동이 있었겠지. 하지만 주술사도 너도 무사하다. 표식은 다시 돌아올 게야. ……가만, 표식을 확인하긴 한 게냐?”
“확인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표식이 되살아날 일은 없으니까. 나는 진짜가 아니니까.
“그게 무슨 말이냐?”
“신전 측에서 파샤드 후작 부인을 증인으로 내세웠습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아시겠지요. 후작 부인은 내 옷을 갈아입히던 사람이었습니다.”
“아, 하……. 그럴 수가.”
절망한 공작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라실리아가 그 앞에 조용히 앉았다.
“폐위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공. 대신 피엘리온의 이름을 지킬 수는 있을 겁니다. 나 하나만 이 자리에서 물러나면 됩니다.”
“그게…… 그렇게 되겠느냐? 카르티, 너는 황후가 되기 위해 살아왔잖느냐. 이제 와 정말로 포기할 수 있겠느냐?”
이 순간 카르타헤나 황후가 안쓰러웠다. 진심이었다.
황후가 정말로 황제의 반려였다면 좋았을 것이다. 표식이 사라지지 않았다면 그들은 최초의 마족과 반려처럼 서로를 끔찍이도 위하는 한 쌍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열일곱이나 되는 궁인이 억울하게 목숨을 잃지도 않았을 것이다.
유감이었다. 진심으로.
“해야겠지요. 그게 가문이 전부 반역자 신세가 되어 목이 잘리는 일보다 낫지 않습니까?”
“나는……. ……그래, 그렇다면…… 대법관을 만나 보겠다.”
“서두르셔야 할 겁니다.”
“그래…….”
공작은 넋이 나간 얼굴로 일어섰다. 나이가 들어도 수려하던 얼굴이 오늘 하루 만에 오 년쯤 더 늙은 것처럼 보였다.
* * *
“또 여기 있었군.”
말단 기사로 강등이 되긴 했지만 세르벤은 여전히 황후의 호위를 맡고 있었다.
세르벤의 이목을 피해 공작을 북쪽 탑으로 불렀지만, 이미 노출이 된 장소라 금방 들키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래도 공작은 돌려보낸 뒤에 들켜서 다행이었다.
세르벤이 아닌 황제가 직접 등장한 게 의외라면 의외였지만.
“좋아하는 장소니까요.”
라실리아가 레스칼의 시선을 차분히 받아넘겼다.
혹시나 했지만 오늘 황제에게는 변이의 흔적이 없었다.
블루문의 영향은 이제 완전히 사라진 모양이었다.
“이곳을?”
“네. 외출하는 기분이 들어서요. 이곳은 슈라이든 공의 영지잖습니까.”
“……그대가 그렇다면.”
잠깐 이마를 찡그리던 레스칼이 이렇게 물었다.
“다른 영지에 가고 싶나?”
“글쎄요……. 기억나는 곳이 없어서요.”
“지금 가도 된다. 원한다면.”
황궁을 나갈 수 있다는 말에 조금 설레기는 했다. 그러나 라실리아는 마음을 다잡았다.
‘황제와 내내 붙어 있게 되겠지. 그건 좋은 일이 아니야.’
대답을 피해 화제를 돌렸다.
“여기는 어떻게 오셨습니까?”
“그대를 찾아서.”
“여기 있는 줄은 어떻게 아시고요?”
“냄새가 나니까.”
“……네?”
“이제는 익숙해져서 더 잘 찾을 수 있어.”
“…….”
그 말은 황제가 보통 인간과는 다르다는 것과, 그래서 그가 반려에게 품은 감정도 자신이 이해하는 것과는 다르리라는 점을 다시 깨닫게 했다.
“제게는 늘 감시의 눈이 붙어 있는 것과 비슷하겠군요. 그러나 그걸 물은 게 아니었습니다. 제게 하실 말씀이 있어 오신 게 아닙니까?”
“맞아.”
레스칼이 주변을 훑었다. 분명 시선이 다른 곳을 향하는데도 그가 계속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그런데 여기 말고 다른 곳이 좋을 것 같아. 여긴 의자가 없다.”
“긴 얘기입니까?”
사실 물어볼 것도 없었다. 고발장이 도착했으니 황제가 거기 적힌 내용을 확인하려고 드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라실리아가 새삼 레스칼의 표정을 살폈다.
별 다른 동요는 없어 보였다.
‘그게 가능한가.’
잘은 몰라도 정신없이 달려와 그게 사실이냐며 따져 물어야 하는 게 아닐까.
“별로.”
그러나 레스칼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의자에 앉아서 할 정도라면서요.”
“아, 그건 내가 그대 옆에 앉아야 하니까. 서서 옆에 있는 건 좀 이상하잖아.”
“…….”
희한한 일이었다.
표식과는 별개로 황제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게.
“그렇다면.”
라실리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레스칼이 기다렸다는 듯 팔을 내밀었다.
그 위에 손을 얹자 황제가 황후를 에스코트할 때의 모범 예시로 예법서에 실릴 만한 그림 같은 동작이 만들어졌다.
* * *
“고발장을 어떻게 하고 싶나?”
역시나 그 얘기였다.
미리 대비를 해 둔 게 다행이었다. 아니라면 당황을 숨길 수 없었을 것이다.
“고발장이라니요?”
라실리아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되묻자 옆자리에 앉은 레스칼이 눈썹을 치켜들었다.
“덜 자란 새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나?”
“네. 듣지 못했습니다.”
라실리아는 일단 피피의 말을 알아듣는다는 사실을 비밀로 하고 있었다. 그런데 피피가 고발장 같은 복잡한 얘기를 해 줬다고 하면 당연히 말이 되지 않을 것이다.
“어처구니가 없군. 분명 제가 전하겠다고 부리나케 날아갔는데.”
“…….”
본의 아니게 피피를 거짓말쟁이로 만든 셈이 되었다.
‘미안, 피피. 나중에 사과할게.’
라실리아가 이 거리에서 마주하기에는 너무 부담스러운 황제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살짝 돌렸다.
“어떤 고발입니까?”
“……그대가 열일곱 명의 궁인을 죽였다는 고발이다.”
살짝 가늘어지는 금안은 제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표현 같았다.
그렇다고 말을 바꿀 수는 없었다.
“뭐라 드릴 말이 없군요. 기억이 나지 않아 유감입니다.”
치맛자락을 움켜 쥔 라실리아가 죽은 이들을 위해 눈을 감고 짧게 안식의 기도를 했다.
“그럴 필요 없다.”
레스칼이 라실리아의 손등에 제 손을 포개며 말했다. 모르고 있었지만 힘이 너무 들어갔던 모양이었다.
“지나간 일로 괴로워할 필요는 없어.”
위로인 걸까.
그 사람들을 죽인 이유가 그에게 거짓말을 하기 위해서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위로하는 걸까.
“……쉽지 않은 일입니다. 제가 죽였다고 하니.”
“정확한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증거가 있으니 고발을 한 게 아닙니까.”
라실리아가 쓴 얼굴로 입술을 물고 있자 레스칼이 포개진 손을 끌어당겼다.
“그대는 내가 어떻게 하길 바라나?”
“……. 무얼 말입니까?”
레스칼이 제 손을 뒤집어 손가락 사이에 손가락을 걸었다. 겹쳐진 손가락 사이로 오늘따라 현란한 금안이 반짝였다.
“재판을 원하지는 않을 것 같아서.”
“제가 원하지 않는다고 피할 수 있는 일인가요? 게다가 폐하께서도 고발장의 내용이 사실인지 궁금하실 텐데요.”
“…….”
잠시 라실리아를 바라보던 레스칼이 고개를 숙여 시선을 아주 가깝게 만들었다.
피할 수가 없었다. 이 거리에서 피한다면 너무 표시가 날 것이다.
“궁금해.”
……그렇겠지.
“그러니 그대가 말해 주지 않겠나?”
시선만이 아니라 모든 게 가까이 있었다.
너무 짧아진 거리는 감각을 왜곡시켰다. 제 잘못을 추궁하는 음성은 이 거리에서 나지막한 속삭임으로 들려왔다.
“저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자들을 왜 죽였는지.”
“내 반려라는 표식이 그대의 몸에 있다. 그게 사라져 간다고 했어. 그 사실을 감추기 위해 몸을 본 궁인들을 죽였다던데.”
“그렇……군요. 애석하게도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 뒤로는 표식을 확인한 적이 없나?”
“제 눈으로는 보지 못한다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목욕 시중을 드는 시녀나 궁인들도 본 적이 없고.”
“……네. 기억을 잃은 뒤로는 타인의 손길이 낯설어져서.”
뜻밖에도 레스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좋아.”
“네?”
라실리아는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사이 레스칼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재판이 싫으면 싫다고 해. 그대가 싫다면 재판은 없을 것이다.”
이 말도 이해할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어째서. 표식이 사라졌다는 건 반려가 아닐 수도 있다는 얘긴데.
왜 황제는 그걸 신경도 쓰지 않는 것처럼 보일까.
“만일 고발장이 사실이라면요?”
라실리아가 무의식중에 붙들리지 않은 손으로 레스칼의 소매를 잡았다. 레스칼의 눈길이 빠르게 당겨지는 소매에 닿았다.
“그래도 재판은 없다고 하실 겁니까? 어떻게 그럴 수 있는데요? 반려는 표식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대가 이러는 건 왠지 좋아.”
레스칼이 라실리아에게 붙들린 손을 움직였다. 다음 순간 어째서인지 그들은 양손을 마주 잡은 자세가 되었다.
“먼저 나를 잡을 때. 그때는 나만 보는 것 같아서.”
“그런 말을 왜 지금……. ……아니, 대답을 해 주세요. 폐하께서는 고발장을 믿지 않으시는 겁니까?”
레스칼이 피식, 작게 웃었다.
“그래.”
“어째서……?”
“그대가 나의 반려라는 걸 내가 알고 있으니까. 표식이 어떻게 됐건 상관없는 일이다.”
“표식은…… 반려라는 것을 알아보기 위해서 존재할 텐데요.”
“눈이 알아보기 위해 존재하겠지.”
눈을 제외한 다른 것으로도 알아볼 수 있다는 말이었다.
북쪽 탑에 간 라실리아를 냄새로 찾은 것처럼.
“…….”
생각이 복잡해졌다.
황후가 표식을 잃은 것과 황후가 반려라는 사실은 상관이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혼란이 찾아왔다.
‘어쨌거나 반려로 태어난 건 황후였다는 건가……. 황제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폐위가 쉽지는 않을지도 모르겠어.’
레스칼이 라실리아의 손을 부드럽게 끌어당겼다.
“그대도 대답을. 어떻게 하고 싶나?”
“재판이 없을 거라면…… 어떤 방법이 있다는 말입니까?”
“대신관과 얘기를 해 봐야겠지.”
“얘기만으로 되는 거라면 고발장을 쓸 이유도 없지 않았을까요?”
“그렇게 만들어야지.”
모르겠다. 황제에게는 다른 방법이 있다는 건지.
“……그것도 제 부탁으로 여기실 겁니까?”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황제는 자신을 위해서 재판을 없는 일로 만들어 주겠다는 게 아니었다.
“그러길 바란다.”
“그 대가로 뭘 요구하실 겁니까?”
“…….”
대답 대신 잠시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라실리아는 레스칼의 금안이 제 얼굴 어딘가에 못 박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입술.”
“…….”
“입을 맞추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