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고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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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고발 (1)
2023.02.05.
“삐!”
피피가 한쪽 발을 쾅쾅 굴렀다.
“음?”
“삐이!”
자신이 할 수 있다고 했다.
“피엘리온 공작을 데려오겠다는 말이야?”
“삐!”
작은 머리가 위아래로 힘차게 들썩였다. 라실리아가 비장한 눈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일을 하기에 너는 너무……. 그래, 불사조잖아.”
“삐!”
불사조인 것은 상관없다고 했다. 라실리아가 원하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자신이 불사조라는 것을 계속 그렇게 잘 기억하고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벌써 생색내는 법을 배웠네.”
라실리아가 자그마한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삐이.”
“음, 그래. 하지만 나는 내 일에 너를 너무 부려먹고 싶진 않아. 사람을 부르는 일이라면 너 말고도 방법이 있으니까. 그리고 공작은 네 말을 알아듣지 못할 거라 편지를 써야 할 텐데 네가 물고 가기엔 너무 커.”
“삐이?”
“음? 까마귀를 시키면 된다고?”
“삐!”
“아……. 그렇겠구나. 편지를 써서 전하면 까마귀가 사람보다 빠르겠네.”
라실리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베트가 나섰다.
“제가 종이와 펜을 가져올게요.”
“그렇……. 아니, 비서관을 불러와. 그게 좋겠어.”
“네, 황후 폐하.”
공작이라면 황후의 글씨체를 알아볼 수도 있었다. 그러니 비서관을 시키는 게 안전했다.
“서둘러.”
“네……? 아, 네. 물론입니다, 황후 폐하.”
라실리아가 차분해 보였던 것은 겉모습뿐이었다. 서두르라는 말에 이베트는 황후가 사실 초조해한다는 것을 짐작하고 걸음을 서둘렀다.
* * *
하지만 피엘리온 공작은 공작저에 없었다.
라실리아가 편지를 쓸 무렵 이미 입궁한 공작은 레스칼을 마주하는 중이었다.
“이건 모욕입니다.”
공작은 회색 눈썹을 일자로 치켜 뜬 채 황제를 응시했다.
“당연히 폐하께서도 아시겠지만.”
“흠.”
황제는 금안이 약간 얇아지는 듯했지만 그 이상은 말을 섞지 않았다.
언제 봐도 인간이 아닌 것 같은 이질감이었다.
저 눈도 그랬지만 무표정이 더 이질적이었다. 감정이 적고 표현이 부족한 사람이야 얼마든지 있었지만 황제의 저 얼굴과는 달랐다.
기록된 바에 의하면 마족은 인간과는 다른 눈을 가졌다고 했다.
밝은 빛 뒤에 숨은 어둠을 보고, 어둠 속에 누워 꿈틀대는 것을 본다고 했다.
그래서 공작은 두려웠다.
혹시 황제는 진작 표식이 지워진 걸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제 스스로 반려를 쳐 내는 짓을 하지 않기 위해 신전이나 파샤드 후작 같은 것들이 알아서 움직이도록 가만히 내버려 두고 있는 게 아닐까.
‘……아니, 그럴 리 없다. 그랬다면 진작 폐위를 거론했을 거야. 시간이 늦기 전에 새 반려를 찾아야 했을 테니.’
새 반려 같은 건 없을 것이다.
제국의 황후는 카르타헤나였고, 앞으로도 그래야 했다.
그러기 위해 트리니다드의 주술사 같은 음지의 인간까지 불러들였다.
“터무니없는 고발입니다. 표식은 이미 혼인식 전 폐하께서 두 눈으로 확인하지 않으셨습니까? 저들은 표식을 운운하며 피엘리온 가문뿐 아니라 황실까지도 모욕하고 있는 것입니다.”
황제는 딱히 이렇다 할 말이 없었다.
공연히 초조해진 공작이 결국 먼저 속내를 꺼내 들었다.
“신전의 입을 막으십시오. 폐하 앞에서 스스로 무릎을 꿇고 고발장을 제 손으로 찢도록 명하십시오. 그게 황제가 지녀 마땅할 태도일 줄 압니다.”
“……공은 알고 있었나?”
말이 없던 황제가 느리게 시선을 치켜뜨며 물었다.
피엘리온 공작은 순간 뒷걸음질이 치고 싶은 것을 참았다.
“무얼 말입니까? 저들의 주장은 온전히 고발장을 통해 알았습니다.”
공작은 집에서 미리 연습을 했던 대로 시치미를 뗐다.
사실 그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자신은 표식이 사라져 간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상태여야 했다.
그걸 알고 있었고, 그럼에도 혼인식을 진행했으며, 주술사를 불러 무마하고자 했다는 사실이 발각되면 반역이었다. 천것들처럼 재판도 받지 못할 것이다.
만에 하나 다 지워져 가는 표식이 공개되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은 끝내 그 사실을 모르는 상태로 남아야 했다. 그럼 죄인은 딸자식 하나로 그칠 것이다.
“소공작을 트리니다드로 보낸 사실도 없고?”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폐하. 제 양자가 트리니다드 같은 곳에 갔다니요? 피엘리온의 사람이 무슨 연유로 그런 음지에 발을 들인단 말입니까?”
“그게 공의 입장이로군.”
저 금안이 불길했다.
황제는 벌써 테르나덴이 트리니다드에 다녀온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 외에 더 무엇을 알고 있을지 몰라 공작은 뱃속이 녹아 없어지는 기분이었다.
“그 외의 입장이 어찌 존재할 수 있겠나이까.”
“그렇다면.”
황제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초조해진 공작이 다시 한번 황제를 채근했다.
“말을 너무 아끼시는군요, 폐하. 황후 폐하의 명예가 걸린 일입니다. 어찌하실지 아비로서 답을 들어야겠나이다.”
“아직 정한 바는 없다. 그보다 앞서 황후와 얘기를 나눠야 해.”
“정한 바가 없다니요. 신전 측에서는 벌써 대법관과 재판 날짜를 정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 한가롭게 계실 때가 아닙니다.”
“황후의 입장을 모른 채 나 혼자 결정하고 싶진 않아. 공이 사라지는 대로 황후의 말을 듣겠다.”
“설마 폐하께서는 자신의 반려를 의심하고 계신 겁니까?”
공작은 알 수 없는 이유로 금안이 번들거렸다.
“천만에. 황후는 나의 반려다.”
“……. ……그렇다면 반려를 지키십시오, 폐하. 삿된 입들이 아무것도 모른 채 헛말들을 지껄이고 다니지 않게 말입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하지.”
황제가 턱짓으로 문을 가리켰다.
“할 얘기가 그뿐이라면 그만 가 보도록.”
“…….”
피엘리온 공작이 이 갈리는 소리를 참았다.
“리얀. 공작을 밖으로 안내해라.”
“예, 폐하.”
황제의 그림자 기사가 제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공작은 감히 더 말을 붙이지 못하고 가슴에 손을 얹어 예의를 취한 뒤 황제의 집무실을 떠났다.
탁.
이중으로 된 집무실을 벗어나 복도로 나오자마자 황제의 그림자 기사가 문을 닫고 사라졌다.
“……건방진.”
피엘리온 공작은 참고 참은 이를 지금 갈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황제의 태도는 너무 미적지근했다. 신전이 내던진 모욕에 분노하는 것도 아니었고, 고발장의 터무니없음을 비웃는 것도 아니었다.
공작은 발을 쿵쿵 구르며 긴 복도를 지나 마차를 세워 둔 곳을 향해 걸었다.
“설마 믿는 건 아니겠지. ……아니, 분명 제 눈으로 확인을 하지 않았던가.”
약혼식의 마지막 절차였다. 황제는 표식을 확인했고, 그것으로 약혼이 마무리되었다.
카르타헤나는 알몸을 보이는 것과 다름없지 않느냐며 수치스러워하면서도, 며칠을 통으로 굶으며 몸매를 가다듬었다.
“그래도 모를 일이야. 카르타헤나가 간수를 제대로 못 했을 수도 있어.”
과연 사 년이라는 시간 동안 황제가 표식을 살펴볼 일이 조금도 없었을까.
그건 확신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제 욕심을 채우는 일이라면 기가 막히게 머리를 쓰는 딸을 믿고는 있었지만, 황제가 더 영악할 수도 있었다.
“만약 그런 거라면 나는……,”
공작이 가문과 자신을 살릴 길을 냉철하게 따져 보려던 순간이었다.
“엣헴. 피엘리온 공.”
갑자기 귓가에 점잖은 말투가 들려와 공작은 화들짝 놀랐다.
푸드덕!
희한하게도 날갯짓 소리가 났다.
아니, 이상한 게 아니었다. 커다란 앵무새가 제 머리 근처에서 날고 있었다.
“네가…… 네가 말을 건 것이냐? 새가?”
“내가 말을 걸었소만. 이 몸에게도 이름이 있으니 새 대신 슈라이든 공이라 불러 줬으면 싶소. 하여간 황후 폐하께서 보자시니 이 몸을 따라오시구려.”
“뭐……?”
“거 아직 엉덩이가 무거워질 나이는 아닌 것 같소만. 은밀히 부르시는 일이니 걸음을 서두르시오. 지금은 보는 눈이 없다지만 혹시 모르오.”
“새가 어떻게…….”
“그럼 두 눈 잘 뜨고 따라오시오.”
푸드덕!
앵무새가 속도를 높여 저 앞으로 훌쩍 날아갔다.
“…….”
아직도 얼떨떨한 표정의 공작은 반신반의하며 슈라이든 공작을 따라갔다.
* * *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얼굴을 보자마자 대뜸 하는 말이었다.
서로 안부를 묻거나 포옹을 할 만큼 살뜰한 부녀지간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말을 하자면 깁니다. 일단은 숨부터 고르세요.”
애석하게도 북쪽 탑에는 사람이 앉을 만한 의자가 없었다. 라실리아는 자신이 기대 있던 창틀 옆을 가리켰다.
“이곳은 무얼 하는 곳입니까. 그리고 아까 그 말하는 새는 또 뭐고?”
“슈라이든 공작입니다. 이 탑의 주인이고요. 지금은 내 요청으로 자리를 비워 준 것이니 그렇게만 아시면 됩니다.”
“새가…… 탑의 주인이라고? 황궁 안에서?”
슈라이든의 존재를 설명하려면 얘기가 길어질 것이다. 라실리아가 공작의 말을 잘랐다.
“오늘 폐하를 알현한 이유는 신전의 고발장입니까?”
“……말투가 달라지셨군요, 황후 폐하.”
피엘리온 공작이 이상하다는 눈으로 제 모습을 살피며 말했다.
며칠 전까지만 했어도 신경이 쓰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럴지도요. 제가 기억을 잃었다는 말은 들으셨을 겁니다. 이전 일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뭐라고? 그게 정말이냐?”
놀란 탓인지 공작은 경어를 잊었다.
“네. 오래 자리를 비울 수는 없으니 말을 빨리 하겠습니다. 피엘리온 가문은 신전의 고발장에 대응할 방법이 있습니까?”
“아니, 그럴 리가. 고발장을 받은 게 바로 오늘 새벽이었는데!”
턱!
공작이 양손으로 라실리아의 어깨를 붙들었다.
“너는. 네게는 생각이 있느냐?”
“……말하는 걸 보니 표식에 관해서 이미 알고 있었나 봅니다.”
“그게 아니라면 누가 트리니다드로 테르나덴을 보냈겠느냐.”
“그렇게 된 일이로군요.”
라실리아가 빠르게 생각을 이었다.
“공도 관여한 일이라면 재판에서 밝혀질 일이 더 많겠군요. 감당할 준비는 된 겁니까?”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게야! 재판이라니! 당연히 재판으로 가서는 안 돼!”
펄쩍 뛰는 공작을 보니 일의 심각성을 짐작할 수 있었다.
라실리아의 생각에도 이번 일에 공작까지 엮어 들어가는 건 좋을 게 없었다. 공작이 끼어드는 순간 이번 일은 황후의 비극이 아니라 피엘리온 가문의 반역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다면 공은 끝까지 모르는 일로 하십시오.”
“카르티……?”
“표식에 관한 일은 나 혼자 숨겨 온 것으로 하겠습니다.”
공작의 안색이 변했다.
“네가 그렇게……. 아니, 너무 성급한 결론이다. 황제가 어떻게 나올지 아직 모르는 일이 아니냐.”
“황제는 이미 나를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주술사인 그림자 기사를 시켜 제 몸에 주술의 흔적이 남아 있는지 확인하려고 들었으니까요. 고발장은 쐐기를 박았을 뿐, 황제를 놀라게 만들지는 않았을 겁니다.”
“이럴 수가.”
공작의 몸이 비틀거렸다. 그가 양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의심을 하고 있었다니……. 그럼 우리 가문은 이제 어떻게……,”
“공.”
라실리아가 공작의 어깨를 짚었다. 공작이 손바닥을 내리고 라실리아를 바라보았다.
“상황을 바로 보셔야 합니다. 황제가 재판을 무마할 일은 없습니다. 황권을 넘어서는 일이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 황제에게는 그럴 이유가 없습니다. 내가 지닌 표식이 사라졌다면 그것은 다른 반려가 어딘가에 있다는 뜻. 재판은 황제에게 손쉽게 황후를 폐위하고 다른 반려를 찾을 수 있는 명분이 되어 줄 겁니다.”
레스칼이 정말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잘 몰랐다. 하지만 자신이 황제라면 이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을 터였다.
황실이 입을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동시에 제 몸의 문제도 가장 빠르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어쩌면 양쪽 모두에게 잘된 일이었다.
황제는 진짜 반려를 찾을 수 있고, 자신은 델라르타로 돌아갈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재판을 하게 되면 어디까지 폭로가 이어질지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피엘리온 가문이 위태로워질 수도 있겠지요. 그러니 가장 좋은 방법은,”
라실리아가 말을 끊고 공작을 응시했다.
“증인들의 증언에 앞서 내가 유죄를 시인하는 겁니다.”
공작의 두 눈이 황망하게 벌어졌다.
“뭐…… 뭐라고? 그렇게 하면……,”
“처벌을 받겠습니다. 저 혼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