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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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시작
2023.02.01.
리얀이 참지 못하고 데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뭐라고 한 건데? 응?”
“아…… 성 말리크 기사단에게 자문을 구하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음? 그게 말이 되는 소린가?”
리얀이 처음에는 어이가 없다는 듯 눈을 끔벅거렸다.
“그 짓을 한 게 뻔한 놈들인데? 자문을 구하면 잘도 와서 나불거릴……. ……아니, 잘하면 통할 수도 있겠구나.”
데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자문을 통해 역으로 증거를 찾을 수도 있을 겁니다. 저들이 신전에 정식으로 속해 있는 이상, 폐하의 부름을 거부할 명분은 없습니다.”
“맞아. 우와, 이걸 불사조님이 다 알고 계셨다고? 굉장한데.”
“피이.”
정확히 말하면 피피는 그런 것까지 몰랐고, 그냥 고대 마법을 아는 놈들이 있지 않냐고 했을 뿐이었다.
“지금 당장 불러들여.”
레스칼의 말에 리얀이 제꺽 답을 했다.
“네, 폐하! 허락해 주시면 제가 직접 가겠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근위대를 넉넉히 데려가.”
“알겠습니다.”
리얀이 간다면 무력이 부족할 일은 없었다. 말리크 놈들은 꼼짝없이 끌려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레스칼은 제 이름을 상징하는 보석 펜던트를 떼어 리얀에게 훌쩍 던졌다.
리얀이 두 손으로 공손히 펜던트를 받아 들었다.
“서찰 대신 그걸 가지고 가.”
“헛, 고이 돌려드리겠습니다. 그럼 지금 출발……. ……아, 그전에 뭐 하나 여쭤도 되겠습니까?”
“짧게.”
눈을 한 바퀴 굴린 리얀이 재빠르게 물었다.
“황실 요리장에게는 무얼 내리실 겁니까?”
“아무것도.”
“음? 어째서 그렇습니까?”
“황후가 한 번은 먹을 맛이라 했다더군.”
“아……. 너무 과해도 안 좋은가 보군요. 그럼 당장 가 보겠습니다.”
궁금증을 해결한 리얀이 재빠르게 몸을 돌렸다.
사실 레스칼이 생강 요리를 종류별로 만들게 했을 때부터 그런 우려를 하긴 했다.
황실 요리장이 아무리 끝내주는 요리 솜씨를 갖고 있다 한들, 뭐든 한 가지 재료를 저렇게 집착적으로 집어넣으면 입맛이 물리기 마련이었다.
‘돌아오면 황후궁에 들러서 진짜 좋아하시는 음식이 뭔지 물어봐야겠군.’
그래서 알려 드릴 생각이었다. 리얀은 황후가 새 사람이 되었다고 굳게 믿었다. 세르벤의 징계까지 막아 준 것을 보면 도무지 이전의 포악하고 잔인한 황후와 같은 인물이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뱀대가리들이 지금 좀 귀찮게 굴고는 있지만, 자잘한 문제들을 해결하고 나면 황제와 황후는 그림 같은 한 쌍이 될 것이다.
레스칼은 서른 살 생일을 맞이하기 전에 온전히 피를 종속시키게 될 것이고 오래도록 제국의 위대한 황제로 남을 것이다.
그야말로 바라 마지않는 결말이었다.
“……?”
하지만 벌써부터 그런 꿈을 꾸기에는 너무 일렀다.
갑자기 표정을 바꾼 데칸이 손을 모으고 뭐라고 중얼대기 시작했다. 주문이었다.
잠시 후 데칸이 넓적하게 늘어진 소매 안쪽에서 편지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연락이…… 왔습니다, 폐하.”
편지가 데칸의 소맷자락에서 나왔다는 건 그가 주술로 편지를 가로챘다는 뜻이었다.
“그건 신전의 인장이잖아!”
편지의 겉봉을 확인한 리얀이 소리쳤다.
그러니까 신전에서 황궁으로 보내는 편지를 데칸이 미리 걸어 둔 주술로 파악해 미리 당겨 받은 것이었다.
레스칼이 편지를 받아 거칠게 인장을 뜯었다.
“……뭐라고, 합니까?”
리얀이 침을 삼키며 물었다.
왠지 예감이 좋지 않았다. 신전은 지금 황제의 집무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들여다보고 있다는 것처럼 때를 맞춰 움직였다.
“……늦었다.”
“네?”
툭!
레스칼이 다 읽은 편지를 던졌다. 관자놀이에 핏줄이 일어서고 있었다.
“황후가 표식이 없어진 사실을 유폐하느라 지난 사 년간 총 열일곱 건의 살인을 저질렀다는 고발이다. 신전에서 표식을 확인해야 된다는군.”
“……네? 뭐라고요?”
황후가 기억상실에 걸렸다는 말을 들었을 때, 리얀은 그게 올해 들은 말 중 가장 어이없는 말이 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지금은 몇 배나 더 어이가 없었다.
* * *
하리오스 대신전에서 황후를 고발하는 편지를 보낸 곳은 황실뿐만이 아니었다. 다섯 개의 공작 가문과 대귀족회에 속한 모든 귀족들에게 보냈다.
황실에서 조용히 수습하기에는 일이 너무 커졌다.
대신관의 이름으로 작성된 정식 고발장은 정식으로 대귀족회와 대법관을 거쳐 재판에 회부되었다.
마치 유령에게 홀린 듯한 일이었다.
황실에서 손을 쓰기도 전에 다들 미친 듯이 움직여 재판 날짜와 배심원까지 전부 정해 버렸다. 엘리아든 제국이 세워진 뒤로 이렇게 신속하게 고발장 한 장이 정식 재판이 된 일은 없었을 것이다.
“삐이이! 삐!”
피피가 거칠게 날갯짓을 하며 정신없이 방 안을 날아다녔다.
팔 할쯤은 레스칼의 욕이었고, 이 할은 신전과 뱀대가리들을 향한 욕이었다.
화를 내 주는 심정은 이해하지만 계속 듣고 있자니 마음이 무거워지고 있었다.
고발장의 내용은, 아마도 사실일 테니까.
“삐! 피!”
“피피, 그만하고 이리 와.”
라실리아가 피피에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피피가 날아와 손바닥에 머리를 파묻고 씨근덕거렸다.
“삐이. 삐?”
“……아니, 화가 난 건 알겠는데 그렇다고 신관들을 모조리 죽이겠다는 그런 말은 하지 마.”
“삐!”
“죽여도 되는 사람 같은 건 없어. 그리고 나는 벌써 열일곱 명을 죽였다는데 거기에 살인을 더 보탤 수는 없잖아.”
“피이잇.”
“네가 죽이든 내가 죽이든 마찬가지야. 그렇게 따지면 궁인들도 내가 죽인 건 아니지.”
“피이…….”
피피가 기운이 빠졌다며 날개를 축 늘어트렸다.
곁에 있던 이베트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황후 폐하께서는 화가 나지 않으세요?”
“그래야 하나?”
“네.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고 있잖아요. 궁인을 죽인 죄를 묻겠다니요. 일개 귀족에게도 그런 일은 없는걸요. 대체 어떤 신전에서 귀족이 자기 집 사용인을 처벌한 죄를 고발하나요. 그건 진짜 말이 안 되는 일이에요.”
씁쓸하지만 신분은 그런 것이었다.
이베트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이제 귀족이 되어서 궁인들의 목숨이 우스워진 탓이 아니었다. 신분이 주는 부조리와 차별이 너무 당연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이건 제 생각인데, 문제를 삼는 부분은 궁인의 목숨이 아니에요. 표식이 사라졌다고 하는 부분이에요.”
그럴 것이다.
신전이 법도 모르고 덤벼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중요한 건 표식이었다.
신전은 라실리아가 가짜라는 것을 드러내고 싶어 했다.
여기서 생각이 복잡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신전이 노리는 건 황후야.’
황후가 가짜라는 게 밝혀지면 황제는 손해 볼 것이 없었다. 비밀을 숨긴 것은 황후이므로 황제는 황후를 처벌하고 진짜 반려를 찾으면 되는 것이었다.
‘신전이 황실과 돈독한 사이는 아니라지만…… 황제가 마족으로 변이하는 건 막겠다는 의도일지도 몰라. 황후가 계속 입을 다물고 있으면 가장 치명적인 피해를 입는 것은 황제야. 그리고 황제가 변이한 대가는 제국의 모두가 함께 치르겠지. 신전은 이런 방식으로 제국을 지키려고 하는 것일지도 몰라.’
그러니 문제는 오로지 자신이었다.
황후의 얼굴을 하고 있되, 진짜 황후는 아닌 델라르타의 예언자가.
“만약 신전의 말이 사실이라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아…… 황후 폐하.”
이베트가 안쓰럽다는 얼굴로 제 두 손을 꼭 움켜쥐었다.
“제 생각으로는…… 만약 재판에서 지신다면, 폐위가 되실 거예요.”
“폐위라고?”
의외였다.
라실리아는 당연히 황후가 죽게 될 줄 알았다.
“네……. 엘리아든에서 황후는 황제의 반려가 갖는 자리니까요.”
“폐위가 되면 어떻게 되지?”
“그건…… 어, 저도 잘 모르겠는데…… 아마 공작가로 돌아가시게 되지 않을까요? 물론 피엘리온 공작님과 얘기가 되어야겠지만요. 어쩌면 이번 일로 피엘리온 공작님도 처벌을 받으실지 몰라요. 만약 표식이 사라졌다면 피엘리온 공작님도 은폐에 가담했을지 모르니까요.”
이베트는 은연중에 표식이 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하고 있었다.
하긴, 이베트만큼 영리한 자가 모를 수도 없는 일이었다. 황후는 사 년 동안이나 동침을 거부했으며 욕실에 들어갈 때도 제 맨몸을 보는 일이 없도록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이유가 없다면 하지 않을 행동이었다.
“폐위라고…….”
처형이 아니었다.
폐위가 된 뒤 공작이 받아 주지 않을 경우 빈털터리 몸으로 갈 곳을 잃게 되겠지만 라실리아에게 그건 아주 나쁜 결말은 아니었다.
‘그럼 돌아갈 수는 있겠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해답이 튀어나온 기분이었다.
‘제대로 된 해답인지는 모르겠지만.’
라실리아가 본 예언은 죽어가는 자신을 레스칼이 쳐다보는 것이었다. 자신은 레스칼에게 사랑을 고백했고, 레스칼은 그걸 거부했다. 예언 속에서 레스칼은 냉정할 뿐이었다.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표식이 사라졌다는 걸 알고 감정도 한순간에 사라진 걸까. 그저 속았다는 데 분노만 남은 걸까.’
그래서 폐위된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걸까.
하지만 그것도 어딘가 아귀가 들어맞지 않았다.
‘그게 지금이라면…… 좀 이상하긴 해.’
황제에게 드는 거부감이 많이 희석된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을 죽이려고 할 때 배신감과 원망에 사로잡혀 내가 당신의 진짜 운명이라고,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고 소리치진 않을 것 같았다.
‘시기가 지금은 아닌 것 같아.’
어쩌면 훨씬 뒤의 일일 것이다.
제 감정이 걷잡을 수 없이 무르익은 다음에. 자신이 가짜라는 사실마저 잊고 황후의 삶에 익숙해졌을 때. 그가 자신을 사랑한다 믿어 의심치 않게 된 어느 날.
‘좋아. 그렇다면 모험을 해 보겠어.’
그 전에 폐후가 되어 황궁을 떠날 것이다.
재판의 결과가 폐위라는 확신이 필요했다. 그게 보장된다면 유죄를 인정하고 재판장에서 신관들 앞에 표식을 증명하는 절차를 생략할 수 있었다.
“황후 폐하……. 제가 도움이 될 일은 없을까요?”
이베트가 심각해져 가는 라실리아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정작 걱정이 돼서 미치겠다는 얼굴을 한 쪽은 이베트였다.
“뭐든 말씀만 하세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하겠습니다. 시키시는 대로 증언도 할 수 있어요.”
이베트가 의미하는 것은 거짓 증언일 것이다.
하지만 신전의 선서 아래 거짓을 말하는 것은 치명적이었다. 엘리아든의 경우는 본 적이 없었지만, 델라르타에서는 신의 저주가 주어졌다. 여기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니. 너는 그저 네가 듣고 본 대로 말하면 된다. 하지만 네게 증언을 요구하는 일은 없을 거야.”
“어째서요? 저는 황후궁의 제1시녀입니다, 황후 폐하.”
“그렇게 될 거야. ……아, 하지만 증언 외에 달리 해 줄 일이 있다.”
“말씀만 하세요, 황후 폐하.”
라실리아가 원하는 건 신관과 법관, 그리고 대귀족회를 다룰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 인물은 몹시 가까이에 있었다.
“피엘리온 공작을 만나야 해. 가장 빠른 방법은 뭐가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