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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뱀의 목적 (43/96)


43. 뱀의 목적
2023.01.29.



 


“…….”

생강 주스의 맛이 다른 데는 이유가 있었다.

플로타가 해 준 생강 주스의 맵고 역한 맛을 떠올리며 라실리아가 미간을 찡그렸다. 플로타는 그 주스를 만들 때 이걸 먹을 자신을 위한다거나, 혹은 자신이 빨리 낫기를 바라는 마음 같은 건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 먹는 달고 따듯한 생강차는 목을 부드럽게 넘어가면서도 마음 어딘가에 미적지근하게 들러붙었다.


-맛있게 만들라고 했어.

그걸 먹을 자신이 맛있다고 느껴야 하니까. 그가 그러길 바랐으니까.


“……몰라.”

달칵.

라실리아가 두 번째 찻잔을 내려놓았다.

이러다 괜히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될 것 같아 라실리아가 그대로 이불을 덮어썼다.

이불이 제 생각을 모두 희게 덮어 주길 바라며 억지로 잠을 청했다.

그 다음 날 엘리아든의 황후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생강이라는, 말도 안 되는 정보가 황실 요리장에게 전달되었다.

* * *



“이건 좀 심하지 않아?”

라실리아가 식탁을 채운 요리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모든 요리에는 생강이 올라가 있었다.

세상에 그렇게 다양한 생강 조리법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한쪽 팔에 붕대를 감은 이베트가 민망한 듯 고개를 숙였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황후 폐하…….”

“……어이가 없지만 맛은 있네.”

라실리아가 쓰게 웃으며 포크를 움직였다.


“생강으로 잼도 만들 수 있나 봐. 나는 몰랐는데.”

“사실 뭐든 만들 수 있어요, 황후 폐하. 과자나 케이크도 만드는 걸요. 그리고 또……, ……아니, 좋으시다는 게 아니었죠.”

습관처럼 아는 것들을 늘어놓으려던 이베트가 중간에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치맛자락을 만지작대던 이베트가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말을 덧붙였다.


“그게…… 저는 그냥 황후 폐하께서 감기에는 생강 주스를 드셨다는 말씀을 드린 것뿐인데…… 어쩌다 보니 그게 잘못 전해진 모양이에요.”

그러니까 이베트는 오늘 아침 식탁이 이 꼴이 된 것을 자기 탓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 잘못이 있다면 생강차를 두 잔이나 비운 내 탓이지.”

어이가 없는 와중에 웃음이 피식 나왔다.

차를 달게 받아 마셨다고 이런 사달을 만들어 낸 황제를 생각하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 그, 그럼 나쁘지 않은 거네요?”

“한 번 정도는 먹을 만해. 하지만 매번 이러지 않도록 말은 해 두는 게 좋겠어.”

“알겠습니다, 황후 폐하.”

이베트가 한결 가벼워진 얼굴로 바지런히 움직여 식사 시중을 들었다.


“괜찮아. 공녀는 다쳤잖아. 내가 먹겠다.”

“아니, 이건 그냥 보기만 이런 거고 별로 아프지 않아요. 치료도 벌써 다 받았고요. 그런데 저어……,”

기껏 가벼워졌던 얼굴이 다시 어둑해졌다.


“황후 폐하께서는…… 정말 괜찮으신 건가요……. 그러니까 제가 그런 짓을 한 게 정말로……,”

“몇 번을 말했지만 그건 네 잘못이 아니었어.”

“그래도 제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했는 걸요. 차마 입에 담을 수도 없는……,”

이베트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라실리아가 포크를 놓고 이베트의 손등을 토닥였다.


“시그레스 경도 당한 일이야. 고대 마법일지도 모른다니 피할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나는 공녀가 무사해서 다행이라 생각해.”

“황후 폐하…….”

이베트가 울먹이며 라실리아를 바라보았다. 이미 끝난 얘기가 다시 반복될 것 같아 라실리아는 다시 포크를 들었다.


“일단 식사를 마치고 싶다. 더는 그 일에 대해 걱정하지 말도록.”

“아, 알겠나이다……. ……아, 그런데 왜 하필 옷을 벗기게 만들었을까요.”

이베트는 영리했다. 이번 일에는 확고한 목적이 있다는 걸 놓치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너무 이상한 거예요. 머리를 싸매고 내내 고민했는데, 아무래도 그 이유는 딱 하나밖에 없겠더라고요.”

달칵.

포크가 접시에 부딪히며 작은 소리를 냈다.

라실리아가 동요를 감추기 위해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게 뭐라고 생각하는데?”

“표식이요. 황후 폐하께 그런 짓을 할 이유라고는 표식밖에 없지 않을까요?”

말을 내뱉던 이베트가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표식은 절대 쉽게 볼 수 없는 그런 곳에 있으니까요. 표식으로 대체 무슨 짓을 하려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정말 심각한 일 같아요, 황후 폐하.”

“……그러게.”

이베트가 눈치챘으니 조만간 다른 이들도 눈치를 챌 것이다. 황후의 옷을 강제로 벗길 이유는 이베트의 말대로 표식을 확인하는 것, 단 하나밖에 없었다.


“호르세드 경이 말하길 고대 마법이 쓰였을지도 모른다면서요. 그럼 범인은 틀림없이 뱀대가리들일 테고……. 그럼 신전도 아예 연관이 없지는 않을 것 같아요.”

“……글쎄.”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요? 왜 황후 폐하에게 이런 일이……,”

“슈라이든 공녀.”

라실리아가 그쯤에서 이베트의 생각을 가로막았다.

이베트는 벌써 제 비밀 앞으로 성큼 다가오는 중이었다. 이러다 목욕 시중을 거부하고 속드레스는 늘 혼자 갈아입는 이유까지 표식과 연관 지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베트가 비밀을 마주하기까지 단 몇 걸음이 남았을 뿐이었다.


“말했듯이, 그건 폐하의 근위대가 맡은 일이다. 나는 식사를 마치고 싶은데.”

“앗, 제가 주제넘게 나섰습니다. 용서하소서, 황후 폐하.”

이베트가 입을 닫고 뒤로 물러섰다.


“…….”

라실리아는 말이 없이 포크를 계속 움직였다.

이제는 정말로 무슨 시도라도 해야 할 시간이 되었다.


‘더는 황후가 아닐 수 있는 방법. 그걸 생각해야 해.’

그런 게 뭐가 있을까.

* * *

황제의 집무실에는 평소와는 조금 다른 인원이 모여 있었다. 말단 기사로 강등되어 황후궁의 정문에서 경비를 서고 있는 세르벤을 대신해 데칸과 피피가 있었다.


“어, 처음 보는…… 처음 뵙습……니다?”

리얀이 피피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불사조라 듣긴 했지만 모습이 너무 작아 경어가 잘 나오지 않았다.


“아주, 음…… 어리시네요?”

“삐!”

피피가 한쪽 날개를 탁 털며 고개를 저었다.


“뭐라는 거야?”

리얀이 당황해 데칸을 바라보았다.

마찬가지로 말단 기사로 강등된 데칸은 리얀의 등 뒤에 공손히 손을 모으고 서 있었다.


“아, 쓸데없는 인사는 그만두고 중요한 얘기를 하자고 하십니다.”

“오, 너는 저 말을 다 알아들어?”

“아니요. 명확하게 이해하는 건 아닙니다. 주술의 힘을 빌려 몸짓을 읽는 정도입니다.”

“그래도 신기하다. ……참, 그런데 호칭은 어떻게 해야 해? 그냥 불사조님이라고 부르면 되나? 그건 좀 이상한데.”

“삐이!”

“이름이 있다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함부로 입에 담는 건 좋아하지 않다고 하십니다.”

“아……. 취향 확고하시네.”

리얀이 어쩐지 서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삐! 삐!”

짜증이 났던지 피피가 푸드덕 날아 리얀의 콧등을 날개로 찰싹 내리쳤다.


“……집중하라고 하십니다.”

“아, 네. 죄송합니다.”

리얀이 선뜻 사과를 하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사실 아직 레스칼이 오지 않아서 그럴 필요는 없었지만 저 조그만 새는 인간들을 괜히 눈치 보게 만들었다.


“폐하께서는?”

“아직 요리장과 말씀 중이십니다.”

“그렇군.”

황제가 요리장을 직접 마주할 일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래도 리얀이나 데칸이나 아무 말 하지 못했다.

연이어 황후에게 안 좋은 일이 생겨나는 바람에 황제는 온통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황후의 기분을 풀기 위해서는 뭐든 할 기세였다.

황궁 안의 경비가 삼엄한 가운데 시종장 페르손은 새 재단사를 물색하고 보석상에 황후의 새 목걸이를 주문하는 등 정신없이 바빴다.

그 와중에 레스칼은 황후궁의 시녀에게 내릴 선물도 잊지 않았다. 황후가 좋아하는 음식을 알려 준 것에 대한 보답이었는데, 고작 말 한마디 해 준 것의 보답치고는 몹시 과하다는 다수의 의견이 있었다.


“요리장에게도 뭘 내리시려나……. 황후 폐하께서 맛있다는 말 한마디라도 하셨으면 성이라도 하사하실 것 같은데.”

리얀이 생각 없이 중얼거렸다.


“피!”

그러다 반대쪽 뺨도 얻어맞았다.


“황후 폐하를 기쁘게 해 드리는 일에 토 달지 말라고 하십니다.”

“아니, 토를 다는 게 아니라……,”

“삣!”

“네, 네. 알겠습니다.”

리얀이 빠르게 양손을 들어 보였다.

불사조는 코딱지만 한 주제에 성질이 보통이 아니었다. 일단 날아와 한 대 패고 보는 성격이었다.


 


“성을 내리시진 않을 겁니다.”

“아, 그건 그렇겠지. 보석이라면 몰라도. 그게 얼마나 크냐의 문제겠지만.”

그런 말을 주고받는 와중에 레스칼이 도착했다.

데칸과 리얀은 언제 잡담을 나눴나 싶게 절도 있는 자세로 황제를 맞이했다.


“인사는 됐어. 그냥 앉아.”

레스칼은 잡다한 일을 생략하고 곧장 보고를 지시했다.

아무리 봐도 황후가 새로 시도한 요리를 먹고 행복해했다는 말을 들은 애처가로는 보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근위대가 재단사의 식솔을 확인했습니다. 식솔은 모두 죽었고, 막내아들만 실종 상태였는데 오늘 새벽 변사체로 발견되었습니다.”

리얀이 빠르게 입을 열었다.


“누가 죽였는지 밝혀진 바는 없나?”

“송구하게도 그렇습니다. 그 자식들, 얼마나 철저한지 목격자 하나 남겨 두지 않았습니다.”

“성 말리크가 한 짓이라는 것은 맞아?”

“그 또한 확실하지 않습니다, 폐하. 발견된 시체의 사인은 일반적인 자상이었습니다. 칼에 찔려 죽은 게 확실합니다. 말리크 놈들과 연관 지을 만한 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 무력한 기분이군.”

레스칼이 화를 대신해 낮게 내뱉는 목소리가 측근 기사들을 괴롭게 만들었다.


“송구합니다, 폐하.”

“다른 건?”

이번에는 데칸이 나섰다.


“증거를 찾기도 해야겠지만 이번 일을 벌인 목적도 고려를 해 봐야 될 것 같습니다. 하필 재단사를 이용했다는 게 이상합니다. 매개체에 대한 제약이 없이 힘을 사용할 수 있다면 좀 더 쉬운 방법도 있었을 겁니다. 예를 들면 요리장이라든지.”

“…….”

레스칼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예시일 뿐입니다, 폐하. 하여간 황후 폐하를 해치려는 목적이었다면 그게 더 나았을 거라는 뜻이었습니다. 음식에 독을 타면 간단한 일이잖습니까. 시그레스 경을 이용할 수 있었던 것을 보면 근위대 또한 조종이 어렵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그런데 재단사를 이용했습니다. 재단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었던 겁니다.”

“……황후의 옷을 벗기려는 게 목적이었다는 뜻이로군.”

“표식을 노렸던 게 아닐까요.”

레스칼이 미간을 엄지로 눌렀다.


“표식은 말 그대로 표식일 뿐이다. 황후가 내 반려라는 증거일 뿐 표식 자체에는 아무런 힘도 없어.”

“그렇다면 혹시 표식을 다른 몸으로 옮기거나 하려던 건 아니었을까요. 고대 마법으로 가능하다면 말입니다.”

“그 표식을 만든 건 주술이다. 고대 마법으로 주술에 관여하는 게 가능한가?”

“그것까진 모르겠습니다. 주술과 마법은 서로 다른 힘을 다른 방식으로 구동한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더 큰 힘이 그보다 못한 힘을 없애는 것이라면 가능할 겁니다.”

“표식을 노렸다고 쳐. 그래서 놈들이 얻는 것은?”

“……. ……송구하나 거기까진 모르겠습니다.”

데칸이 그답지 않게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고대 마법에 대한 연구가 거의 없으니 알아낼 수 있는 게 한정적입니다. 하다못해 어떤 힘을 쓰는 건지라도 알 수 있으면…….”

“삐이?”

그때 피피가 끼어들었다.


“뭐라고?”

“네?”

레스칼과 데칸이 반응하자 혼자만 피피가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한 리얀이 울상을 한 채 애꿎은 고개를 저어댔다.


“삐이. 피피이. 삐?”

“아…….”

놀라워하던 데칸이 이어서 화색을 드러냈다.


“그것도 방법이겠군요. 괜찮은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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