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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따듯한 생강 주스 (42/96)


42. 따듯한 생강 주스
2023.01.25.



 


“고대 마법…….”

라실리아가 천천히 데칸의 말을 되짚었다.

델라르타에는 고대 마법에 관한 기록이 거의 없었다. 아마 그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은 대륙 내에서 가장 긴 역사를 가진 엘리아든 제국이 유일할 것이다.


“네. 지금으로서는 그게 가장 근접한 답입니다.”

데칸의 설명이 이어졌다.

마법의 기본은 인간의 것이 아닌, 자연 상태로 존재하는 어떤 특정한 힘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현대 마법은 그 힘을 마나라 지칭했다. 마나를 움직이기 위한 게 마법진이었다.

그러나 고대 마법은 마나가 아닌 다른 힘을 이용했다고 했다. 시작은 진을 이용해 힘을 소환하는 것이었으나 힘의 성질이 다르다고 했다. 차원을 넘어오는 그 힘은 마나와는 달리 인간에게도 작용할 수 있을지 몰랐다.


“그렇다면…… 범인은 정해졌겠군.”

성 말리크의 기사단일 것이다. 그들이 고대 마법을 추앙하며 복원하려 한다는 얘기는 일전에 이베트가 해 주었다.


“아직은 추측일 뿐입니다. 고대 마법을 사용했다는 것도 짐작만 할 뿐, 명확한 증거가 있는 건 아닙니다.”

“게다가 성기사단이 되어 신전의 비호를 받을 테니 섣불리 건드릴 수도 없겠군.”

“말씀하신 바가 맞습니다.”

잠시 대화가 멎었다.

성 말리크의 기사단이 황실을 겨누고 있는 건 확실했다.

계속 불길한 생각이 머릿속에 파문을 그렸다.


‘옷을 벗기려고 들었어. 그렇다는 건…… 표식을 확인하려고 그랬던 걸까.’

표식이 사라지는 걸 알고 있는 파샤드 후작 부인이 신전과 엮여 있었다. 그 뒤로 후작 부인은 후작저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고 있다고 전해졌지만 비밀이 새어나가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는 없었다.


‘내가 가짜라는 걸 밝혀서. 그 다음에는 무얼 하려는 걸까.’

이제껏 라실리아는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면 위험해지는 것은 자신뿐이라고 생각했다. 황제는 결국 진짜 반려를 찾을 수 있을 테니 그에게는 오히려 나은 결과일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신전이 그걸 어떻게든 이용하려고 든다면……. ……좋을 수만은 없는 걸까.’

일단 사람들이 블루문의 비밀을 알게 될 것이다.

블루문이 되면 황제는 마족으로 변이하고, 그걸 제어할 수 있는 장치가 없다는 사실도 함께 드러날 것이다.

황제에게도 위험한 일이었다.


‘가장 좋은 건 어서 빨리 진짜 반려를 찾는 거야.’

그러면 위험은 온전히 제 몫으로만 남았다.


“피이…….”

생각을 잇는 라실리아의 얼굴에 그늘이 졌는지 피피가 걱정스럽게 불러 댔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괜찮아.”

라실리아의 반응을 살피고 있던 것은 피피뿐만이 아니었다.


“그래서 황후 폐하께 한 가지 묻고자 합니다.”

“무엇을?”

데칸이 뚫어져라 라실리아를 바라보았다.

주술사의 시선이 어떤 힘을 지녔는지 라실리아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방심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데칸은 제 몸에서 주술의 흔적을 찾으려고 했다. 그림자 기사들은 그 누구도 사 년씩이나 황제를 기만해 온 황후를 믿지 않았다.

그들도 성 말리크의 기사단과 마찬가지로 기회만 된다면 황후의 비밀을 캐내고자 들 것이다.


“황후 폐하께서는, 대체 어떻게 고대 마법을 파훼하신 겁니까?”

“……?”

 

* * *

아무런 힘이 없는 시녀라면 몰라도 상급 기사인 세르벤조차 속수무책으로 당한 힘이었다.

기사라는 건 단순히 검술 실력만으로 되는 게 아니었다. 검을 쥐는 순간부터 몸을 단련해 온 그 무수한 시간들 속에 마음과 정신도 벼려지기 마련이었다.

그저 소리를 지른다고 깨어질 힘이 아니었다. 하지만 세르벤은 황후가 말을 들으라고 소리치는 순간, 속박에서 벗어났다고 말했다.

제1시녀 슈라이든 공녀의 말도 비슷했다. 내 몸에서 손을 떼라는 황후의 목소리가 생각을 부수는 것 같았다는 말을 했다. 그 뒤로 정신을 차렸다.

두 사람의 말은 같았다. 정신을 속박하는 힘을 부순 건 황후의 목소리였다.

황후에게 특별한 힘이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아.”

잠시 생각하던 라실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고대 마법이 맞다 해도 온전한 힘이 아니었겠지. 황실 재단사는 마법사도 성기사도 아니지 않았나.”

“마법이나 주술이나 주문을 완성하는 건 목적입니다. 목적이 이루어지지 않은 마법이나 주술이 중간에 사라지는 일은 없습니다. 더 큰 힘에 의해 파훼되지 않는 한 말입니다.”

“성 말리크 기사단이 고대 마법을 온전히 복구했다고 볼 수 있나? 처음부터 주문이 불완전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황후 폐하께서는 두 사람이 제정신으로 돌아온 일에 아무런 관여도 하지 않았다고 여기시는 겁니까?”

“그게 맞을 거라 보는데. 나는 주술사가 아니며 마법사도 아니다.”

예언자의 힘을 지니고 있지만 그것은 오로지 꿈을 꾸게 만들 뿐이었다.


“하지만 불사조의 비호를 받고 계시지 않습니까. 태초의 반려는 주술사였으며, 그 외에도 많은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불사조?”

“지금 안고 계신 그 새 말입니다.”

“삐이!”

피피가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아…….”

꿈에서 불꽃을 일으키던 그 새가 불사조인 모양이었다.

피피가 다 자라면 그 새처럼 되리라는 것은 이제 의심할 여지가 사라졌다.

하지만 자신은 그걸 모른 척해야 했다.

진짜 반려인 척할 수는 없었으니까.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나. 피피는 그저 작은 새일 뿐인데.”

“이제껏 모르셨습니까?”

이렇게 되묻는 데칸은 꽤나 놀란 것처럼 보였다.


“다른 새와 다르다는 걸 한눈에도 알아보셨을 텐데요.”

“……몰랐어. 그저 사람을 잘 따르는 새라 여겼다. 지금도 피피가 불사조라는 게 믿기지 않는군. 피피는 불꽃을 일으키지도 못하는데.”

“삐이! 삐삐! 피피피!”

피피가 그럴 리 없다며 라실리아의 주위를 파닥파닥 날았다. 입을 벌리고 뭔가를 토해 내는 시늉을 하는 게, 불꽃을 일으키려고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결국 피피가 지쳤다고 말하며 라실리아의 손바닥 위에 드러누웠다.


“봐. 그냥 작은 새잖아.”

“……시간이 지나면 아시게 될 겁니다. 그럼 질문은 끝났으니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데칸의 회색 눈은 물처럼 맑고 차분했다.

그 눈이 제 거짓말을 물처럼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라실리아는 불안감을 감추며 피피를 어루만졌다.


“피이…….”

손바닥에 감겨 오는 온도가 따스했다. 불안감을 녹여 주는 듯했다.

어서 떠나야 했다.

이 온도에 익숙해지기 전에.

* * *

레스칼은 하루를 몹시 바쁘게 보냈다.

은의 방패들에게서 실시간으로 보고를 받으며 신전과 뱀대가리들의 동향을 파악하고 이번 일의 흉수를 추적하는 데 온 신경을 쏟았다.

그가 황후궁으로 돌아온 것은 아주 늦은 시간이었다.

툭…….

라실리아는 그 시간까지 잠들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방문을 두드리려다 마는 작은 소리를 들었다.


‘황제겠지.’

들려오다 마는 아주 작은 소리는 많은 짐작을 하게 했다.

황제는 문 앞에서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어쩌면 생각 없이 문을 두드리려다 제풀에 놀랐을 수도 있었다. 이렇게까지 늦은 시간인 줄 모르고 있다가 뒤늦게 깨달은 것일 수도 있었다.


“…….”

라실리아는 고민하다 몸을 일으켜 침실 문을 열었다.

이상하게도 그가 계속 그 자리에 오랜 시간 서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내가 깨웠나?”

그 생각이 맞았다.

황제는 옆방으로 가는 게 아니라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아닙니다.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이걸 주려고.”

“……?”

라실리아는 황제의 손에 들린 찻잔을 바라보았다.

뚜껑이 덮인 찻잔이었는데, 찻잔이란 늘 찻주전자나 다과와 함께 있던 것만 본 터라 황제의 손에 덜렁 찻잔이 들려 있다는 게 조금 희한했다.


“이게 뭡니까?”

“그대가 이걸 찾았다고 해서.”

“제가요?”

아무래도 그런 기억은 없었다.


“시녀에게서 들었다.”

“아…….”

그렇다면 하나밖에 없었다. 황제가 들고 온 것은 생강 주스일 것이다.

그런데 유리잔이 아니라 찻잔이라는 게 이상했다.


“공녀가 착각을 한 모양이로군요. 생강 주스는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는데.”

“아,”

레스칼이 짤막한 신음을 흘렸다.


“감기에는 이걸 먹어야 한다고…… 틀림없이 그랬는데…….”

얼마 없는 표정이 너무 난처하고 허탈해 보여서 제 마음까지 불편해질 지경이었다.


‘이 사람은 왜 자꾸 나를 무르게 만드는 걸까.’

라실리아가 짧은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한 번 저었다.


“이리 주세요.”

레스칼의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먹을 건가?”

“조금이라면.”

그가 서둘러 뚜껑을 열었다.

김이 모락모락 솟아오르고 있었다. 이제 보니 두 손이 찻잔을 꼭 감싸고 있었다. 식지 않게 하려고 애를 쓴 모양이었다.


“맛있게 만들라고 했어. 생강은 맛이 없으니.”

“그러셨나요?”

그래서 플로타가 만들어 주던 생강 주스와는 향도, 모양도 다른 모양이었다.


“맛이 없으면 말해 줘.”

금안이 이쪽을 향해 반짝였다. 그 눈에 어리는 기대감을 도무지 못 본 척 할 수가 없었다.


 


“…….”

마른침을 한 번 삼킨 라실리아가 따듯한 생강 주스를, 아니 생강차라 해야 할 것을 한 모금 들이켰다.


“아…….”

완전히 다른 맛이었다.

따듯하고, 부드러웠다. 그리고 달콤했다.

매운 생강 맛이 남아 있었지만 함께 갈아 넣은 땅콩의 고소함과 어우러져 거슬리지 않았다. 달콤했지만 뒤에는 신맛이 남아 입안을 개운하게 만들었다.


“맛있……어요.”

라실리아가 답을 하자 레스칼이 숨을 길게 내쉬었다.


“다행이야.”

라실리아는 저도 모르게 또 한 모금을 마시고 있었다.

차갑고 맵기만 하던 플로타의 생강 주스 생각은 눈곱만큼도 나지 않는 맛이었다.


“이걸로 화를 조금 풀어 주면 안 될까?”

레스칼은 라실리아가 차를 다 마시기를 기다렸다 느릿하게 말을 꺼냈다.


“제가 화를 냈나요?”

“화가 났잖아. 내가 데칸에게 시킨 일 때문에.”

사실 화는 다 잊었다. 애초에 화를 낼 일도 아니었다.


“……화가 날 만한 일이지 않습니까.”

라실리아는 거짓말을 감추려 일부러 차갑게 말을 했다.

레스칼의 어깨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알고 있다. 그래서 뭐든 하고 싶어. 그대의 화를 가라앉히려면 내가 무얼 해야 하나?”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이렇게 애틋하게 굴지 않아도 정말 괜찮았다.

그런 말을 할 수 없다는 게 유감이었다.


“이걸 좀 더 마셨으면 합니다.”

그래서 라실리아는 빈 찻잔을 그에게 돌려주었다.


“지금처럼 폐하께서 가져다주시는 것으로요. 다른 사람에게 시키지 마십시오.”

그러면 귀찮아하거나 난처해할 줄 알았다.

그런데 레스칼은 뜻밖에도 미소를 지었다.


“그거면 되나?”

“그렇다고 제가 화를 풀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알고 있어. 그래도 내가 가지고 온 게 그대의 마음에 들었다는 거잖아.”

“…….”

라실리아가 할 말을 놓치는 사이에 레스칼이 귓가에 입술을 붙였다.


“그래서 고맙다.”

그가 빈 잔을 들고 돌아섰다. 돌아서기 전 이렇게 말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기다려. 빨리 다녀오겠다.”

“…….”

레스칼이 소리 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말한 것처럼 빠르게 사라지는 그를 지켜보는 마음이 너무 이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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