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고대 마법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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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고대 마법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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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고대 마법이란
2023.01.22.
“시그레스 경을 처벌하려면 슈라이든 공녀 역시 처벌을 받아야 합니다. 저는 그러고 싶지 않군요.”
둘 다 주술 아닌 주술 같은 그것으로 인해 제 옷을 벗기려고 들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건 안 돼.”
레스칼이 미간을 구겼다. 그가 라실리아의 손을 잡고 고개를 저었다.
“그대에게 칼을 겨누었다. 용납할 수 없는 일이야.”
“의지로 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둘 다 알지 못할 힘에 당했을 뿐입니다.”
“또다시 그런 일이 생긴다면?”
“그럼 한 번 겪어 본 자가 더 낫지 않겠습니까?”
“…….”
레스칼의 미간이 더 좁아졌다.
라실리아는 그에게 붙잡힌 손을 빼어 들었다. 블루문이 지났지만 황제는 아직도 기회만 생기면 제 손을 잡으려고 들었다. 스스로 자연스러웠다고 여길지도 몰랐지만 라실리아에게는 아니었다.
계속 신경이 쓰였다. 황제의 손이, 그라는 존재가.
“게다가 두 사람은 저를 해치려는 마음까지는 없었을 테니 주술과 비슷한 그 힘이 끝까지 작용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고요.”
정확히 말은 할 수 없었지만 왠지 그런 느낌이었다.
두 사람 다 자신을 위한 일을 하고 있다고 믿는 눈치였다. 치수를 재야 제대로 된 옷을 만들 수 있고, 제대로 된 옷을 만들어야 자신이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특히나 이베트는 더 이상 제 시중이 필요 없다고 하니 주술 비슷한 그것에서 풀려났다. 세르벤이 칼을 떨어트린 이유도 비슷할 것이다.
세르벤이 자신을 해칠 리 없다고 믿는 상태에서 목소리에 힘을 싣자 정상으로 돌아왔다.
“앞으로 누가 같은 짓을 할지 모르는 입장에서는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을 곁에 두는 게 더 낫습니다.”
레스칼이 라실리아가 놓은 제 손을 바라보았다. 손등에 핏줄이 불거져 올라왔다.
“그렇게 쉽게 용서하겠다고?”
“용서할 것도 없습니다. 두 사람 모두 악의를 품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렇게 못 하겠어.”
레스칼이 뭔가를 씹어 뱉듯이 말했다.
“나는 용납할 수 없다. 그대에게 그런 일이 벌어진 것도, 그런 일을 만든 자가 다른 누구도 아닌 세르벤이었다는 것도. 그건 나의,”
“괜찮습니다, 폐하.”
라실리아가 가벼운 한숨과 함께 레스칼의 손등에 제 손을 얹었다.
황제와 닿는 일을 피하려고 했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만은 않았다.
저 표정 없는 얼굴이 구겨지면 그게 몹시 괴로워 보였다.
‘내가 이렇게 무른 사람이었구나. ……델라르타에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레스칼이 시선을 들어 라실리아를 바라보았다.
이 순간 짓는 이런 표정이 괴롭다는 것이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손에 잡힐 듯 보이는 것 같아서.
“이런 일이 벌어질 동안 함께 있던 게 두 사람이라서 괜찮았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처벌은 필요 없습니다.”
“나는……. ……그대는 내가 어떻게 하길 바라나?”
“두 사람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다른 일은 제가 말씀드리지 않아도 알아서 잘 하시리라 믿습니다.”
누가 이런 일을 했는지는 밝혀져야 했다. 그건 황제가 알아서 할 일이었다.
“용서하기 힘들다면?”
“저를 위해서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이상해.”
레스칼이 소리 없는 한숨을 흩뿌리며 라실리아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어쩐지 그가 이런 행동을 할 것 같았다. 감정의 동요가 생기면 황제는 본능적으로 반려를 찾는 듯했다.
“그대의 말이 옳다는 건 알아. 하지만 지금 그 말을 인정하는 게 굉장히 싫다. 이게 무슨 감정인지 모르겠어.”
“글쎄요……. 저도 모르겠습니다.”
“이것도 부탁으로 쳐도 되는 건가? 싫은 걸 억지로 해야 하니까.”
“…….”
지금 자신이 용서해 주라는 게 황제의 그림자 기사라는 점은 알고 있는 걸까.
“……그럼 그렇게 하십시오.”
그래도 라실리아는 한발 양보하기로 했다. 이 정도도 하지 않으면 너무 야박한 것 같았으니까.
황제의 어깨 너머로 리얀이 안도하며 숨을 크게 내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레스칼이 여전히 이마를 라실리아의 어깨에 댄 채 라실리아가 먼저 잡은 손을 어루만졌다.
“이건 부탁의 대가가 아니야. 그대가 먼저 잡았으니까. 나는 다음에도 한 번 더 그대의 손을 잡을 수 있어.”
“압니다.”
이런 말을 하지 않으면 황제가 좀 더 황제답게 보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서는 알고 있었다. 그가 이렇게 터무니없이 굴 때마다 자신이 조금씩 더 물러지고 있다는 것을.
“그럼 이제,”
그만 손을 놓아달라는 말을 하려던 순간이었다.
“삐이이!”
펑!
닫혀 있던 문이 열리며 피피가 날아들었다.
* * *
“삐이이! 이이!”
라실리아에게 안 좋은 일이 생겼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피피는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삐이이! 삐!”
피피는 요 며칠 데칸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그를 따라다니던 중이었는데, 그러느라 황궁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삐이이. 이이이.”
피피가 작은 머리로 자꾸만 라실리아의 뺨을 문질렀다.
“나는 괜찮아. 다치지 않았어.”
라실리아는 피피가 말하는 걸 알아듣는 표시가 나지 않도록 주의하며 말을 골랐다.
“걱정해 주는구나. 착하게도.”
“삐이이!”
갑자기 홱 고개를 돌린 피피가 레스칼의 앞으로 날아가 손등을 콱 쪼았다.
자신과는 달리 황궁에 있었으면서 대체 뭘 했냐는 뜻이었다.
“내가 할 말인데.”
레스칼이 피피의 목덜미를 붙들었다. 몸이 쑥 들린 피피가 날개를 파닥거렸다.
“네가 할 일은 단 하나다. 나의 반려를 지키는 것. 너야말로 뭘 하고 있었나.”
“삐이!”
데칸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이 들려왔다.
“헛소리. 덜 자랐어도 뭐가 중요한지는 알았어야지.”
“삐!”
다 아는 소리 하지 말라고 성질이었다.
레스칼이 삑삑대는 피피를 침대 위에 툭 떨어트렸다.
“멍청한 애완 새 노릇이나 하겠다면 다시 알로 기어 들어가 잠이나 자. 너를 믿고 방심할 일도 없게.”
“삐이! 삐!”
곁을 지키지 않았던 것은 너도 마찬가지 아니냐며 피피가 핏대를 세웠다.
거기에는 레스칼도 할 말이 없었다.
잠깐 고개를 돌리고 있던 레스칼이 이런 말을 했다.
“역시 다시 옆방으로 옮겨 와야겠어. 그대가 아무리 내게 화가 났어도 내가 곁에 머물러야 해.”
“삐!”
피피가 이제부턴 자신이 지킬 테니 너는 필요 없을 거라고 했지만 레스칼은 그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가서 페르손에게 전해. 지금부터 황후의 옆방을 쓰겠다고.”
“네, 폐하.”
리얀이 제꺽 사라졌다.
명령도 명령이었지만, 세르벤에게 처벌을 피했다는 얘기를 해 주고도 싶었을 것이다.
“삐이이이.”
피피가 투덜대며 라실리아에게 머리를 비비적거렸다. 이제 다시는 떨어져 있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삐? 삐!”
그런데 복수를 덜 한 걸 까먹었다고 했다. 데칸도 황궁에 데려다 놓으라고 했다.
레스칼이 기가 차다는 듯 손바닥보다도 작은 새를 노려보았다.
“데칸은 할 일이 있다.”
“삐!”
“오늘 일의 배후가 누군지 밝혀내야 해.”
“삐이!”
그건 너 알아서 할 일이라고 했다. 사람 하나에 의지할 정도라면 황제 관은 뭐 하러 쓰고 있냐고 빈정거렸다.
“새 주제에 관이 뭔지 아는 척하지 마라. 웃기지도 않으니까.”
둘 사이에서 라실리아는 웃음을 참느라 턱 근육이 당길 정도였다.
둘이 싸우는 건 꿈속에서와 아주 비슷했는데, 태풍이 몰아치고 불꽃이 튀는 그런 일이 없다 보니 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둘 다 하는 짓이 똑같아.’
심장을 잘라 만들었으니 똑같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 그럼……. 저 사람도 피피와 같은 걸까.’
좋아하고 걱정하고 신경 쓰고 더 좋아해 달라며 어리광을 부리는 마음은 사실 같은 걸까.
블루문이 사라졌다고 해서 함께 사라질 본능은 아닌 걸까.
“…….”
피피와 툭탁대고 있는 황제를 바라보는 시선에 죄책감이 섞여 들어갔다.
‘그렇다면 저 사람은 지금 엉뚱한 사람에게 마음을 쏟고 있는 거야.’
그게 왜 이렇게 미안하고 가슴이 아픈 걸까.
하루가 지나 데칸이 황궁에 도착했다.
* * *
데칸의 얼굴에는 곳곳에 상처가 나 있었다.
라실리아가 저도 모르게 피피를 바라보았다. 피피가 우쭐대듯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갑자기 푸드덕 날아가 데칸의 정수리를 콕 쪼았다.
“피피!”
라실리아가 소리를 치자 피피가 이쪽을 돌아보며 날카롭게 울었다.
“삐!”
말리지 말라는 뜻이었다.
데칸은 다 포기한 듯 이마로 흘러내리는 피를 닦으며 한숨처럼 답을 했다.
“괜찮습니다. 이 정도는 당해도 됩니다.”
데칸은 이미 징계를 받았다. 제국 내 유일한 주술사라는 위치가 있으니 은의 방패 일을 완전히 내려놓을 수가 없겠지만, 육 개월 감봉에 한 계급 강등되었다고 했다.
그래도 너그러운 처사였다. 세르벤은 무려 일 년 감봉이었다. 근위대의 말단 기사가 된 것은 물론이었다.
따라서 리얀은 일 년간 세르벤을 먹여 살려야 하는 입장이 되었는데, 의외로 기뻐하는 기색이었다.
리얀의 말에 따르면 그 대가로 세르벤에게 모든 집안일과 잡일을 떠넘길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저택에서 일하는 고용인도 셋이나 해고했다.
“그만큼 당했으면 된 것 같다. 피피, 돌아와. 그만 괴롭히고.”
“삐이…….”
피피가 투덜대며 돌아와 라실리아의 어깨에 앉았다.
남의 얼굴을 포악하게 쪼아 댄 주제에 라실리아에게는 머리를 비벼 대며 귀여운 척이었다.
“감기는 차도가 있으십니까?”
데칸이 고개를 숙인 채 물었다. 몹시 죄송스러워하는 눈치였다.
“삐!”
피피가 병 준 인간이 약 주는 척하지 말라며 윽박을 질렀다.
“피피.”
피피가 또 데칸을 괴롭히러 날아갈까 봐 걱정이 된 라실리아가 피피를 안아서 쓰다듬었다.
“많이 나았다. 그보다 내게 할 말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렇습니다, 황후 폐하.”
데칸은 레스칼에게 보고하기에 앞서 라실리아를 찾았다.
황실 재단사를 조사하며 뭔가 석연치 않은 점을 발견했는데, 라실리아가 겪은 바를 듣길 원했다.
“황후궁의 제1시녀와 시그레스 경이 정확히 어떤 증세를 드러냈습니까?”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지를 잃은 것은 아니었어. 생각하는 방향이 틀어진 것처럼 보였다. 마치 그게 아니면 안 된다는 듯이.”
“그 말씀은 두 사람이 한 말과 같군요. 황실 재단사가 황후 폐하의 옷을 짓기 위해 반드시 치수를 재야 한다고 말하는 순간, 반드시 그래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계속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것만이 목적인 사람들처럼.”
“그렇군요……. 생각을 조종하는 힘을 사용한 게 아닐까 합니다. 그러나 황실 재단사는 평범한 인간이었습니다. 반작용을 몸이 견뎌 내지 못한 걸 보면 누군가 재단사에게 임시로 그 힘을 주입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 힘인데 주술이 아니라고?”
“네. 주술의 흔적은 끝까지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아는 바로는 그런 힘을 가진 주술은 없습니다.”
“주술이 아니라면…… 신성력은?”
“신성력은 주술보다 더 단순합니다. 치유와 회복, 그리고 신의 말씀을 전달하는 게 전부입니다. 사람의 생각을 조종할 수는 없습니다.”
“신성력도 아니라면 마법밖에 없을 텐데…….”
하지만 그것도 답이 될 수는 없었다.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마법진이 필요했다. 마법진을 그리기 위한 마구가 필요했으며, 그것들을 오래도록 다뤄 온 마법사가 있어야 했다.
몇십 년간 착실히 황실 재단사로 살아온 평범한 사람이 갑자기 마법을 쓸 수는 없었다.
“네. 무엇보다 마법은 사물에 작용합니다. 인간의 정신에 직접 침투할 수 있는 마법은 없습니다. 비슷한 효과를 나타내는 것이라면 환각 마법뿐인데, 두 사람 다 환각을 보진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힘이라는 것이로군.”
데칸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서 결론은 하나였습니다.”
“그게 뭔가?”
“고대 마법이 아닐까 합니다.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