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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다친 듯 다치지 않은 다친 것 같은 그대 (40/96)


40. 다친 듯 다치지 않은 다친 것 같은 그대
2023.01.18.



“무슨 일이라니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충혈된 눈으로, 이베트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아무 일 없었습니다. 저는 황후 폐하의 옷을 벗겨 드려야 해요.”

“아니, 치수는 다음에 재겠다. 다들 나가도록.”

“안 됩니다, 황후 폐하! 치수를 재셔야 해요!”

이베트가 울컥 달려들어 겉옷을 잡아당겼다.

찌익!

드레스 어깨 부근이 길게 찢어졌다.


“슈라이든 공녀!”

“좀 가만히 계세요, 황후 폐하!”

찌이익!

옷이 더 길게 찢어졌다.


“당장 그만둬! 왜 이러는 거야!”

“옷을 벗겨 드려야 하니까요!”

힘만으로는 이베트를 말리기가 어려웠다. 양손을 붙잡고 떼어 놓아도 이베트는 기를 쓰고 찢긴 옷자락에 매달렸다.

라실리아가 응접실 문밖을 향해 소리쳤다.


“시그레스 경! 들어와서 이자들을 내보내!”

더 이상한 건 그 다음에 벌어졌다.

라실리아의 목소리를 듣자 세르벤이 응접실로 들어왔다.

황실 재단사가 그의 앞을 가로막더니 이렇게 말했다.


“황후 폐하께서는 치수를 재셔야 합니다. 그래야 옷을 제대로 만들 수 있습니다.”

“아……? 그런……가?”

그 말을 들은 세르벤이 가만히 손을 늘어트렸다.


“시그레스 경?”

“그래야 한다니까요, 황후 폐하. 가만히 계십시오.”

“뭐라고?”

이상했다. 정말로 이상했다.

이베트가 다가와 강제로 옷을 끌어내렸다.


“보세요. 시그레스 경까지 그러잖아요. 황후 폐하께서는 그저 가만히 계시면 됩니다. 제가 다 알아서 할게요.”

다들 뭔가에 홀린 사람들 같았다.

라실리아가 찢긴 옷자락을 도로 홱 빼앗아 들며 이베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슈라이든 공녀. 아니, 이베트.”

“네, 황후 폐하.”

충혈이 됐을 뿐,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은 조금도 주저함이 없었다.

그걸 보니 알 수 있었다.

이베트에게는 자신을 해칠 마음이 없었다. 지금 뭔가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을 뿐이었다.

라실리아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지금은 이베트가 정신을 차리게 해야 했다.


“나는 그대가 하는 짓이 불쾌하다. 다른 이들이 있는 앞에서 내 의사에 반해 강제로 옷을 벗기려 들다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야.”

“그래도 옷을 제대로 만들어야죠. 옷을 벗으셔야 치수를 잴 수 있다니까요.”

“그대는 나를 계속 불편하게 만들 것인가? 그게 그대의 뜻인가?”

“어……? 저는…… 저는 황후 폐하께서 예쁜 옷을 입으시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그런 이유로 내 말을 듣지 않는다면 나는 그대의 시중이 필요 없다. 더 이상 내 시녀가 되지 않아도 된다.”

“어, 그…….”

이베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라실리아는 충혈된 눈동자가 다시 희게 보였다가 다시 붉어지는 기이한 현상을 목격했다. 충혈된 것처럼 보이지만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그게…… 아니, 황후 폐하의 옷을 만들어야…… 저는 그래서…….”

“내 몸에서 손을 떼.”

“저, 저는……. ……아, 안 됩니다!”

어느 순간 이베트가 울컥 소리를 치며 라실리아에게 매달렸다.


“안 돼요! 제게 그러지 마세요! 그러시면 저는……. ……어?”

이베트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왜……. 왜……? 제가 왜…… 이러고 있나요? 황후 폐하 옷이…… 헉, 제가 그랬어요! 제가 폐하의 옷을……!”

이제야 자기가 한 짓을 깨달은 이베트가 경악했다.

그걸 보니 확신할 수 있었다. 방금 전은 정상이 아니었다.

저 황실 재단사도, 세르벤도 제정신이 아니라는 말이기도 했다.


“일단 일어나. 내 뒤에 서 있어.”

라실리아가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이베트를 등으로 감추었다. 이베트는 아직도 자신이 저지른 짓을 믿지 못하고 있었다.


“대체 제가 왜…….”

“저 재단사가 이상한 짓을 하는 것 같아.”

저벅.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세르벤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세르벤의 눈도 이베트와 마찬가지로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황후 폐하. 왜 거부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치수를 재야 옷을 만들 게 아닙니까.”

절그럭.

말을 하면서 동시에 세르벤이 칼자루를 만져 소리를 냈다.

라실리아가 뒤로 손을 돌려 이베트를 감싸며 세르벤을 마주했다.


“그래서? 지금 경은 내 옷을 벗기기 위해 칼이라도 쓰겠다는 말인가?”

“치수를 재려면 어쩔 수 없으니까요.”

“헛소리. 치수를 왜 재야 하는데?”

“그야 황후 폐하의 옷을 만들기 위해서……,”

“그래. 내 옷을 만들기 위함이다. 그 옷을 내가 불쾌하다 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야 하는 이유가 뭔가?”

“아……?”

세르벤이 고개를 갸웃댔다. 뭔가 혼란이 온 모양이었다.


“불쾌하시다면 안 그럴……, ……아니, 치수를 재야 합니다. 치수를 모르면 옷을 만들 수가 없습니다.”

“경부터 정신을 차리도록. 내 옷을 만들기 위해 내게 칼을 들이댄다는 게 말이 된다 생각하나?”

“으음……. 물론 말이 안 되지만…… 아?”

그때 재단사가 소리쳤다.


“치수를 재야 합니다! 반드시!”

이베트가 그랬던 것처럼 흔들리던 세르벤의 눈동자가 다시 붉어졌다.


“그렇습니다, 황후 폐하.”

스르릉!

세르벤이 칼을 뽑아 들었다.


“계속 고집을 피우신다면 제가 대신 벗겨 드리겠습니다. 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가만히 계시면 솜털 하나 긁지 않고 벗겨 드릴 수 있습니다.”

슷!

세르벤의 칼끝이 드레스 위를 움직였다.


“앗! 안 돼요!”

이베트가 무작정 앞으로 달려나와 세르벤의 칼을 손바닥으로 막아서려고 했다.


“안 돼! 이베트!”

라실리아가 이베트를 잡아당겼다.

츳!

어디선가 피가 길게 튀었다.


“아으…….”

손바닥부터 팔뚝까지 길게 베인 이베트가 신음을 내며 주저앉았다.

세르벤은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도 모르는 채 피가 묻은 칼을 라실리아 앞에 들이댔다.


“옷을 벗겨 드리겠습니다, 황후 폐……,”

“말을 들어! 하지 말라고 했다!”

다급해진 라실리아가 세르벤의 눈을 쳐다보며 소리를 쳤다.

아니, 소리를 치려고 했지만 정작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대신 깊었다. 목에 한껏 힘을 주고 내뱉은 말은 제 귀에도 이상한 울림을 남겼다.


“아…….”

……철그렁.

갑자기 몸을 비튼 세르벤이 칼을 떨어트렸다.

그때였다.

똑똑.

닫힌 응접실 문을 황제궁의 시종장이 두드렸다.


“황후 폐하. 지금 황제 폐하께서 드셨습니다. 문을 열어도 되겠나이까?”

지금은 다른 일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문을 열어라.”

“황공하옵니다, 황후 폐하.”

쿵!

문이 양쪽으로 열리는 순간이었다.

세르벤이 칼을 떨어트릴 때부터 이리저리 눈치를 보고 있던 재단사가 다급히 시종장의 앞을 막아섰다.


“문을 닫으십시오. 황후 폐하께서는 지금 옷을 벗고 치수를 재셔야 합니다.”

“으음……? 아, 그렇다면……,”

시종장이 도로 문을 닫으려고 했다.

휙!

그때 레스칼이 손을 뻗어 재단사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폐, 폐하! 어찌 그러시는지요!”

다들 놀라 레스칼을 바라보았다. 레스칼이 허공으로 들어 올렸던 재단사를 바닥에 팽개쳤다.


“붙들어. 제 손으로 죽지 못하게 해.”

“네, 네? 네, 폐하?”

다음 순간 레스칼은 라실리아의 앞에 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칼과 당황해 몸이 굳은 세르벤, 그리고 피 흘리는 시녀를 바라본 레스칼이 세르벤을 뒤로 잡아챘다.

퍽!

그 언젠가처럼 세르벤이 휙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등을 호되게 부딪친 세르벤이 두 다리로 서 있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괜찮나?”

레스칼이 라실리아를 붙들었다.


“네. 옷이 조금 찢겼지만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애써 유지하고 있던 침착함이, 레스칼에게 붙들리자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라실리아가 비틀대다 레스칼의 어깨에 머리를 댔다. 그가 쥔 손이 덜덜 떨리는 게 느껴졌다.

레스칼이 라실리아의 등을 쓸어내렸다. 착각이 아니라면 그의 손도 떨리고 있는 것 같았다.


“괜찮지 않아 보여.”

 

 


“아닙니다. 다친 데도 없고……. ……아, 슈라이든 공녀. 공녀가 다쳤습니다.”

이베트가 다친 팔을 쥔 채 고개를 흔들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다쳐도 조금 다쳤어요. 이 정도는 예전에도 다쳐 봤습니다.”

“괜찮다고 할 게 아니다. 어서 치료를 받아야 해.”

레스칼이 이베트를 향하는 라실리아의 고개를 다시 제게로 돌렸다.


“그대는.”

“네?”

“그대는 치료를 받지 않아도 되나?”

“아……. 저는 다치지 않았습니다.”

“다쳤어.”

“아니요. 다치지 않았,”

“다쳤어. 보이지는 않아도 다쳤을 것이다.”

레스칼은 계속 다쳤다고 우겨 대며 라실리아의 몸을 안아 들었다.

라실리아가 당황해 그의 어깨를 쳤다.


“이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손을 떨고 있다. 다쳐서 그런 거야.”

“아니요. 이건…… 놀라서,”

“그래. 그러니까 다쳐서.”

라실리아를 안은 레스칼이 침실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그 전에 그가 세르벤을 보며 짧게 한마디 남겼다.


“리얀을 불러와.”

세르벤을 상대하지 않겠다는 말이기도 했다.


“……네, 폐하.”

세르벤이 죽을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오늘 벌어졌던 이상한 일을 뒷수습하는 것은 리얀의 몫이 되었다.

* * *



“재단사는 상태가 안 좋습니다, 폐하.”

리얀이 이가 갈리는 걸 참으며 말했다.


“내가 그렇게 만들었나?”

“아니, 절대 아닙니다. 눈을 뒤집고 입으로는 보라색 거품을 흘렸습니다. 주술의 반작용과 비슷해 보이는데, 데칸의 말로는 주술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지금은 간신히 숨만 쉬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시 사람 구실을 하기가 어려워 보입니다.”

“그렇다면 주술이 아니라는 말인가?”

“주술과 비슷하지만 주술은 아닌…… 그런 것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폐하.”

“…….”

레스칼이 대답 대신 관자놀이에 핏대를 세웠다.

누군가가 황실 재단사를 이용해 황후에게 손을 대려고 했다.

정확한 목적은 알 수 없었다. 치수를 다시 잰다는 핑계로 옷을 벗기려고 들었다는 것만 알 수 있을 뿐이었다.


“이곳에 오기 전 접촉한 자는?”

“데칸이 알아보는 중입니다. 소식이 오는 대로 전해 드리겠습니다.”

“서두르라고 전해라. 오래 기다릴 생각은 없으니.”

리얀이 허리를 반듯하게 숙였다.


“물론입니다, 폐하. 데칸도 잘 알고 있습니다.”

“황후의 호위는 골랐나?”

“명단을 추렸습니다. 직접 확인하시겠습니까?”

“오늘 밤에 확인하겠다.”

“알겠습니다.”

레스칼이 있는 곳은 라실리아의 침실이었다. 방금 전 사건이 벌어진 뒤로 레스칼은 라실리아의 곁을 떠날 생각이 없었다.

리얀의 머릿속은 황후에게 할 말과 숨길 말을 골라 대답을 하느라 바쁘게 굴러가는 중이었다.


“그럼 시그레스 경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레스칼이 곁에 있는 동안 침대에 누운 채 가만히 있기만 하던 라실리아가 물었다.


“……자는 줄 알았는데.”

레스칼이 고개를 돌려 라실리아를 쳐다보았다.

그야 자는 척을 하긴 했다. 황제가 곁에 있는 게 불편했으니까. 게다가 지금은 감기가 다 낫지 않았다고 알려진 상태였으니까.

그렇다고 뻔한 일을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잠이 깼습니다. 시그레스 경은 징계를 받게 되나요?”

“그래.”

레스칼이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가벼운 고갯짓이 왠지 무거워 보였다.


“그대에게 칼을 세웠다. 다시는 궁 안에서 마주칠 일은 없을 것이다.”

라실리아의 눈이 리얀을 향했다. 리얀은 괴로운 표정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멍청하게 주술 아닌 주술 같은 그것에 걸려든 건 세르벤이었지만 결과는 꽤 혹독했다. 그나마 처형장으로는 가지 않는 게 레스칼의 마지막 자비였다. 남매로서 마음이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저는 시그레스 경의 처벌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라실리아가 차분한 음성으로 이런 말을 했을 때, 리얀은 진심으로 놀랐다.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황후 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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