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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성자 말리크 (39/96)


39. 성자 말리크
2023.01.15.



“아……. 뭐라고?”

아주 나른한 목소리였다.

얼핏 듣는 목소리는 미성이었지만, 나긋하고 느슨한 느낌 덕에 나이를 짐작하기 어렵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후작이 발을 뺐어?”

“그러하옵니다, 성자시여.”

“나 참. 그깟 새똥 좀 맞았다고.”

성자라 불린 미성의 청년이 콧등을 찌푸렸다.

미성만큼이나 외모도 미끈했다. 보고 있으면 저도 모르게 홀릴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까요? 후작의 입을 통하지 않고서는 황후의 비밀을 알아낼 방도가 마땅치 않습니다.”

청년의 앞에 공손히 두 손을 모은 자들은 고위 신관들이었다.

이상한 모양새긴 했다.

신관만큼 계급체계가 엄한 곳도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집을 떠나 종제로 십 년이 넘게 고생하다 사제가 되고, 다시 고달픈 사제 생활을 이십 년쯤 하면 신관이 될 수 있었다.

고위 신관의 자리는 열세 개로 정해져 있었다. 즉 열셋 중 누구 하나가 죽지 않고서야 고위 신관이 될 일은 없었다.

따라서 고위 신관들은 대부분 평생을 신전에서 버텨 온 꼬장꼬장한 늙은이들이었고, 제 밑의 신관들은 발닦개 정도로 여기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청년 앞에서는 고위 신관들이 낡은 발닦개가 된 느낌이었다.


“아……. 비밀이 뭔진 대충 알고 있어. 그런데 여긴 신전이고 너희들은 신관이잖아? 대뜸 여자 속옷을 벗겨 보자고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냐. 자칫 변태라고 오해를 사면 어떡해.”

“네……? 소, 속옷……이라고 하셨습니까?”

어리둥절해하는 고위 신관들을 보며 청년이 기름칠을 한 것처럼 매끄럽게 웃었다.


“응. 일단 벗겨 보면 알 거야. 어떻게 벗길 방법이 없으려나.”

고위 신관들이 난처한 눈짓을 주고받으며 허리를 숙였다.


“그런 일이라면 저희들은 잘…….”

“응, 알아. 너희들이 딱히 쓸 만하리라고는 기대 안 했어. ……아, 그래도 하나는 알려 줘. 황족의 옷을 벗기려면 어떻게 해야 해?”

“그거야…… 옷이라면 매일 갈아입을 테지요.”

“쯧. 갈아입는 것 말고. 벗길 일이 있어야 한다니까?”

“그것은……. 으음…… 그러니까…….”

한참 늙은 머리들을 맞댄 끝에 방법이 하나 생겨났다.

옷을 새로 지을 때라면 옷을 벗을 일도 종종 있었다.

그리고 때마침 황궁에는 황후의 새 옷을 맞추기 위해 황실 재단사가 매일 바쁘게 오간다는 얘기가 있었다.


“그래. 그거면 되겠어.”

청년이 눈을 반짝 빛냈다.

평소에는 연두색에 가까운 밝은 초록색 눈이 이럴 때는 잠깐 금빛을 드러냈다.

그러나 청년이 있는 곳은 매우 어두웠고, 청년을 어려워하는 고위 신관들의 노안은 찰나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황실 재단사를 데려와. 준비를 시켜야 하니까 가급적 빨리. 그리고 황궁에서는 모르게.”

고위 신관들이 난처한 얼굴을 했다.


“최선을 다하겠으나 그건 좀 어려울지도 모르겠습니다. 재단사가 스스로 신전에 협조한다고 나서지 않는 이상은……. ……게다가 왠지 황제가 이쪽에 눈을 하나 대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나 참. 쓸모를 기대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자마자 이렇게 나오다니. 알았어, 그럼. 내가 알아서 하지. 다들 나가 봐.”

“성자시여. 알아서 하신다는 게 어떤 뜻이온지……,”

청년이 기름 같은 미소를 지우고 표정을 싹 바꾸었다.


“그걸 꼭 물어야겠어?”

“헛……, 아, 아닙니다. 묻지 않겠습니다.”

웃음이 사라지자 청년은 더 이상 느슨해 보이지도, 나른해 보이지도 않았다. 얼음으로 빚은 괴수처럼 섬찟했다.


“나가. 그리고 내 아이들더러 오라고 해.”

“……알겠습니다.”

고위 신관들이 뒷걸음질로 청년의 방을 떠났다.

잠시 후 흰 갑옷을 걸친 자들이 청년의 앞에 나타났다.


“부르셨습니까, 아버지.”

“그래.”

부츠며 망토며 온통 하얀 가운데 왼쪽 가슴에만 핏빛 십자가를 그려 넣은 차림새는 기사라기보다는 오히려 광신도들 같았다.


“황실 재단사를 잡아와. 협조하게 만들어야 하니까 식솔을 인질로 삼아라. 인질은 하나면 돼. 나머지는 보는 앞에서 죽여. 그래야 말을 잘 들으니까.”

“명을 받습니다.”

기사들이 무릎을 굽혔다.


“진실을 아는 자들의 아버지, 성자 말리크시여.”

  

  

* * *



“폐하께서는 지금 돌아가셨습니다.”

이베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대외적으로 라실리아는 지금 혹독하게 감기를 앓는 중이었다. 두 달간 옆방을 쓰기로 했던 황제는 반강제적으로 황제궁으로 돌아갔다.

뻔뻔하게 약속을 내세울 시점이 아니라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은 듯했다.

하지만 돌아갔다는 말이 무색하게 황제는 하루에 대여섯 차례씩 황후궁을 찾아왔다.

명분은 병문안이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번번이 거절을 당했다.

그 탓에 황궁에는 지금 폐하가 가여워서 못 봐주겠다는 목격담들이 끊이질 않았다.

이베트도 그 사람들 중 하나였다.

생김새로만 치면 황제는 감히 거절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는 인간들의 목을 성둥성둥 잘라 버릴 것처럼 생겼는데, 정작 황후가 병문안을 거절했다는 말을 들을 때면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아무 말 없이 돌아섰다.

평소와 비슷한 무표정에 눈꼬리만 떨구는 게 오히려 더 안타까웠다.


“저어…… 그새 기침이 많이 주셨어요, 황후 폐하.”

이베트가 용기를 내어 말을 꺼냈다.


“그러니까 저어…… 황제 폐하가 병문안을 오셔도 될 것 같고 그런데…….”

“아직 아니야.”

라실리아는 일부러 차갑게 말을 잘랐다.

지금은 황제를 보지 않는 게 더 나았다.


“아……. 그러시군요. 알겠나이다.”

이베트가 시무룩해진 얼굴로 고개를 내렸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어쩐지 그 얼굴에 미안함이 느껴졌다.


“공녀도 혹시 감기가 옮을지 모르니 나가 있는 게 좋겠군. 나는 혼자 있겠다.”

그러자 이베트가 화들짝 놀라 양손을 내저었다.


“앗! 무슨 말씀이세요, 황후 폐하. 편찮으신데 당연히 돌봐드릴 사람이 있어야죠! 제 입이 문제라면 앞으로는 한마디도 먼저 꺼내지 않겠습니다!”

“그 정도 말은 해도 된다. 그것과는 별개로 내가 마음이 편치 않아서 그래. 필요하면 부를 테니 그전까지는 편히 있도록. 동생들을 돌볼 시간도 필요하지 않나?”

“아……. 그렇다면, 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황후 폐하.”

라실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베트는 침실을 나가면서도 연달아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황후 폐하, 제가 필요하시면 언제라도 꼭 부르셔야 합니다. 꼭이요.”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렇게 할 테니.”

“네. 잊지 마세요.”

이베트가 미적미적 침실을 나섰다.

혼자가 된 라실리아가 혼란해진 감정을 다독였다.


“문제가 커지기 전에 돌아가야 해……. 델라르타에서 신관이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어.”

지금은 먼저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이 생겼다.

피피에게 부탁을 하면 새들이 편지를 전해 줄지도 몰랐다.

그러나 썩 내키지 않는 방법이었다.

마차로도 두 달씩이나 걸리는 먼 길은 새들에게도 고될 것이다. 그리고 엘리아든을 떠나기 위한 방법을 피피에게 부탁한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싫어할 것 같아. 어떤 편지인지 알게 되면. 그렇다고 피피에게 거짓말을 할 수도 없고.”

자신이 가짜라는 걸 알게 되면 피피는 어떻게 할까.

화를 낼까. 슬퍼할까. 아니면 진짜 반려를 찾으려고 들까.

아직 한 달도 안 되는 시간을 남의 몸으로 지냈을 뿐인데 벌써 손에서 놓기 힘든 것들이 생겼다.

다시 그 창문 없는 어둡고 고요한 방에 틀어박히면 여기 있는 것들이 생각날 것이다. 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도 그리울 것이다.


“그래도 그 방법밖에 없어.”

피피는 영리한 새니까 언젠가는 자신의 처지도 헤아려 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라실리아가 델라르타의 대신관에게 보낼 편지를 쓰려고 침대에서 일어나던 중이었다.

똑똑!


“황후 폐하.”

방금 전 침실을 나갔던 이베트가 돌아왔다.

그새 뺨이 발긋했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던 모양이었다.


“편찮으신 건 아는데요…… 급한 일이라서요. 황실 재단사가 그때 쟀던 치수가 잘못된 것 같다면서 알현을 요청했습니다.”

“음……?”

라실리아가 순간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그렇게 급한 일이었나?’

이베트는 양손을 꼭 모은 채 이쪽을 바라보았다. 거절하시지 말라는 의미 같았다.


“재단사에게 내가 감기에 걸렸단 말을 하지 않았어?”

“물론 그렇긴 한데요, 그래도 치수를 재어 가지 않으면 옷을 만들 수가 없으니까…… 어, 그럼 그만큼 황후 폐하의 새 옷이 늦어지는 거잖아요.”

“……그렇다면.”

잠깐 치수를 다시 재는 정도야 괜찮을 것이다.

황제에게는 감기가 심각하다 했지만 사실 이베트의 말대로 거의 다 나았다.


“그럼 응접실에서 보겠다.”

“네, 네! 황후 폐하!”

이베트의 목소리가 한결 밝아져서 들려왔다. 황실 재단사를 거절하지 않은 일이 정말로 기쁜 듯했다.

* * *



“그새 치수가 많이 달라지셨습니다, 황후 폐하.”

황실 재단사의 말이었다.

굵기가 다른 줄자를 팔에 주렁주렁 감아 든 그가 여기저기 꼼꼼히도 몸을 재었다.


“이래서는 옷이 제대로 나오지 않습니다. 전부 다시 재야겠습니다.”

“그런가.”

재단사가 그렇다니 그런가 보다 할 뿐이었다.


“외람되오나 겉옷을 벗어 주셨으면 합니다. 수치를 재야 하니.”

“겉옷을……?”

이전에 왔을 때는 없던 요구였다.

라실리아가 새삼스럽다는 듯 황실 재단사를 바라보았다.

분명 같은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그 역시 이베트처럼 뺨이 붉어져 있었다.


“아, 그렇군요. 황후 폐하, 팔을 벌려 주시면 제가 벗겨 드리겠나이다.”

이베트가 냉큼 다가왔다.

라실리아가 고개를 흔들었다.


“잠깐만, 공녀. 겉옷을 벗으라니. 그게 꼭 필요한 일인가? 그리고 황실 예법과도 맞지 않은 일이라 생각되는데.”

“어……? 아, 그렇네요. 황족의 의복에 손을 댈 수 있는 자라면……,”

그때 재단사가 끼어들었다.


“아니옵니다, 황후 폐하. 옷을 만드는 데 꼭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자 이베트도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맞아요. 황후 폐하의 옷을 만드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니까요! 예법에는 어긋날 테지만 저만 알고 있으면 되지 않을까요? 그럼 단추를 풀겠습니다, 황후 폐하.”

“슈라이든 공녀. 나는 아직 동의하지 않았,”

툭!

이베트가 성급하게 손을 놀리는 바람에 윗 단춧구멍 부근이 벌어지며 단추가 떨어져 나갔다.


“어마. 그러게 가만히 계셨으면 됐을 텐데. 팔을 들어 주세요, 황후 폐하.”

“공녀……?”

이쯤 되면 뭔가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평소의 이베트라면 절대 이렇게 행동할 리가 없었다. 단추 하나가 떨어진 건 별 일 아니라고 해도 엄청나게 죄책감을 느꼈을 것이다.


“옷을 놓고, 나를 봐. 재단사를 불러오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무슨 일…….”

이쪽을 보는 이베트의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바느질을 너무 열심히 해서라고 하기엔 수상할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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