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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진짜 협박 (38/96)


38. 진짜 협박
2023.01.11.



 


“무슨 짓입니까!”

라실리아가 레스칼을 밀어냈다.

엉겁결에 몸이 떠밀린 레스칼은 몹시 억울한 표정이었다.


“그대가 먼저 안았는데.”

“네? 뭐라고요?”

“정말이다. 그대가 먼저 내 팔을 붙잡았어.”

그리고는 두 팔을 뻗어서 안았다는 변명이 이어졌다. 레스칼은 어쩔 수 없이 라실리아를 마주 안아야 했다.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을 두 번씩이나 강조하는 레스칼을 라실리아가 인상 쓴 얼굴로 응시했다.


“애초에 왜 제 방에 오셨습니까? 당분간 보지 않겠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레스칼이 대답이 곤란한 사람들이 그러듯 잠시 시선을 다른 데로 돌렸다.


“그건…… 그대가 잠이 들었다고 하니까.”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러니까 엄밀히 말하면 그대의 뜻을 어긴 건 아니야. 서로 얼굴을 보는 일을 피하자고 했잖아. 하지만 나만 그대를 보는 거니까……,”

“말장난입니다, 폐하.”

“…….”

레스칼이 입술을 실룩였다. 할 말이 없다는 뜻이었다.

라실리아가 이불을 끌어올리며 침실 문을 가리켰다.


“나가 주세요. 감기입니다. 폐하께 옮기고 싶진 않습니다.”

“그런 거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나는 감기에 걸리지 않는다.”

“그건 모르는 일입니다.”

“한 번도 걸린 적이 없는데.”

“믿지 못하겠습니다. 나가 주세요.”

“믿어도 돼. 걸린 적도 없고, 걸려도 괜찮아.”

“제가 안 괜찮습니다.”

라실리아가 다시 문을 가리켰다.


“나가세요. 편히 쉬고 싶습니다.”

“……그대가 먼저 좋다고 했는데.”

“나가세요.”

“…….”

레스칼이 마지못해 미적미적 몸을 일으켰다.


“나가기 전에 뭐 하나 물어도 되나?”

몸을 일으키고 나서도 쉽게 미련을 떼어내지 못했다.


“그냥 나가시는 게 더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라실리아는 그게 불편했다. 특히나 마족이 나오는 꿈을 꾸고 난 다음이면 황제를 마주하는 게 더 어려워졌다.

자꾸만 쓸데없는 감정을, 알고 싶지 않은 감각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아직도 화가 났군.”

그런 척하기로 했다. 그를 피할 수 있으면.


“네.”

“……그렇다면.”

황제가 묘하게 어깨선을 늘어트린 채 등을 돌렸다. 그림처럼 근사한 의복이 한쪽만 확연히 구겨져 있었다. 옆으로 누운 채 제 몸을 꼭 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빨리 화가 풀리길 바라지.”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라실리아가 냉정한 말을 던졌다. 레스칼의 어깨선이 그만큼 더 아래로 내려갔다.


“가 보겠다. 한시라도 빨리 낫기를.”

“…….”

일부러 답을 하지 않았다.

……탁.

아주 느린 문 소리가 마음을 괴롭혔다.

* * *



“몸이 편찮으신데 어찌…….”

다음 날이 되자 기침은 한층 더 심해졌다. 말 한마디를 할 때마다 목이 너무 아파 계속 꿀을 넣은 차를 마셔야 했다. 그러다 보니 배가 너무 불러서 입맛도 사라질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파샤드 후작 부인을 만나는 일을 미룰 수는 없었다.

사실 후작 부인은 라실리아가 내내 기침을 멈추지 못해 황후궁의 알현실에서 세 시간이나 기다려야 했다.

알현실의 등받이 없는 의자란 몹시 불편하기 마련이었다.

세 시간의 기다림 끝에 라실리아가 나타났을 때, 후작 부인은 지치다 못해 심통이 난 상태였다.


“……어찌 부르셨나이까.”

후작 부인의 눈이 힐긋, 곁눈질로 라실리아의 눈치를 살폈다.

사실 후작 부인에게는 일을 이렇게까지 크게 만들 생각이 없었다.

황후의 비밀을 알고 있는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 비밀은 이미 사라졌다. 황후가 수로에 빠졌던 날, 옷을 갈아입혀 주던 후작 부인은 표식이 되살아난 것을 똑똑히 보았다.

일을 이렇게 크게 만든 건 등신 같은 주제에 성격만 급한 남편이었다.

제 부인이 시녀장 자리에서 밀려나는 것도 모자라 집으로 쫓겨 나왔다는 말에 후작은 다짜고짜 황제궁으로 튀어갔다.

그러나 쩔쩔매며 나타나야 할 황후는 보이지도 않았고, 황제는 황후의 비밀에는 관심도 없었다. 오히려 비밀 운운하는 그가 무례하다며 근위대를 시켜 궁 밖으로 끌어냈다.

자존심은 둘째치고 손해가 막심했다. 그간 후작 부부는 황후궁의 제1시녀라는 자리가 안겨 주는 권력 놀음에 너무 취해 있었다. 이걸 하루아침에 고스란히 반납하라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사이 신전에서 발 빠르게 움직였다. 말을 빙빙 돌리긴 했지만 황후의 비밀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게 확실했다. 후작은 냉큼 내일 당장 신전을 방문하겠다는 답을 보냈다.

후작 부인이 더 이상 황후에게 비밀이 없다는 걸 알렸을 땐 이미 늦었다.

부부는 머리를 싸매고 고민을 거듭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다시 제1시녀로 돌아가려면 황후의 비밀을 쥐고 협박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래서 모험을 하기로 했다. 신전과 손을 잡는 척 나서면 몸이 단 황후가 알아서 먼저 항복을 해 올 것이다.

황후는 제 표식이 완전히 돌아온 사실을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그러니 모험이 통할 것이다.

어쩌다 보니 사고가 생겨 신전에 가는 길이 늦춰졌지만 오히려 잘된 일일 수도 있었다.

그럴수록 황후는 더 안달복달을 할 테니까.

당장 오늘 궁으로 불러 댄 것부터 그 증거였다.

차르륵!

후작 부인이 깃털 부채를 펴서 입매를 감추었다.

어차피 오늘은 제가 이길 싸움이었다. 그렇다고 벌써부터 웃는 얼굴을 들킬 수는 없었다.


“이 몸에게 벌을 주어 내쫓으신 사실을 잊으신 건 아니겠지요, 황후 폐하.”

“아, 쿨럭, 그래. 잊지 않았다. 벌을 받아야 할 사람이 신전에 간다고 해서 이유가 궁금하던 참이었다.”

후작 부인이 부채 너머에서 씩 웃으며 발목을 꼬았다.

자신에게 절절맬 황후가 눈에 보이는 듯했다.


“네, 황후 폐하. 대신관께서 황후궁의 제1시녀였던 이 몸에게 퍽 많은 관심을 지니고 계셨지 뭡니까.”

“그랬군.”

“네, 아주 관심이 많으셨지요.”

“그래.”

“……?”

탓!

후작 부인이 부채를 접었다.

감기가 심하게 들었다는 황후는 열이 올라 뺨이 붉었다. 이마에 식은땀이 흐르는 걸 보면 아픈 게 확실했다. 그런 몸으로 자신을 불렀으면 당연히 몸이 달아서일 텐데 왜 저렇게 태연해 보이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떤 관심인지 제 입으로 직접 말씀을 올릴까요?”

참다못한 후작 부인이 먼저 얘길 꺼냈다.


“아니. 몸이 좋지 않아 긴 얘기는 피하고 싶군. 그대의 개인사는 나중에 듣도록 하지.”

“……네?”

어이가 없는 정도가 아니었다.

후작 부인이 부채를 쥔 손을 부르르 떨었다.


“그럼 저를 대체…… 왜 부르셨습니까?”

“신전에 가던 길에 사고가 났다고 들었다. 무사한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야 지금 보시는 대로 무사합니다.”

“새가 사고를 냈다던데. 맞나?”

“네, 맞습니다. 그게 궁금하셨습니까?”

“어떤 사고였지?”

“갑자기 새들이 달려들어 말을 쪼아 대는 통에 말이 길을 잘못 들었습니다. 마차 바퀴가 돌에 부딪혀 망가졌지요. ……정말 이게 궁금하신 게 맞습니까?”

“그래. 정말 다행이었네. 평탄한 길이 아니라 절벽 같은 곳을 가다가 그런 일이 있었으면 그저 고생하는 정도가 아니었겠군.”

“네, 그야…… 신이 보살피셨겠지요. 천만다행이었습니다만……?”

황후가 창백한 얼굴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고, 후작 부인은 영문을 몰라 황후를 보며 눈을 끔벅댔다.

그때였다.

똑똑.


“황후 폐하. 말씀하신 것을 가져왔습니다.”

알현실의 문이 울렸다.

알 것 같은 목소리에 후작 부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분명히 그 궁인이었다.


“들어와.”

“네, 황후 폐하.”

공손히 문을 열고 들어온 궁인은 빈손이었다. 대신 어깨에 무언가가 올라가 있었다.


“아, 아닛!”

콰당!

놀란 소리를 내지른 후작 부인이 등받이 없는 의자와 함께 바닥을 뒹굴었다.


“엣헴. 이게 무슨 추태입니까, 파샤드 부인. 황후 폐하 앞에서 몸가짐을 바로 하지 않으시고.”

“무, 무슨…….”

후작 부인이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이베트의 어깨를 가리켰다.

점잖게 후작 부인을 꾸짖은 슈라이든 공작이 사뿐히 날아 라실리아의 발치에 앉아 고개를 꾸벅 숙였다.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엣헴, 오늘도 이루 말할 수 없는 영광이옵니다.”

단순히 새가 똑 부러지게 말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놀란 게 아니었다.

후작 부인은 저 커다란 앵무새를 본 적이 있었다.

바로 어제, 신전으로 가는 길에.

갑자기 새떼가 들이닥쳐 마차를 까맣게 덮었을 때 저 앵무새 한 마리가 유독 눈에 띄었다. 덩치도 그렇거니와 샛노랗고 새파란 깃털에 새빨간 부리는 너무 인상적이었다.


“와 주어서 고맙네. 편히 있도록.”

“황송하옵니다, 황후 폐하.”

말을 마친 앵무새가 푸드덕 날아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에 앉았다.

끼익, 끽.

끼이익, 끽.

수정을 잔뜩 달아 거대한 샹들리에가 삐걱삐걱 흔들리기 시작했다.

왠지 섬뜩한 기분이었다. 후작 부인은 이상하게도 저 샹들리에가 제 머리 위로 똑 떨어질 것만 같은 불안감을 느꼈다.
 

 


“그, 그 새는…… 왜…….”

“보여 주고 싶어서.”

“제, 제게 말입니까?”

“봐서 알겠지만 재주가 많은 새야. 고맙게도 내 말이라면 뭐든 들어주기도 하고. 아, 어제 신전으로 가던 길에 난 사고는 새들이 냈다고 했지. 혹시 어떤 새였는지 기억은 하나?”

“그…… 그것이…….”

후작 부인이 새파랗게 질렸다.


“유감이야. 앞으로 그대는 새들을 조심해야겠군. 어떤 새가 어떤 사고를 일으킬지 모를 테니.”

“무, 무슨 말…… 마, 말씀을 그렇게…….”

“공.”

황후는 구구절절 말을 하는 대신 보라는 듯 앵무새를 가리켰다.

앵무새가 주렁주렁 늘어져 있는 수정의 자그마한 이음쇠를 부리로 콕 쪼았다.

퍽!

수정은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져 요란한 소리를 냈다. 후작 부인의 발이 덜덜 떨렸다. 수정이 조금만 오른쪽으로 향했다면 제 머리에서 저런 무서운 소리가 들렸을 것이다.


“새는 어디에나 있지. 그리고 이 새는 새들을 부릴 줄 알고. 정말 놀라운 일이지 않나?”

후작 부인의 입술이 핏기가 사라져 보랏빛이 되었다.


“그건, 그건 지금 제게…….”

“앞으로 어딜 다닐 때 조심하라는 충고다. 어제 사고로 그대가 무사한 건 참 다행이야.”

“…….”

후작 부인이 입을 다물었다.

황후가 지금 자신을 협박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탓이었다.

잔혹하고 변덕스러웠지만 비위만 잘 맞춰 주면 제 말을 잘 따랐던 황후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보였다.


“무사한 걸 확인했으니 됐다. 집까지 무사히 돌아가도록.”

라실리아가 몸을 일으켰다.


“황후 폐하. 아직 혼자 걸으시면 아니 됩니다.”

이베트가 재빨리 곁으로 다가와 팔을 붙들어 주었다. 라실리아가 이베트의 어깨에 머리를 살짝 기대며 걸음을 이었다.


“고맙다.”

“송구합니다, 황후 폐하. 당연한 제 일이니 공연한 말씀은 넣어주세요. 감기로 목도 아프시면서.”

라실리아와 이베트가 다정한 자매처럼 알현실을 빠져나갔다.


“엣헴! 제게 에스코트할 영광을 주시지요!”

슈라이든 공작이 푸드덕 두 사람의 뒤를 따라갔다.


“…….”

후작 부인이 그새 핼쑥해진 얼굴로 빈 알현실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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