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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감기 (37/96)


37. 감기
2023.01.08.


탕탕!

방금 떠오른 생각을 깨부술 것처럼 욕실 문이 울렸다.


“황후 폐하! 폐하께서 드셨습니다!”

욕실 밖에서 당황한 궁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엇, 폐하께서 오셨대요! 문을 열까요, 황후 폐하?”

이베트가 몸을 일으켰다. 라실리아가 다급히 이베트를 말렸다.

목욕 중이라는 것은 둘째치고, 여기서 도망칠 생각을 하고 있는 와중에 황제를 마주하는 것은 피하고 싶었다.


“아니. 목욕 중이라 곤란하다 해라.”

“엇, 그래도……. 알겠나이다.”

이베트가 욕실 밖으로 나갔다. 뭔가 얘기가 이어지는 듯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라실리아가 눈살을 찌푸린 채 계속 천장을 응시했다.

하던 생각을 마저 잇고 싶었지만 방해는 황제만 하는 게 아니었다.


“삐이이이잇!”

이번에는 창문으로 피피가 날아왔다. 작은 부리로 창문을 콕콕콕콕 찍어 대는 게 열어 주기 전까지는 절대 물러서지 않을 기세였다.


“무슨 일이니?”

라실리아가 욕조에서 일어서서 창문을 열었다.


“삐잇!”

후다닥 달려든 피피가 뭐라고 떠들어 대며 주변을 빙빙 맴돌았다.


“아……? 그 얘긴 또 어디서 들었어?”

“삐이! 삐!”

피피는 정원에서 있었던 일을 듣고 화가 나 있었다. 오늘도 피피는 슈라이든 공작과 함께 사냥 연습 중이었는데, 라실리아에게 벌어진 일을 듣고는 화가 머리 끝까지 올라 날아왔다.


“와……. 그렇게 먼 거리를? 벌써 혼자 날 수 있게 된 거야?”

“삐!”

말 돌리지 말고 그 괘씸한 인간을 어떻게 처리할지나 얘기하라고 했다.


“실수였대. 본인도 당황해하던걸.”

“삐이이!”

실수는 그놈 문제고, 자신은 봐줄 수 없다고 했다.


“괜찮아. 옷이 젖었을 뿐이야. 그때처럼 완전히 물에 빠진 것도 아니고. ……아, 그러고 보니 여기 와서는 물에 관련한 사고가 잦네.”

“삐이? 삐!”

“아니, 정말 괜찮아. 그때도 실수였어.”

“삐! 삐잇!”

“정말이야. 그러니까 아무 일도 하지 마. 그 사람은 주술사래. 네가 혹시 다치기라도 하면 어떡해?”

“삐이이잇!”

피피가 자신이 당할 리가 있겠냐며 날개를 파득파득 저어댔다. 그러더니 자기가 알아서 하겠다며 다시 쌩 날아가 버렸다.


“아. 이제 정말 잘 나네. 아직 저렇게 작은데.”

아직도 한참 작은 피피는 벌써 보이지도 않았다.


“아니, 근데 이런 걸 감탄하고 있으면 안 되잖아. 피피가 다칠지도 모르는데.”

어쩔 수 없이 황제에게 부탁을 해야 했다.

라실리아가 몸에 젖은 수건을 두른 채 욕실 문을 열었다. 이베트를 시켜 황제에게 말을 전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아…….”

“…….”

그러나 맹세코, 황제가 아직도 그 자리에 있을 줄은 몰랐다.

황제와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둘 다 굳어 꼼짝도 하지 못했다.


“화, 황후 폐하! 왜 저를 부르시지 않고……,”

같이 굳어 있던 이베트가 뒤늦게 당황해 허둥지둥 말을 꺼냈다.


“그러게……. 아직도 계신 줄 몰랐습니다. 차림새가 적당치 않으니 문을 닫겠습니다.”

정신을 차린 라실리아가 등을 돌리며 문을 홱 닫았다.


“잠깐만.”

탁!

황제가 반대편에서 문을 잡았다. 어깨 너머로 시선을 내리자 문틈에 낀 손이 보였다. 아플지도 몰랐다.
 

 


“얘기만이라도. 문을 열라고는 안 할 테니.”

“……일단 손부터 빼십시오. 다칠지도 모릅니다.”

“그대가 얘기를 듣는다면 그렇게 하겠다.”

“알았으니 손을 치우세요.”

문틈에 낀 손이 천천히 사라졌다. 라실리아는 딱 그만큼의 틈을 남기고 문을 열어 두었다.

황제가 느릿느릿 얘기를 시작했다.


“그게……. 그러니까 내가……. 데칸이 한다는 게 그런 방식일 줄은 몰랐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황제는 정원에서 벌어진 일을 사과하는 중이었다.


“믿어 줘. 정말로 내가 뜻한 게 아니……,”

“실수라 했습니다. 저 또한 그렇게 알고 넘어가기로 한 일입니다.”

“실수라 해도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이미 벌어진 일을 어쩌겠습니까. 그리고 별일 아니었습니다. 물에 젖은 것뿐이고.”

“아니, 그렇지 않아. 어떻게 별일이 아닐 수 있는데. 내 잘못이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어.”

쿵.

뭔가가 문에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어쩐지 황제가 제 이마를 욕실 문에 대고 있을 것 같았다.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하나? 그대의 화를 풀려면.”

화가 났단 말은 하지도 않았는데.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화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럴 리가. 지금도 나를 피하고 있잖아.”

피하고 있는 건 맞았지만 다른 이유에서였다.


“……네. 말씀드렸듯이 지금은 제 차림새가 부적절하니까요.”

“그래서 목욕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다. ……옷을 입으면 피하지 않을 건가?”

그래도 피할 것이다. 그가 계속 이렇게 운명의 반려를 보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본다면.


‘당분간 화가 난 척하는 것도 괜찮겠어.’

라실리아가 입술을 꾹 물었다.

황제도, 이 상황도, 이 모든 것을 겪는 제 마음도 불편했다.


“제 마음을 제가 몰랐군요. 화가 난 게 맞습니다. 당분간은 서로 얼굴을 볼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황제의 당황이 문틈 새로 흘러 들어오는 기분이었다.


“……그게 무슨…….”

“아, 그리고 피피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더 화가 날 것 같습니다. 폐하의 기사들을 단속해 주십시오. 그럼,”

쿵!

라실리아가 욕실 문을 닫았다.

기껏 따듯한 물로 데웠던 몸이 젖은 수건 때문에 다시 차가워졌다.


“추워…….”

라실리아가 어깨를 팔로 감싼 채 다시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물은 더 이상 따듯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 * *



“쿨럭!”

결국 감기가 왔다.
식은 물 속에 너무 오래 머물러 있던 게 화근이었다.


“어떡해요, 황후 폐하……. 이게 다 제 불찰입니다.”

기침 몇 번 했다고 이베트는 눈물을 쏟았다. 자책은 다시 분수로 이어졌다. 자신이 그 물을 뒤집어썼어야 한다는 말을 도무지 멈추질 못했다.


“음……. 내가 아니라고 해도 소용이 없다는 건 이제 알겠는데, 그래도 좀 조용히 하면 안 될까……. 머리가 아파.”

“헉! 네, 네! 지금부터 숨소리도 내지 않을게요, 황후 폐하!”

“숨소리는 괜찮아…….”

“네, 네! 그럼 숨소리만!”

꽤 지독한 감기였다.

목을 긁는 기침도 심각했지만 열이 너무 올라 몽롱했다. 반쯤은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궁정의가 몇 번씩 다녀갔다고 하는데 그건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래도 약을 먹었으니 낫긴 할 것이다.


“황후 폐하. 주무세요?”

가물가물한 의식의 틈을 뚫고 이베트의 걱정이 들려왔다.


“으음……. 아니. 그런데 곧 잠이 들 것 같아.”

“아아, 그렇군요. 푹 주무세요. 주무시고 나면 한결 나아지실 거래요.”

“응…….”

“혹시 잠이 드시기 전에 필요하신 건 없나요? 그 전에 화장실을 모셔다 드릴까요?”

“아니, 괜찮……. ……아, 생강 주스를 마셔야 되지 않아?”

“네? 생강 주스요? 생강 주스가 드시고 싶으신가요, 황후 폐하?”

“그럴 리가. 세상에서 제일 맛없는 주스일 텐데. 하지만 감기에 걸리면 네가 그걸 꼭 먹어야 한다고 했잖아. 먹기 싫다고 해도 늘 만들어 왔…….”

“네? 제가요?”

이베트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저는 생강 주스라는 게 있는 줄도 몰랐는데요.”

“아……? 플로타 네가 늘……,”

“플로타요?”

“……? 아…….”

감기 때문이었다.

실수로 과거를 내뱉은 라실리아의 안색이 미세하게 창백해졌다.

고개를 갸웃대던 이베트가 부리나케 라실리아의 곁으로 다가와 발을 동동 굴렀다.


“어쩌면 좋아. 그새 안색이 더 안 좋아지셨어요, 황후 폐하. 그런데 플로타라는 분은 누구세요?”

“플로타……. ……그러게.”

라실리아가 일부러 잠시 말을 끊었다. 이 상황에서 적절한 변명이 될 것은 하나뿐이었다.


“모르겠어. 뭔가 기억이 날 것 같기도 했는데…… 더는 생각이 나지 않아.”

“저런……. 혹시 공작가의 시녀가 아니었을까요? 그분께서 평소에 생강 주스를 만들어 줬다면……. 앗, 맞아. 그런데 생강 주스는요? 어떤 건지 말씀해 주시면 최선을 다해 만들어 보겠습니다.”

“괜찮아.”

생강 주스가 정말 감기에 효과가 있었는지, 지금에 와서는 모르는 일이 되었다. 플로타는 자신을 아껴 준 적이 없을 테니까.

어쩌면 그 맵고 떫은 맛에 질색하는 모습을 보려고 매번 먹였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냥 자겠다. ……아, 피피는? 어디 다치거나 하진 않았어?”

“렌 님은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어요. 슈라이든 합하께 가서 행방을 여쭤 볼게요.”

“그래. 잘 지켜봐. 혹시 모르니까.”

“네, 황후 폐하. 걱정 말고 주무세요.”

“응.”

이베트가 방을 떠나는 작은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라실리아는 비몽사몽간에 기침을 뱉어 내다가 잠이 들었다.

그리고 꿈을 꾸었다.

* * *



-인간은 원래 이렇게 약한가?

자신이 젊고 건강한 상태라 믿고 있는 인간이 듣기에는 기가 찬 말이었지만,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감기에 걸린 건 사실이었으니까.


-그래도 쉽게 죽지는 않으니 걱정…… 에취! ……하지 마.

-이해가 가지 않아. 고작 물에 빠졌다고 병이 들다니.

그 물은 만년설이 쌓인 산맥 한가운데 있는 호수의, 두껍게 언 표면 아래 아주아주 차가운 물이긴 했지만 마족에게 물은 그냥 다 물인 모양이었다.


-그 호수에 빠지고도 고작 감기만 걸린 게 내가 몹시 건강하다는 증거라고 해도 안 믿을 거지?

그런 말은 아예 듣지도 않았다.


-네 몸을 낫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좋을 텐데.

붉은 손톱 끝이 제 이마에 닿았다.

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 무표정이 왜 제게 닿을 때면 저렇게 애틋하고 따듯해 보이는지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네 몸은 내 몸과 다르다. 방법을 모르겠다.

-괜찮아. 좀 따듯하게 하고 있으면 나아.

-그렇다면.

화르륵.

어디선가 불이 타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는 않았다.


-불을 피운 게 아니었어?

-피웠다.

-어디에? 안 보이는데.

-내 몸 안에.

-응?

마족이 검은 비늘로 뒤덮인 팔을 내밀었다.


-이곳에서는 불을 피워도 유지가 되지 않아. 대신 내 몸이라면 할 수 있다. 나를 잡고 있어.

-아…….

검은 비늘이 붉게 달궈지는 듯 보였다.

역시 그라는 존재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이렇게나 헌신적일 수 있는 걸까. 당신은 마족인데. 인간이 아닌데. 왜 인간인 내게. 어떻게.


-만져 봐. 너무 뜨거우면 불길을 줄일 테니.

그가 내민 팔에 손을 얹었다.


-어떤가. 네 살갗이 데일 정도인가?

-……아니. 딱 좋아.

몹시 따듯했다. 따듯하기만 했다.

두 팔을 벌려 팔이 아닌 몸을 안았다.


-이렇게 있으면 금방 나을 것 같아.

처음에는 조금 굳은 듯 있던 그가 안는 동작을 따라 했다.


-나는 인간의 병을 이해할 수 없지만 좋다는 말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인간과는 다른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귓불을 스쳤다.


-좋아.

그 말을 듣는데 이상하게 몸이 떨렸다.


-나도.

당신이 좋아.

* * *



“……좋…… 아…….”

라실리아가 잠결에 웅얼거렸다.
사실 정말 좋았다. 두통도 사라졌고 몸은 발끝까지 따듯했다. 자신은 무언가 아주 따듯한 것을 안고 있었다. 단단했지만 부드러웠다. 포근하고 안락했다. 따듯하고 청량한 냄새가 났다.


“나도.”

누군가의 낮은 목소리가 귓불에 닿았다.

라실리아가 꿈에서 현실로 돌아온 것은 그 목소리 탓이었다. 꿈과 전부 닮은 지금, 유일하게 다른 것은 목소리였다. 자신은 그 목소리를 알고 있었다.


“……. ……폐하?”

라실리아가 정신없이 고개를 들었다.

황제의 금안이 감기에 걸린 것처럼 몽롱해진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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