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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벗어나려면 (36/96)


36. 벗어나려면
2023.01.04.


세 번째 그림자 기사의 대답이 들릴 때까지, 까마득한 시간이 흐른 듯했다.


“……. 찾지 못했습니다.”

“……그렇군.”

혹시라도 안도의 숨소리가 새어나갈까 봐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하나 더 묻지. 폐하의 명이었나?”

“명을 하시진 않았지만 허락은 하셨습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 것 같았다. 데칸이 주술을 확인해 보겠다 나섰고, 레스칼은 반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쨌거나 그것은 명령을 내린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황제 또한 황후가 어째서 주술사를 부렸는지 이유를 알고자 한다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몸이 젖었다는 이유로 그대를 벌할 수는 없을 터. 없던 일로 하겠다.”

“……네?”

데칸이 주춤댔다.

라실리아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돌아가자.”

“엇, 네. 네, 황후 폐하.”

여전히 얼떨떨해하고 있던 이베트가 부리나케 라실리아의 뒤를 쫓았다.


“황후 폐하, 괜찮으세요?”

“……아니.”

괜찮지 않았다. 괜찮을 수가 없었다.

몸이 으슬으슬 떨려 왔다.


“몸이 추워. 감기라도 오려나 봐.”

“물이 너무 차가웠나 봐요. 어떡해요.”

이베트가 발을 동동 굴렀다.


“여기서 제 옷을 벗어 드릴 수도 없고……. 아니, 물론 명하시면 얼마든지 벗어 드리겠나이다!”

너무 진심 같아서 라실리아가 피식 웃었다.


“괜찮아. 마음은 받을게.”

“아앗, 정말인데요…….”

“알고 있다. 그보다는 빨리 걷는 게 좋겠어.”

“아아, 정말……. 처음 보는 기사님은 왜 주문을 실패하셔서……. 황후 폐하께서 감기에 걸리시면 저는 두고두고 기사님을 원망할 거예요. 시그레스 경도 함께요.”

황후궁에 도착할 때까지 이베트는 내내 걱정을 멈추지 못했다.


 

* * *



“하, 어쩌다 이런 일이 다 생겼지.”

세르벤이 칼을 도로 칼집에 찔러 넣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직도 안 믿긴다. 데칸 호르세드가 주문에 실수를 하다니. 너 뭐 잘못 먹었냐? 아니, 실수가 맞긴 해? 혹시 황후 폐하한테 뭐 쌓인 거라도 있었어?”

말을 해 놓고도 이상했던지 세르벤이 턱을 문질렀다.


“아니……. 너는 황후 폐하와 마주친 적도 거의 없었잖아. 쌓일 게 뭐가 있다고. 아니, 정말. 왜 네가 리얀 같은 짓을 하고 그래?”

“그러게 말입니다…….”

데칸이 잘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주먹을 쥐었다 폈다.


“실패할 리가 없는 주술이었습니다. 복잡하거나 어렵지도 않고, 그저 다른 주술사의 흔적을 감지하는 아주 초보적인 주술이었습니다.”

“뭐? 그런 걸 실패했어?”

“아니, 실패라기보단…….”

방금 전 상황을 떠올리며 데칸이 눈살을 찌푸렸다.

제 주술이 실패한 게 아니었다. 그보다는 방해를 받았다고 해야 했다.

방해가 없었다면 황후는 물을 뒤집어쓰는 게 아니라 드레스 자락에 물 몇 방울이 튀는 정도였을 것이다.

그 물 몇 방울은 주술사의 흔적을 따라 스며들다가, 자신이 확인을 마치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말라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황후는 아예 온몸이 젖었다.

마치 제 눈을 가리려는 것처럼.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세르벤이 데칸의 어깨를 툭툭 쳤다.


“뭐, 그래도 걱정은 반만 해라. 황후 폐하께서 없던 일로 해 주신다고 하셨으니.”

같은 그림자 기사에, 같은 기사 계급이라고 해도 두 사람 사이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시그레스 가문은 대대로 황실의 기사단에 속한 기사를 배출한 명문가였다. 조부의 조부의 조부까지 모두 준남작의 직위를 지녔다.

데칸의 부친은 세르벤과 리얀의 부친, 시그레스 준남작의 가신이었다. 그 탓에 데칸은 세르벤과 리얀을 여전히 자신이 모시는 사람들로 대하는 경향이 있었다.

세르벤과 리얀은 그가 자신들을 어떻게 대하든 별반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에게 데칸은 실력이 좋은 주술사이자 세 번째 그림자를 맡겨도 될 만큼 믿을 수 있는 기사였다.

근위대 입단 시기가 자신들보다 늦은 만큼 후배 취급을 할 뿐이었다.


“그렇잖아도 묻고 싶었습니다. 대체 왜 그런 말을 하셨겠습니까?”

“누구, 황후 폐하께서?”

“네. 말이 안 되는 일이잖습니까. 황후 폐하신데.”

“그게……. 음, 그냥 그렇게 됐어. 기억상실에 걸리신 뒤로는 완전히 다른 성격이 되셨달까……. 사람 죽이고 괴롭히는 데 이젠 별로 흥미가 없어지신 것 같아.”

“정말입니까?”

“너도 방금 겪었잖아. 우리 황후 폐하께서는 갑자기 물벼락을 맞고도 아주 고상하셨지. 게다가 공정하게 실수와 잘못을 따지기도 하셨고.”

“그건 그렇…….”

데칸이 말을 멈추고 미간을 찌푸렸다.


“이 자식, 표정이 왜 그래. 어쨌거나 잘된 일 아냐? 황궁에서 피 보는 일이 줄어든 것만 해도 어딘데.”

“사람이 그렇게 달라질 수도 있는 겁니까?”

“글쎄. 나야 모르지. 기억상실이나 성격이 바뀐 거나 전부 연기일지도. 그런데 아직까진 잘 유지하고 계셔. 폐하를 위해 부디 평생 그러시길 바랄 뿐이다.”

황후가 자신에게 푹 빠져든 황제를 악랄하게 휘두르면 어쩌나 했던 한때의 걱정은 이제 슬슬 사라져 가는 중이었다.

세르벤의 눈에도 황후는 아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이전의 황후가 더 낯설게 느껴질 정도였다.

데칸이 천천히 턱을 저었다.


“잘 믿기지는 않습니다만, 처벌이 없다면 좋은 일이긴 하겠군요.”

“음? 그게 무슨 소리야.”

세르벤이 데칸의 등을 철썩 내리쳤다.


“그냥은 안 넘어가실걸. 각오하는 게 좋을 거다.”

“분명히 없던 일로 해 주시겠다고……,”

“아, 그건 황후 폐하께서 하신 말씀이고.”

“그럼……?”

“폐하는 다르시지.”

“네……?”

황후의 기억상실 이후 궁에 와 본 적이 없는 데칸은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뭐, 나중에 무슨 말인지 알 거야. 하여간 나는 다 말해 줬다.”

말을 마친 세르벤이 재빨리 황후의 뒤를 쫓아갔다.

세르벤이 남긴,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을 곱씹던 데칸은 이상한 점을 뒤늦게 눈치챘다.


“그러고 보니 왜 시그레스 경이 황후 폐하의 호위를……?”

뭔가가 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황후가 알고 있을 것이다.

* * *



“일단 옷부터 벗겨 드리겠습니다, 황후 폐하.”

황후궁으로 돌아온 라실리아를 이베트가 욕실로 데려갔다.


“물은 지금 데우고 있으니 잠깐만 참으시면 됩니다. 아아, 이걸 어째. 입술이 파래지셨어요, 황후 폐하.”

이베트의 손이 부지런히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무겁고 장식이 많은 겉드레스가 벗겨지고, 속드레스가 드러났다. 라실리아가 이베트의 손을 붙들었다.


“됐어. 속옷은 내가 벗겠다.”

“손이 떨리고 계신데요! 제가 하겠습니다.”

“아니. 더는 건드리지 마라.”

새파래진 입술 덕에 라실리아의 말은 더 차갑게 들렸다.


“아, 그럼……. ……네, 황후 폐하. 명을 따르겠나이다.”

이베트가 푸욱 고개를 숙이며 뒤로 물러섰다.

안쓰러워 보였지만 이게 맞았다. 이베트는 표식에 대한 것은 몰라야 했다.


“몸을 돌려. 내가 옷을 벗고 욕조에 들어가면 그때 다가와도 좋다.”

“……네, 황후 폐하.”

이베트가 얌전히 등을 돌렸다.

라실리아는 이베트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옷을 벗었다. 손이 자꾸 떨려서 단추를 푸는 일이 쉽지 않았다. 그래도 속드레스를 전부 단추가 앞에 달린 것으로 바꿔 놓아서 다행이었다.

그러다 이상한 걸 발견했다.

이베트의 옷은 거의 젖지 않았다. 물기가 좀 묻었지만 그건 방금 전까지 제 겉드레스를 벗기다가 묻은 정도였다.


“공녀는 젖지 않았나?”

“네? 아아, 네. 황후 폐하께서 감싸 주신 덕에 저는 전혀 젖지 않았습니다! ……아이 참. 다시 생각해도 너무 황송하고 죄스럽습니다, 황후 폐하. 마땅히 제가 황후 폐하를 감싸고 대신 젖었어야 하는 것을요!”

“그런 말 할 것 없다. 너라도 젖지 않았으니 다행이야.”

“다행이라니요. 저는 그저 송구하고 송구할 뿐입니다아…….”

다시 생각해도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나를 겨냥한 주술이었으니 피해도 나만 입게 되는 걸까.’

신관들의 신성력이 우선시 되는 델라르타에서는 주술을 거의 몰랐다. 막연히 아주 오래된 예전에 사용된, 체계가 없는 원시적인 형태의 마법이자 불안정한 힘이라는 인식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게 아닐지도 몰랐다. 대상을 명확히 구분해 힘을 적용했다. 그런데도 실수였다고 했으니 훨씬 더 정교한 힘일지도 몰랐다.

축축이 젖은 옷을 다 벗은 라실리아가 수건을 몸에 두른 뒤 욕조로 들어갔다.

첨벙.

작은 물소리가 들리자 이베트가 물었다.


“황후 폐하……? 욕조에 드셨습니까?”

“그래. 이제 등을 돌려도 돼.”

“네.”

후다닥 몸을 돌린 이베트가 젖은 옷가지를 정리한 뒤 곁으로 다가왔다.


“물 온도는 잘 맞으세요? 머리를 감겨 드려도 될까요?”

“온도는 좋아. 머리는…… 아냐. 내가 하겠다.”

“그럼 비누칠이라도……?”

“그것도 괜찮아.”

이베트가 울상을 지었다.


“원래 다 제가 해 드려야 하는 일인데요…….”

“설마. 파샤드 후작 부인은 옷을 벗는 것만 거들었는데.”

“아니, 저는 궁인이었으니까요. 목욕 시중은 궁인의 일입니다.”

“그래. 그러니 하지 않아도 돼.”

“아니, 그래서 좋은 거 아닌가요? 시녀지만 궁인의 일도 할 수 있다는 게요. 저는 그래서 제가 더 도움이 될 거라 여겼는데요…….”

몹시 실망한 얼굴이라 안쓰러우면서도 고마웠다.

라실리아가 물에 젖은 손을 들어 이베트의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


“맞아. 그래서 많은 도움이 되고 있어. 목욕 시중을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을 뿐이다.”

“아……. 그러시다면요.”

따듯한 물이 몸을 데우기 시작하자 한기가 조금씩 잦아들었다.

라실리아는 욕조 가장자리에 머리를 대고 으리으리한 대리석 조각이 가득한 욕실 천장을 바라보았다.


 
몸이 괜찮아지자 걱정으로 머리가 터질 지경이 되었다.


‘이제 어쩐다.’

두 달은 아직도 멀었다.

델라르타에서 신관이 도착하는 것을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정체를 들키지 않은 채 여길 떠날 수는 없을까.’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게 최선이었다.

하지만 도무지 방법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일단 궁 밖으로 나갈 수만 있다면……. 하아. 황후가 이유도 없이 궁을 나갈 수는 없다고 했나. 피엘리온 공작가에 다녀온다고 하면 되지 않을까. 가족을 만나려고 할 수는 있는 거잖아.’

그것도 썩 좋은 방법은 아니었다.

분명히 호위가 따라붙을 것이다. 황제는 그림자 기사에게 황후의 호위를 명했다. 호위가 목적인지 아니면 감시를 의도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나 혼자서 그 호위들을 따돌릴 수는 없어. 그리고 황후의 외모는 너무 눈에 띄어.’

이 외모에 이 차림새라면 어디서든 황후라는 것을 눈치챌 것이다.


‘옷을 갈아입는다면……. 그래도 얼굴까지 감춰야겠지. 그럼 더 수상하게 여기지 않을까?’

게다가 라실리아는 신전 밖이나 황궁 밖의 생활을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만에 하나 세르벤을 비롯한 호위를 따돌린다고 하더라도 정체를 감춘 채 델라르타까지 두 달이나 걸리는 먼 길을 갈 수 있을지 막막하기만 했다.


‘도망친다는 건 무리야. 게다가 황후잖아. 도망치도록 놔둘 리가 없어.’

왜 하필 황후의 몸으로 되살아난 걸까.

라실리아가 입술을 잘근 씹었다.


‘황후만 아니었어도 델라르타로 돌아가는 일이 이렇게 어렵진 않았을 텐……, ……아?’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황후가 아니었다면.

더는 황후가 아니라고 한다면. 황후라는 지위와 상관없는 사람이 된다면.

그러면 어디든 갈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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