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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세 번째 기사 (2) (35/96)


35. 세 번째 기사 (2)
2023.01.01.


트리니다드가 어떤 곳인지는 레스칼도 알고 있었다.

살아남은 주술사들이 휘청이는 명맥을 잇고 있는, 거기에 주술사인 척하는 사기꾼과 범죄자들이 숨어든 망자의 땅 같은 도시였다.


“거긴 왜?”

“피엘리온 소공작이 한 달 전 그곳을 방문했습니다. 전에 없던 일이라 주시하던 중이었습니다.”

피엘리온 소공작이라는 말에 레스칼의 표정이 반사적으로 구겨졌다.

희한한 일이었다. 이전까지는 혼인 전 둘의 관계를 알았어도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지금은 이름만 들어도 귀가 썩는 기분이었다.


“주시할 만한 용건이 있었나?”

“트리니다드를 방문한 목적은 주술사를 고용하기 위해서였지만 정확한 목적은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다만 소공작이 제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누군가에게 통행증을 발급했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통행증?”

“네, 폐하. 그래서 아마도 주술사를 제국으로 데려오지 않았나 추측하는 중입니다.”

“주술사를…….”

툭.

레스칼이 그때까지 손에 쥐고 있던 펜을 내려놓았다.

혼인 전 황후와 내연의 관계였던 소공작이 직접 트리니다드 같은 무법지대를 찾아가 사람을 데려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사실이 암시하는 바는 하나였다.


“황후가 연관이 있던가?”

“그럴 것 같습니다. 트리니다드에서 소공작의 행적을 살폈는데, 제대로 된 주술사를 찾기 위해 돈을 아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돈을 아끼지 않았다는 말은 많은 것을 암시했다. 피엘리온 가의 재산은 거대했지만 입양아인 소공작에게는 아직 가산을 마음대로 처분할 만한 권한이 없었다.

늙은 여우라 불리는 피엘리온 공작은 지금이라도 더 나은 인물이 나선다면 기꺼이 소공작을 갈아치우고도 남을 인간이었다.

결국 주술사를 찾는 건 소공작만이 아니라는 얘기였다. 피엘리온 가가 뒤에 있었다.


“황후에게 문제가 생겼군.”

마법이나 신성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주술 단계의 힘이 필요한 문제가.


“한 달 전이라고 했나? 그사이에 황후가 피엘리온 가를 방문한 적이 있었나?”

“공식적으로는 없습니다, 폐하. 하지만 일부러 눈을 피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주술사를 데려온 것도 극도로 말을 아꼈습니다.”

“피엘리온 가를 통하지 않아도 소공작과 접촉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겠지. 그렇다면 주술이 행해진 건 한 달보다 안쪽이겠고……. ……설마 황후의 기억상실이 주술로 인한 일인가?”

“아……. 그럴 수도 있겠군요. 주술은 반작용이 따릅니다. 주술사가 서툴거나 주술의 힘을 감당하지 못할 경우 피술자의 몸이 반작용을 받아내는 결과는 흔합니다.”

스멀스멀 기분 나쁜 감각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황후에게 자신이 모르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전 같으면 아무 상관도 없었겠지만 지금은 생각만으로도 뱃속이 뒤틀렸다.

데칸이 점점 굳어 가는 레스칼의 얼굴을 바라보다 조용히 덧붙였다.


“확실하진 않지만 그 주술사는 아직 제국 어딘가에 머물러 있을 수도 있습니다. 피엘리온의 이름으로 발급된 통행증은 그 뒤로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주술사라면 얼굴을 감추고 돌아다닐 재주야 있겠지.”

“그렇긴 합니다만……. ……왠지 그게 다가 아닌 것 같은 기분이라.”

레스칼이 힐긋 데칸을 쳐다보았다.


“그건 주술사로서 하는 말인가?”

“송구하오나 저는 아직 그렇게 불릴 정도는 되지 못합니다.”

데칸은 아마도 제국 내 유일한 주술사일 것이다.

원래 데칸은 신관이 되려고 했다. 신학을 공부하던 게 오히려 주술을 공부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했다. 주술은 현재 대부분이 사라졌고, 스승으로 삼을 만한 자도 없었기에 데칸의 주술은 오로지 독학으로 이루어졌다.

어쨌거나 주술사에게는 타고난 감 같은 게 있었다. 이상한 기운을 감지하는 능력이라고 해도 좋았다. 이 감이 몹시 예리할 경우 예지력처럼 보이기도 했다.


“네가 그렇게 느낀다면 뭔가가 있다는 뜻이겠지. 수색을 해도 좋다.”

“영광입니다, 폐하.”

그리고 데칸에게는 한 가지 볼일이 더 있었다.


“그리고 폐하.”

“말해.”

“외람되지만 허락하신다면 황후 폐하를 뵙고 싶습니다.”

그 말에 레스칼이 데칸을 위아래로 훑었다.


“이유는?”

“혹시라도 주술의 흔적이 남아 있는지 알아보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썩 내키지는 않는다는 식이었다.


“가능한 한 짧게 해라.”

“예, 폐하.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허리를 굽혔다 편 데칸이 소리 없이 사라졌다.

* * *



“오늘은 제가 폐하 대신이네요. 송구합니다, 황후 폐하. 대신 편하게 모실게요.”

이베트가 우스갯소리를 하며 손을 내밀었다.


“송구해하지 않아도 돼. 너로도 충분하니까.”

라실리아는 이베트의 손을 잡고 정원으로 내려섰다. 점심을 함께 한 황제는 산책할 시간까지는 만들지 못했다. 제국의 황제란 꽤 바쁜 위치였다.


“그래도 정말 아쉬워하시는 것 같았어요. 말씀은 안 하셨지만 고스란히 느껴지더라고요.”

이베트는 황제와 황후가 운명의 한 쌍이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베트의 눈에 황제는 세상 그 무엇보다 황후를 사랑하는 애처가로 보였다.

다만 황후는 그 마음을 몰라주는 것 같아 그게 좀 안타까웠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보다야 훨씬 나았다. 황후가 황제를 홀로 갈구하고 황제는 냉철했다면 보는 제 마음은 몹시 아팠을 것이다.


“……오늘은 날씨가 좋네. 꽃들이 더 많이 핀 것 같아.”

라실리아가 은근슬쩍 화제를 돌렸다. 뒤에서 적당히 거리를 벌린 채 따라오는 세르벤이 신경 쓰였다.

그가 보고 듣는 모든 건 황제에게 전해질 것이다. 라실리아는 황제가 너무 많은 걸 알게 되는 상황은 피하고 싶었다.


“그러게요. 어제하고 또 달라 보여요, 황후 폐하.”

헐벗었던 가데니아 정원에 다시 흰 꽃들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황제가 정원 두 개를 망가트린 뒤로 라실리아는 꽃을 거절했다. 그 뒤로 황궁의 정원은 여느 때처럼 아름다웠으니 다행이었다.


“이건 들은 얘긴데 황실 재단사가 엄청 신이 났대요. 폐하께서 어떤 옷감이든 어떤 보석이든 원하는 대로 써도 된다고 하셔서요. 어마어마한 옷들을 만들어 낼 거라고 큰 소리를 쳤다나 봐요. 궁인들은 요새 만날 그 얘기예요.”

라실리아가 쓰게 웃었다.


‘그 옷들은 입지 않고 잘 놔둬야겠네.’

새로 지은 옷들은 모두 진짜 반려를 위한 선물이 될 것이다. 꽃다발을 만들기 위해 잘린 꽃이 없는 정원과 마찬가지로.


“아차. 내일 파샤드 후작 부인께서 오시잖아요. 다과를 준비해야 할까요?”

문득 그런 생각을 떠올린 이베트의 얼굴이 비장해졌다.


“허락해 주시면 정말 잘 준비하겠습니다. 궁인 출신이 시녀장 노릇을 하고 있으니 수준이 떨어졌다는 그런 말을 절대 들리지 않게 하고 싶어요.”

“다과가 필요할 것 같진 않은데. 그리고 공녀는 잘하고 있어. 후작 부인이 트집을 잡으려 해도 잡을 수 없을 거야.”

“아이 참. 황후 폐하께서는 너무 관대하세요. 분명히 뭐든 트집을 잡을 거라고요.”

이베트가 벌써 후작 부인을 마주한 것처럼 주먹을 꼭 쥐었다.


“하던 대로만 해. 그리고 다과는 필요 없다. 후작 부인도 과자에 손을 댈 정신은 없을 것이다.”

“아, 그렇긴 하겠네요. 좋은 일로 부르신 게 아니니. 그럼 다과는 잊겠습니다. 대신 산책을 마치시면 응접실을 한 번 더 청소하겠습니다.”

“그건 편할 대로 해.”

“네, 황후 폐하.”

두 사람이 두런두런 대화를 주고받으며 분수를 지나치던 순간이었다.


“뭐지……?”

말할 수 없이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불쑥 가슴을 치고 들어오는 섬뜩한 감각에 라실리아가 저도 모르게 이베트를 확 끌어안았다.

촤아악!

분수의 물이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솟구치며 라실리아를 덮쳤다.


“황후 폐하!”

세르벤이 부리나케 달려왔다.

그러나 이미 늦은 일이었다. 라실리아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흠뻑 젖은 모습이 되었다.


“빌어먹을! 웬 놈이야!”

스릉!

세르벤이 칼을 뽑아 들고 엉뚱하게도 분수 바닥에 칼끝을 꽂았다.

퍽!

대리석 분수에 금이 가며 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물보라 사이에서 뭔가 그림자 같은 게 어른거렸다.

슷!

순간의 움직임을 포착한 세르벤이 망설임 없이 칼을 찔러 넣었다.

츳!

칼끝이 뭔가를 찢었다.


“……살살 해 주십시오.”

이어서 그림자가 사람이 되었다.


“뭐야…… 데칸?”

“오랜만에 뵙습니다, 시그레스 경.”

세르벤의 안색이 달라졌다.


“하! 뭐야, 이 자식! 방금 네가 그랬냐? 정신이 나갔어?”

데칸이 양손을 들어 올렸다.


“폐하의 이름에 맹세코 황후 폐하께 해를 끼칠 의도는 없었습니다. 제 주문이 서툰 탓입니다.”

“하, 이게 대체……. ……아, 모르겠고. 일단 엎드려 빌기부터 해.”

고개를 끄덕인 데칸이 라실리아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결례를 범했습니다. 벌해 주십시오.”

“…….”

라실리아가 고개를 숙인 데칸을 응시했다. 더없이 정중한 말투와 태도였지만 그게 다였다.


‘자기가 잘못한 건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분수의 물이 솟구치기 전 느꼈던 그 이상한 감각은 괜한 게 아니었다.


‘주문이 서툴렀다고 했지. 그럼 주술사라는 말인가. ……제국에도 주술사가 남아 있었네.’

갑자기 제 앞에 주술사가 튀어나온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일단 그대가 누군지부터 듣지. 시그레스 경은 안면이 있는 것 같지만.”

“현 제국의 황제를 수호하는 세 번째 그림자, 데칸 호르세드입니다.”

“그림자 기사라는 말인가? 그런 것치고 이제껏 얼굴은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제게 부여된 임무는 황궁 밖에 있습니다. 궁 안에서는 제 얼굴을 보실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은?”

“아뢰옵기 송구합니다. 주문이 실패했습니다. 벌하십시오.”

“무엇을 위한 주문이었나?”

잠깐 멈칫댄 데칸이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했다.


“황후 폐하께서 최근에 주술을 사용한 흔적이 남아 있는지 알아보기 위함이었습니다.”

“…….”

라실리아는 필사적으로 당황을 억눌렀다.


‘피엘리온 소공작이 주술사를 부른 걸 알고 있었다는 소리네. 그게 황후 때문이었는지 확인하려 했던 거야. ……그렇다는 건 황제도 알고 있다는 소리겠지.’

황제는 이미 황후에게 비밀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거기에 주술을 사용했는지 확인하고자 했다. 비밀과 주술을 연관 짓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표식이 지워지고 있었고…… 그걸 되돌리려 주술사를 불렀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끝장이야.’

라실리아는 들리지 않게 이를 꽉 물었다.

황제는 바보가 아니었다. 겉으로는 접촉을 위해 간이라도 빼 줄 것처럼 굴고 있었지만 뒤에서는 하나하나 황후의 정체를 파헤치고 있었다.

그가 아무리 말뚝에 목줄이 매여 있는 개처럼 안쓰럽게 보여도 동요할 게 아니었다. 그는 언제라도 말 한마디면 자신을 죽일 수 있었다.

라실리아는 천천히 숨을 내쉬며 자신을 죽일 수도 있는 질문을 했다.


“그래서, 흔적은 찾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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