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세 번째 기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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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세 번째 기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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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세 번째 기사 (1)
2022.12.28.
라실리아가 향한 곳은 북쪽 탑이었다.
“슈라이든 합하! 안에 계신가요? 들어가겠습니다!”
라실리아의 빠른 걸음에 맞추느라 숨을 헉헉대던 이베트가 용케도 방문을 알리고 문을 열었다.
탁!
“아, 이럴 수가……. 두 분 다 안 계시나 봐요.”
하지만 방 안은 비어 있었다.
이베트가 발을 동동 굴렀다.
“하필 황후 폐하께서 급히 찾으시는 이런 때에…….”
텅 빈 방을 보고 아찔해진 것은 잠시였다.
라실리아가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열었다.
‘부르면 온다고 했어.’
피피가 태어나기 전, 먼저 있던 새들이 그렇게 말했다. 신기하게도 새들은 라실리아가 무언가를 필요로 할 때면 언제든 나타나 주었다.
새들이 자신을 돕는 이유는 피피와 마찬가지로 자신을 마족의 반려라 여기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지고 있을 틈이 없었다.
“누구든 와 줘. 급한 일이야.”
라실리아가 두 손을 마주잡은 채 간절한 음성으로 속삭였다.
“제발.”
이베트가 곁으로 다가와 걱정스럽게 입을 열었다.
“황후 폐하. 무슨 일인지 말씀해 주시면 안 될까요? 저 같은 게 무슨 큰 도움이 될까 싶겠지만 그래도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라실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네 마음은 고맙다. 하지만 너는 모르고 있는 게 더 나아.”
“어째서…… 어째서 그런지요. 저는 뭐라도 해 드리고 싶은데…….”
이베트가 울상을 지었다. 표정만으로도 선량한 마음이 전해졌다. 진짜 반려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이베트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곳에서 많은 위안을 얻게 될 터였다.
“공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얼마든지 있어. 그러니 지금을 아쉽다고 여기지 않아도 돼.”
“하지만…… 지금 뭔가 곤란하신 일이 있는 거잖아요. 그렇지 않나요?”
“그래. 하지만 그건 사람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일일 것 같아.”
“네? 그럼……,”
이베트가 걱정과 당황으로 말을 잃는 순간이었다.
까아악! 까악!
구구구구!
삐웃! 삐이웃!
어디선가 새들이 하나씩 날아와 창틀에 앉기 시작했다.
“엇! 보세요, 황후 폐하! 갑자기 새들이 오고 있어요! 대체 이게……?”
이베트가 놀라서 허둥지둥 창밖을 가리켰다.
시작은 한두 마리였지만 어느샌가 창문이 전부 가려질 정도로 많은 새들이 날아왔다.
“아, 정말로 와 주었구나. 고마워. 너희 중에 혹시,”
라실리아가 새들에게 말을 거는 순간이었다.
“삐이이!”
저 멀리서 슈라이든 공작과 함께 날아오던 피피가 빽 소리를 질렀다. 내가 왔으니 너희들은 나서지 말라는 말이었다.
“황후 폐하! 어인 일로 오셨나이까!”
슈라이든 공작은 오늘도 중후한 목소리로 아주 우아한 귀족의 언사를 사용했다.
“삐이!”
피피가 다들 비키라며 소리를 지르자 새들이 양편으로 착 갈라져서 길을 터 주었다.
피피는 슈라이든 공작의 목덜미에 타고 있었는데, 슈라이든 공작이 창문에 내려앉자마자 폴짝 뛰어내려 라실리아에게 안겼다.
“삐이?”
“부탁할 게 있어, 피피.”
“삐!”
뭐든 말만 하라고 했다.
“파샤드 후작 부인이 지금 신전으로 가고 있대. 신전과 거래를 하려고 하나 봐. 그걸 막아 줄 수 있을까?”
“삐?”
“이유는 묻지 말아 줘. 언젠가는 밝혀질 일이지만 아직은 안 돼. 나는 그냥, 시간을 좀 벌고 싶어.”
“삐이……. 삐.”
피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새 조금 더 자란 것 같은 피피가 눈을 매섭게 뜨자 비장해 보이기까지 했다.
슈라이든 공작이 나섰다.
“어디를 가셔야 합니까? 제가 모시겠습니다!”
“삐이.”
피피가 고개를 저었다. 앵무새보다 더 빠른 게 필요하다고 했다.
“피잇!”
피피가 허공을 향해 날카롭게 울었다. 그러자 잠시 후 거대한 날개를 가진 독수리가 날아왔다.
양편으로 갈라진 새들이 화들짝 놀라 더 넓게 길을 텄다.
“삐!”
피피가 독수리 등에 팔짝 올라탔다.
“아, 독수리……. 그렇지요. 앵무새는 독수리보다 빠를 수가 없지요. 참으로 그렇지요…….”
슈라이든 공작이 날개를 축 늘어트리고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피피가 고개를 돌려 뭐라고 하자 금방 표정이 바뀌었다.
“엇? 저도 타라는 말씀이십니까? 여, 영광이옵니다!”
슈라이든 공작도 몹시 컸지만 독수리는 앵무새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새 두 마리를 태우고도 너끈했다.
“삐이!”
피피가 라실리아를 돌아보며 짧고 단호한 소리를 냈다. 금방 돌아올 테니 기다리고 있으라는 말이었다.
“알았어. 내 방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고마워.”
피피의 머리를 문질러 주던 라실리아의 손짓이 그치는 것을 신호로 독수리가 날아올랐다.
휘잉!
거대한 날갯짓에 바람이 불어왔다.
독수리는 순식간에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 뒤를 창가에 몰려들었던 수많은 새들이 뒤따랐다.
“와……. 장관이네요. 저런 장면은 처음 봐요. 진짜 멋있어요. 저 많은 새들이 전부 황후 폐하를 도우려고 움직이네요.”
라실리아도 동감이었다.
저 많은 생명체가 이 순간 오로지 자신을 위한다고 생각하자 마음이 뭉클해졌다. 반면에 조금 슬프기도 했다.
‘이건 나를 위한 게 아냐. 잊지 마. 언젠가는 여기를 떠나야 해. 그것도 되도록이면 빨리.’
라실리아는 평소보다 빠르게 뛰던 가슴을 가만히 쓸어내렸다.
예언자의 심장은 무거워야 했다. 그래야 어떤 상황을 맞닥뜨려도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을 수 있을 테니까.
라실리아는 제 심장이 아주 많이 무거워지길 바라며 북쪽 탑을 내려왔다.
은의 방패가 세 번째 밀서를 보낸 것은 그로부터 세 시간 뒤였다.
밀서에는 신전으로 향하던 후작가의 마차에 갑자기 예상치 못한 사고가 생겨 끝내 신전에 도착하지 못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 비슷한 시각 후작가에는 황후가 후작 부인을 찾는다는 비서관의 전언이 도착했다.
* * *
“삐이이이.”
피피는 기분이 몹시 좋아 보였다.
큰일을 마치고 온 피피는 라실리아가 까 주는 호두를 받아먹으며 어깨와 뺨에 마음껏 머리를 비벼 대는 중이었다.
“삐이삐이.”
오늘 자신이 한 일이 몹시 대견했고, 신전까지 까마득히 멀었으며, 그래서 지금 좀 힘들고 피곤하다는 말이 지치지도 않고 들려왔다.
“그래, 알아. 아주 잘했어.”
라실리아가 웃는 얼굴로 호두를 건네주자 피피가 냉큼 입을 벌려 받아먹었다.
라실리아가 쓸 손수건에 수를 놓고 있던 이베트가 고개를 기웃대며 물었다.
“호두가 부족하진 않으세요? 미리 더 가져다 놓을까요?”
“아니야. 지금 있는 것도 충분할 것 같아.”
“렌 님이 그렇게 잘 드시는데요?”
“그렇긴 한데 벌써 배가 빵빵해. 더는 못 먹을 것 같은데.”
“피이이…….”
피피가 짤막한 날개로 배를 슬쩍 가렸다. 이베트는 차마 귀엽다는 말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가리고 끅끅 웃음을 참았다.
“그나저나 오늘은 새벽부터 어딜 갔었어? 슈라이든 공과 무슨 일을 했던 거야?”
“삐이.”
라실리아가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묻는 말에 피피가 날개를 파닥댔다.
슈라이든 공작에게서 먹이를 사냥하는 법을 배웠다고 했다. 그러나 공작도 사실 제 손으로 먹이를 잡아먹어 본 적이 없기에 제대로 사냥법을 알려 줄 수 있는 새를 찾아 돌아다녔다고 했다.
“사냥은 갑자기 왜? 너는 계속 황궁에서 살 거 아니야?”
“삐!”
“아…… 폐하가 그런 말을 하셨어?”
“피! 삐이이!”
새벽의 말다툼이 원인이었다.
피피가 한창 달게 자고 있을 때, 갑자기 목덜미가 집혀 덜렁 몸이 들렸다고 했다. 범인은 황제였다. 그만 자고 나가서 새답게 벌레나 잡아먹으라고 했다.
어이가 없어서 손등을 쪼아 줬는데, 괘씸하게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았다. 황제는 덜 자란 부리로 뭘 할 수 있겠냐며 빈정거렸다.
이대로 주는 먹이나 받아먹고 살면서 대충 살이나 찌울 앞날이 훤히 보인다고 했다.
“와……. 그렇게 심한 말을.”
“삐!”
피피가 이때다 싶었던지 황제의 욕을 해댔다. 말이 험했지만 요약하자면 참 성질머리 더러운 인간이라는 뜻이었다.
“그런 면이 있었나……. 그렇게는 안 보였는데.”
라실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피피가 말하는 황제는 자신이 아는 황제와 너무 다르지 않나 싶었다. 황제는 엉뚱한 고집이 있는 편이었지만 일부러 화가 날 만한 말을 내뱉는 못된 인간은 아니었다.
“삐이!”
피피가 자기를 못 믿겠냐며 울컥 성질을 냈다.
사실 피피도 성격이 썩 좋진 않았다. 아까 창문에 몰려든 새들에게 비키라고 할 때에도 냅다 성질부터 부렸다.
“삐삐! 삐삐잇!”
여하간에 황제는 못된 인간이니 너무 친절히 대해 주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같은 침대에서 재우는 건 저 하나로 충분하다고 했다.
“음……. 그건 나도 동감이야. 셋이 자면 또 악몽을 꿀지도 몰라.”
“삐?”
“너를 꼭 닮은 새하고 황제를 꼭 닮은 마족하고 서로 싸우는 꿈.”
“삐삐?”
“누가 이겼는지는 못 봤어.”
라실리아가 피식 웃으며 피피를 쓰다듬었다.
“그래도 이젠 악몽을 꿀 일은 없으니까. 블루문이 끝났잖아.”
문득 황제가 블루문이 끝났는데도 별반 달라지지 않았던 것 같았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음? 황후 폐하, 왜 그러세요?”
표정이 그새 이상해졌던지 이베트가 제 눈치를 살폈다.
“……아냐. 무슨 일은 없는데……. 혹시 폐하께서 오늘은 황제궁으로 돌아간다는 말을 남기셨던가?”
이베트가 답했다.
“아니요. 그런 말은 들은 바가 없습니다, 황후 폐하.”
그럼 오늘은 어떻게 된다는 말일까.
* * *
슷.
아주 조용한 소리였다.
레스칼이 고개를 들었다.
아무도 없던 집무실에 사람 그림자가 하나 생겨 있었다.
“오늘은 직접 왔군.”
“네, 폐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소리 없이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고 가슴에 손을 올려 인사를 하는 사람은 세 번째 그림자 기사 데칸이었다.
레스칼이 데칸을 바라보다 코끝을 살짝 움직였다.
“먼 곳을 다녀왔나.”
“……네, 폐하.”
데칸의 얼굴에 난처함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각오는 했지만 레스칼의 이목을 속일 수는 없었다.
은의 방패가 역할에 따라 수도를 비우는 일은 늘상 있었다. 그러나 레스칼이 냄새가 달라진 것을 느낄 정도로 장기간 타지에 머무르는 일은 당연히 인가를 받아야 했다.
데칸은 다른 그림자 기사들에게도 말을 하지 않은 채 먼 곳을 다녀왔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뜻이었고, 레스칼도 그 점을 알고 있었다.
“규율을 따지는 건 미루겠다. 일단 오늘 일부터 보고해.”
데칸이 몸을 일으켰다.
“이미 사고가 났다는 사실은 전해 드렸을 줄로 압니다. 파샤드 후작가의 마차 사고 현장에서 깃털을 발견했습니다. 경미한 부상은 있으나 사망자는 없고, 후작 부부는 영지로 돌아갔습니다.”
“깃털?”
“다수의 새가 나타나 사고를 일으킨 것으로 보입니다.”
“새라고.”
레스칼의 표정이 부드러워지다 한순간 다시 불쾌해졌다.
“덜 자란 게 날 줄은 아는 모양이군. 기분 나빠.”
“네……?”
맹세컨대 레스칼이 기분을 언급하는 말을 들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다른 그림자 기사들은 어느 정도 적응을 했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간 수도를 떠나 있었던 데칸은 아직 아니었다.
레스칼이 평소와는 달리 당황을 감추지 못하는 데칸을 힐긋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
“그 정도 얘기를 하려고 네가 직접 오진 않았겠지. 진짜 할 말을 꺼내.”
“아……. 물론입니다, 폐하.”
데칸이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러자 다시 은의 방패를 든 기사다운 얼굴이 되었다.
데칸은 오늘 반드시 황제에게 전할 말이 있었다.
“제가 다녀온 곳은 트리니다드입니다, 폐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