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미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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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미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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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미끼
2022.12.25.
하리오스 신전이 성 말리크 기사단을 신성 기사단에 합류시킨 뒤로 신전은 감시의 대상이 되었다.
황실의 뿌리가 된 마족과 신관들이 한때 전쟁을 벌였다는 것은 아주 오래전 일이었다.
엘리아든의 건국과 함께 제국에 편입된 신전은 그 뒤로 얌전히 제국의 번영을 함께 누리며 살아왔다.
그간 제국 내 사소한 반역이 있긴 해 왔지만 신전이 전면에 나선 적은 없었다. 신전은 오래된 과거를 잊고 제국의 치세에 무난히 합류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갑자기 성 말리크 기사단 같은 수상쩍은 집단을 받아들였다.
이게 어떤 의미인지, 이제 와 갑자기 오랜 우호 관계를 깨트리겠다는 건지, 주의 깊게 지켜볼 필요가 있었다.
“미친놈들. 후작한테 황후 폐하의 비밀을 사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아니, 그래서 산다고 치면? 그걸로 뭘 어쩔 건데?”
아무리 생각해도 의도가 너무 수상하고 괘씸했다.
황후의 비밀은 대단한 것일 수도, 반대로 별게 아닐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그걸 신전에서 캐내려 했다는 게 분노를 불러왔다.
“어떤 비밀이냐에 따라서 쓰임새가 달라지겠지. 하지만 황실을 상대로 수작을 부릴 목적이라는 건 달라지지 않아.”
“응. 그러니까 열이 받는다고.”
리얀이 꼭 칼을 쥔 것처럼 손가락을 꿈틀거렸다.
“가서 머리라도 하나 잘라 올까요, 폐하? 후작이든 대신관이든.”
생각을 잇던 레스칼이 눈썹을 치켜떴다.
“……아직. 명분이 없다.”
“왜 없습니까? 황실을 건드려 보겠다는 시커먼 의도를 저렇게 대놓고 드러내고 있는데요.”
세르벤이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아니, 대놓고는 아니야. 딴에는 은밀하게 움직였다고. 데칸이 감시하고 있었으니까 이렇게 빨리 알아차린 거야.”
데칸은 은의 방패를 이끄는 부단장이자 세 번째 그림자 기사였다. 두 그림자 기사가 황실 근위대의 상징이 된 것과는 달리, 데칸은 맡은 역할 탓에 문자 그대로 그림자가 되었다.
“하, 젠장. 그럼 사고를 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거야?”
“지금으로서는. 설령 신전에서 후작을 불러들인 일을 황실에서 문제 삼는다고 하더라도, 그 자체로는 처벌할 근거가 없어. 귀족이 신전을 방문하는 건 죄가 아니니까.”
그것도 맞는 말이었다.
리얀이 이를 북북 갈았다.
“후작을 그냥 보내지 말았어야 했어. 고문을 해서라도 입을 열게 만들었어야 했는데. 비밀이 뭔지라도 알면 대응이 훨씬 쉬워지잖아.”
세르벤이 열심히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나도 물론 후작의 말을 믿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고문은 안 돼.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젠장, 젠장.”
리얀이 발꿈치로 애꿎은 대리석 바닥을 쿵쿵 찧었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폐하?”
“……모르겠어.”
이렇게 말하는 레스칼의 목에 울큰 핏줄이 섰다.
“이대로 까불게 놔두면 황후가 숨기고 있는 게 뭔지 결국 드러날 것이다. 그때 가서 손을 써도 늦지 않아.”
냉철하고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그러나 레스칼의 표정은 그게 다가 아니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요?”
“비밀을 들키면 황후는 언짢겠지. 그게 마음에 안 들어.”
“아…….”
“음…….”
리얀과 세르벤이 잠시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황후 폐하의 비밀은 지난 사 년간의 시간이나 기억상실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경우라면 폐하께서도 아셔야 합니다. 아니, 폐하께서 누구보다 먼저 아셔야 할 일입니다.”
“그건 알고 있다. 하지만 황후가 내게 언짢아할지도 모를 일을 하고 싶진 않아. 비밀을 캐내는 걸 좋아할 사람은 없다.”
그러니까 황후가 뭔가를 숨기고 있는데, 그걸 제3자를 통해서 알아냈을 때 황후가 자신에게 화를 낼까 봐 싫다는 말이었다.
레스칼은 벌써 애처가가 다 된 듯했다.
잠시 어색하게 바닥을 쳐다보던 리얀이 다시 말을 꺼냈다.
“그럼 음……. 후작의 입을 막아야겠군요. 제가 혼자 서두르면 신전에 도착하기 전 길을 막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러자 세르벤이 우려를 드러냈다.
“아니, 오늘 하루는 막을 수 있다고 해도 그게 다야. 귀족이 신전에 출입하는 일 자체를 금지하는 게 아니라면 소용없는 일이야.”
설령 그런 금지령을 내린다 하더라도 하리오스 신전에서 파샤드 후작에게 접근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모든 귀족이 모든 신관들과 접촉하는 것을 전부 금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세르벤이 이런 말을 했다.
“차라리 황후 폐하께 말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황후에게?”
“네. 후작이 그냥 큰소리를 쳐 본 거라면 아무 문제가 없겠지만, 만약 정말로 그만한 비밀이 있다면 황후 폐하께서도 해결책을 만드셔야 할 테니까요.”
황실을 겨냥했다고 해도 물고 늘어지는 건 황후가 될 것이다. 황후도 이 문제를 알아야 했다.
“거래를 하시는 겁니다. 황후 폐하께서는 비밀을 말해 주시고, 그 대가로 폐하께서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으로.”
그렇게 하면 제3자를 통해 억지로 비밀을 캐지 않아도 되는데다가 신전이 엮여서 일이 커질 염려도 없었다.
“거래라……. 좋아.”
부부 사이에 매사 거래라는 말이 오가는 건 썩 좋은 상황이 아닐 테지만 레스칼에게는 달랐다.
그는 거래를 통해서 조금씩 황후에게 다가가는 중이었다.
“지금 알려야겠군. 중요한 일이 될지도 모르니까.”
마지막 말은 황후에게 가기 위한 핑계처럼 들리기도 했다.
* * *
아침 식사를 다 끝내기도 전에 황제가 돌아왔다.
라실리아는 막 입에 넣으려던 구운 메추리 알 한 점을 손에 든 채 황제를 맞이했다.
“오셨습니까. 식사는 마치셨습니까?”
“아니. 아직.”
먹는 걸 빤히 쳐다보기에 엉겁결에 덧붙인 말이었는데, 답이 의외였다.
“시장하실 텐데요.”
“……조금.”
무슨 황제가 끼니도 제대로 안 챙기는 걸까.
황제도 굶었는데 자신은 예언자로 살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호화로운 음식을 먹고 있었다.
제 손에 들린 포크가 민망해진 라실리아가 가볍게 한숨을 쉬며 물었다.
“지금이라도 드시겠습니까?”
어차피 차려진 음식이 많으니 이거라도 먹겠냐는 뜻이었다.
황제가 성큼 식탁을 지나 옆으로 다가왔다.
“먹겠다. 줘.”
그러면서 고개를 숙인 그가 막 제 입에 들어가려고 했던 메추리알을 덥석 삼켰다.
“……이걸 드리겠다고 한 게 아니었는데요.”
“그런 줄 알았는데.”
그럴 리가 있나.
황제가 내키면 얼마든지 뻔뻔하게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인간이라는 건 이미 아는 일이라 화도 나지 않았다.
“식사를 하실 거면 자리에 앉아서 드십시오.”
“나는 이렇게 먹어도 괜찮아.”
“아니요. 안 됩니다.”
“…….”
황제가 묘하게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라실리아가 시선을 돌려 그 표정을 모른 척했다.
“그럼 이건 어때?”
레스칼이 라실리아의 포크로 다시 메추리알 구이를 쿡 찍었다.
“내가 무슨 얘길 해 주면, 그대가 이야기 값으로 이걸 내게 주는 걸로.”
“어떤 얘기기에 값을 치러야 합니까?”
“들어서 손해를 볼 얘기는 아닐 것이다. 믿어 봐.”
“…….”
라실리아가 입을 다물고 황제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그간 저 얼굴에서 표정을 읽는 법을 익혔다. 황제는 거짓말을 하고 있진 않았다.
게다가 황제가 요구하는 대가는 늘 소박하다 못해 하찮았다. 설령 황제가 거짓말을 하더라도 자신은 손해 볼 게 아무것도 없었다. 메추리알 하나를 덜 먹는 정도였다.
“말씀하십시오. 무슨 얘기입니까?”
레스칼이 대답에 앞서 라실리아의 머리칼을 잠깐 어루만졌다.
하지만 이유 없는 접촉보다 라실리아를 당황하게 만든 것은 황제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얘기였다.
“파샤드 후작 부인이 그대의 비밀을 알고 있다더군.”
“……네?”
“신전에서 미끼를 물었다. 조만간 그 비밀을 빌미로 뭔가를 요구해 올지도 몰라.”
“…….”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은 다정했다. 그러나 라실리아는 방금 들은 말을 소화하느라 그가 어디를 만지고 있는지 느끼지도 못했다.
‘어떻게 그런…… 멍청한 짓을 할 수가 있지? 그 비밀을 감춰 준 본인도 무사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을 텐데.’
레스칼이 포크를 라실리아의 손에 쥐여 주었다.
“값을 치를 만한 얘기였다는 표정 같은데.”
“…….”
그래서 어쩌라는 건지 쳐다보고 있자 레스칼이 포크를 쥐여 준 손을 감쌌다.
“먹여 주기로 했잖아.”
그런 적 없었다. 그냥 주겠다고 했지.
라실리아가 레스칼의 손을 밀어냈다.
“말을 바꾸지 마십시오. 제 귀는 멀쩡합니다.”
레스칼이 입술을 실룩이며 라실리아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숙여 라실리아가 손에 쥔 포크를 제 입에 넣었다.
먹여 준 건 아니었지만 먹여 준 것과 비슷한 모양새가 되긴 했다.
음식을 씹어 삼킨 레스칼이 입을 열었다.
“말을 바꾼 게 아니야. 처음부터 먹여 달라는 의미로 한 말이었어.”
“…….”
“그럼 이번에는 제대로 말을 하지. 내가 신전이 그대를 귀찮게 구는 일을 해결해 준다면, 그때는 먹여 줄 건가?”
매번 말이 안 되는 짓을 하긴 했어도 라실리아는 황제가 예리하고 영리한 인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비밀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이대로 넘어갈 일은 없었다.
신전이 개입했다는 건 자신이 지금 짐작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복잡한 사정을 의미할 것이다.
성 말리크의 기사단은 마족과 전쟁을 벌인 마법사를 추앙하는 무리였고, 하리오스 신전은 그들을 신성 기사단으로 만들었다.
신전이 황후의 비밀을 손에 쥐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지 앞서 짐작하기가 두려웠다.
무엇보다 자신이 가짜라는 것을 알았을 때 황제가 어떻게 나올지 무서웠다.
그는 망설임 없이 칼을 들어 가짜의 가슴을 찌르게 될까.
“글쎄요.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라실리아가 등을 젖혀 살짝 거리를 벌렸다.
“무슨 비밀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폐하. 신전에서 비밀로 트집을 잡으려고 해도 제가 이래서야 그게 어디 가능하겠습니까?”
이쪽을 보는 금안이 가늘어졌다.
“……그래서 내 도움은 필요 없다는 뜻인가?”
“비밀이 뭔지 생각나면 그때 청하겠습니다. ……아, 후작 부인이 안다고 했으니 후작 부인에게 들으면 되겠군요.”
“후작 부인은 지금 신전으로 가는 중이다. 벌써 도착했을지도 모르고.”
“그래도 제 비밀이 뭔지 저도 알아야 하니까요. 오늘이 어렵다면 내일이라도 오라고 해야겠군요.”
라실리아가 포크를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달칵대는 작은 소리가 부디 동요로 들리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후작 부인을 부를 땐 어떻게 해야 합니까?”
라실리아가 묻자 레스칼의 눈매가 잠시 변했다.
이런 작은 일을 정말 몰라서 묻는 건지, 아니면 기억을 잃은 척하기 위해 일부러 묻는 것인지 가늠해 보는 것일지도 몰랐다.
“보통은 비서관에게 편지를 쓰게 하지. 급한 일이라면 직접 사람을 보내고. 비서관을 파샤드 후작가에 보내 주겠다.”
“감사합니다, 폐하.”
라실리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는 식사를 다 했으니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레스칼이 재빨리 라실리아의 손을 잡았다.
“아침 식사를 놓쳤으니 점심은 함께 하지.”
“……원하신다면.”
블루문이 지났는데도 황제는 별로 달라진 게 없어 보였다. 그게 의아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지고 드는 것보다 더 급한 일이 있었다. 후작 부인이 신전에 도착하는 일을 말려야 했다.
황후궁에 틀어박힌 상태에서 방법이 없는 게 당연했지만 이상하게도 방법이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점심에.”
“네, 폐하.”
식당을 나선 뒤 라실리아의 걸음이 점차 빨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