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그날 밤의 악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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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그날 밤의 악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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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그날 밤의 악몽
2022.12.21.
“뭐 하는 짓이야.”
레스칼이 피피를 향해 말했다.
속삭이는 것처럼 작은 목소리였지만, 어쩐지 음산했다. 달빛이 너무 파래서 그럴지도 몰랐다. 저 금안이 파란 달빛을 배경으로 더 도드라지게 드러나서 그럴 것이다.
“삐이이.”
라실리아도 살짝 겁을 먹을 정도였는데, 오히려 피피는 태연했다. 보란 듯 손바닥에 찰싹 몸을 붙이며 자기는 이렇게 자겠다고 했다.
“네가 왜. 당장 꺼져.”
레스칼의 흰 이가 드러났다. 피피가 팩 고개를 돌려 라실리아를 쳐다보았다.
“삐이. 피이.”
피피가 잠투정을 해댔다. 잠이 올 때까지 머리를 쓰다듬어 달라고 했다.
‘얘 좀 일부러 이러는 것 같은데…….’
이유는 모르겠지만 피피는 황제를 싫어했다. 그건 황제도 마찬가지였다.
“꺼지라는 말 안 들리나?”
“피!”
레스칼이 피피를 향해 손을 뻗었다. 저절로 입이 열렸다.
“폐하!”
“……?”
레스칼이 주춤 멎었다.
“작은 새를 상대로 너무 과하십니다.”
“…….”
레스칼이 인상을 썼다.
“전혀 과하지 않아.”
“과해 보입니다.”
“어째서?”
레스칼은 몹시 진지했다.
“피피는 몸집이 작으니까요. 자리도 얼마 차지하지 않는데 굳이 내쫓을 이유가 없습니다. 셋이 자도 침대는 넉넉할 겁니다.”
“자리 문제가 아니야.”
“그럼 뭐가 문제입니까?”
“저게 저러고 있으면……,”
레스칼이 입술을 실룩였다.
“있으면요?”
레스칼의 눈이 힐긋 피피가 찰싹 몸을 기대고 있는 라실리아의 손을 향했다.
“……내가 그대의 손을 잡을 수 없다.”
“아…….”
……자는데 손은 왜 잡아.
라실리아가 저도 모르게 콧등을 찌푸렸다.
“손이라면 낮에 잡은 걸로 아는데요. 아직 약속한 횟수가 더 남아 있었습니까?”
“……아니. 그건 아니지만.”
“그럼 상관없지 않습니까.”
“…….”
금안이 느리게 한 바퀴 굴렀다. 라실리아는 몰랐지만 그건 레스칼이 손을 잡아도 되는 이유를 필사적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아니, 있을지도 몰라.”
있으면 있는 거지 있을지도 모른다는 건 또 뭐야.
라실리아가 계속 해 보라는 듯 레스칼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내가 그대의 부탁을 들어주면……, ……아, 내가 황실 재단사를 불렀다.”
“네? 저는 재단사를 부탁드린 일이 없습니다.”
“옷장이 반이나 비었다고 들어서.”
그런 시시콜콜한 일도 전부 황제의 귀에 들어가는 줄 몰랐다.
“그런 일이 있긴 했지만 여전히 옷은 차고 넘칩니다.”
“그럼 나는 손을 잡을 수 없나?”
다시 말하지만 황제는 저런 이상한 소리를 하는데도 몹시 진지했다.
처음에는 조금 웃겼는데, 지금은 그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진지함도 감기처럼 옮는 모양이었다.
“……후우, 아니요.”
결국 진지함에 졌다.
다 입지도 못할 옷을 이베트에게 준 일은 별게 아니었지만, 그걸 황제가 알고 재단사를 부른 사실에는 가슴이 조금 간질간질해졌다.
‘……대가를 꼭 요구하긴 하지만.’
그런데 옷장을 다시 채워 주는 대가가 하룻밤 손을 잡는 거라면 거절하는 쪽이 야박하게 느껴질 만큼 소박하긴 했다.
“그럼 이렇게 하는 걸로 해요. 이쪽 손은 폐하가, 이쪽 손은 피피가.”
“피피?”
“피!”
둘 다 전혀 다른 부분에서 반응하는 바람에 오히려 라실리아가 놀랐다.
“이름을 지어 줬나? 이름이 피피라고?”
“삐이! 피피핏!”
둘 다 기분이 썩 좋진 않아 보였다. 피피는 제 이름이 그냥 피피가 아니라 더 길고 멋진 이름인데 라실리아만 특별히 피피라 부르는 것이라고 몇 번씩 강조를 했다.
황제는 왜 기분이 나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름……. 이름이라고.”
레스칼이 눈가를 찌푸리며 관자놀이를 만지작대다 다시 입을 열었다.
“나도 이름으로 불러 줘.”
“네……?”
“삐잇!”
새를 이름으로 부른다고 자기도 새처럼 취급해 달라는 황제나, 그걸 결사반대한다고 빽빽 성질을 내는 새나 둘 다 이해가 안 가긴 마찬가지였다.
“폐하를 이름으로 부르는 사람도 있습니까?”
“지금은 없다.”
“네. 그러면 안 되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대는 괜찮아.”
“아니요. 괜찮지 않습니다.”
“그대는 전부 괜찮아.”
“…….”
이상했다.
간질간질하던 마음이 이제는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전부 괜찮다는 게 무슨 뜻인지도 잘 알 수가 없었는데, 그냥 마음이 알아서 혼자 무거워졌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불편한데.’
라실리아가 은근슬쩍 시선을 피했다.
“그건 좀 생각해 보겠습니다.”
“왜?”
“아직은 폐하가 낯설어서요. 이름을 부를 만큼 허물없는 사이는 아닌 것 같습니다.”
“아직이라면 나중에는 된다는 소린가?”
“그것까진 말씀드리지 못하겠습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왜 모르겠다는 건데. 새는 이름도 지어 줬잖아.”
“새는 새니까요.”
“뭐가 다르지?”
“새와 폐하가 어떻게 같을 수 있습니까. 그리고 이만 잤으면 합니다. 우리가 시끄러워 남들도 잠을 이루지 못할까 걱정스럽습니다.”
“삐이! 삐!”
피피가 소란스럽게 날개를 퍼덕였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그만 잠이나 자라는 말이었다.
“……그럼 오늘은 손을 잡는 것으로 양보하지.”
뭐가 양보라는 건데.
레스칼이 라실리아의 손을 끌어와 쥐었다. 피피가 솜털과 다를 게 없는 짧은 깃털을 부풀리며 짜증을 부렸다.
레스칼은 피피를 힐긋 노려보고 난 다음 라실리아의 손등에 입술을 댔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면 기다리겠다. 그대가 내 이름을 부르는 날을.”
“…….”
부드럽게 손등을 덮는 입술의 감촉을 느끼며 라실리아가 입술을 잘근 물었다.
‘아, 제발……. 이런 건 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그냥 막무가내로 끌어안고 입술을 대는 게 차라리 나을 것 같았다. 그런 건 밀어내면 그만이었으니까.
그게 아니라 황제가 지금처럼 정중하고 사려 깊게 나오면 라실리아는 오히려 그게 더 대응하기 어려웠다.
‘그냥……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라 그래. 그뿐이야.’
라실리아는 억지로 자신이 죽던 날 꿨던 짧은 꿈을 떠올렸다. 가슴에 칼이 꽂혀 피가 흐르던 고통과 한 올의 연민도 없던 황제의 차가운 금안을 되새겼다.
잊지 마.
이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 나는 죽어.
라실리아가 애써 태연한 목소리를 냈다.
“이만 자고 싶습니다. 피곤해서.”
“뜻대로.”
절대 놓지 않을 것 같았던 손을 놓은 황제는 라실리아가 의아해하는 사이 베개를 머리 밑에 놔주었다.
“아……. 감사합니다.”
“천만에.”
이불을 턱 아래까지 잘 끌어올려 준 그가 라실리아의 옆에 반듯이 누웠다.
“삐이. 삐삐.”
피피는 계속 잠투정을 해댔다.
라실리아는 피피의 보드라운 머리통을 가만히 쓰다듬으며 시간을 헤아렸다.
이불에 가려진 손을 황제가 끌어다 꼭 쥐었다.
손을 잡은 채 나란히 누워서 잠을 청하는 기분은 굉장히 이상했다.
라실리아는 그날 악몽을 꿨다.
악몽이라고 하기엔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자신이 가운데 있고, 마족과 붉은 깃털을 지닌 새가 앞뒤로 다투는 그런 꿈이었다.
현실과 달랐던 점은 둘이 다투는 게 그저 말싸움에 그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붉은 새가 까악 하고 울면 주변이 전부 불타올랐다. 마족이 손을 움직이면 칼날 같은 바람이 일어나 불꽃을 잘라 냈다.
그 사이에 낀 자신은 어쩐 일인지 상처 하나 입지 않았다. 하지만 꽤 살벌한 꿈이라 라실리아는 밤새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 * *
“좋은 아침입니다, 황후 폐하. 잘 주무셨어요?”
아침은 이베트의 산뜻한 인사와 함께 시작했다.
라실리아는 묘하게 지친 얼굴로 침대 커튼을 걷는 이베트를 마주했다.
“아니. 꿈을 너무 오래 꿨어.”
“저런. 어떤 꿈이었는지요?”
“……좋은 꿈은 아니었지.”
아직도 불꽃과 태풍의 한 중간에 서 있는 기분이라 라실리아가 흠칫 어깨를 떨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침대에 혼자 자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피피는?”
“아, 렌 님은 공작님과 함께 계세요.”
“슈라이든 공과? 아침부터?”
“네. 두 분이 함께 볼일이 있으시대요.”
피피와 황제는 새벽에 일어났다고 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피피가 그 시간부터 시끄럽게 구는 바람에 황제가 피피를 데리고 침실을 나왔다고 했다.
둘이 뭔가 한바탕 말씨름을 하는 듯하더니 그 길로 피피는 슈라이든 공작을 찾아갔다.
황제는 전언을 받고 황제궁으로 돌아갔다. 그림자 기사 리얀 시그레스가 심각한 얼굴로 황제를 모셔갔다고 했다.
“그런 일이 있었는데 나는 몰랐다는 건가?”
라실리아가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예언자의 방은 숨 막힐 정도로 어둡고 조용한 곳이었다. 그런 곳에서 평생 지내온 라실리아는 자연 귀가 밝았다.
예언자는 신의 계시가 내려올 때에는 아무데서나 잠이 드는 체질인 만큼, 잠에서 깨어나기도 쉬웠다.
새벽에 제 곁에서 자던 이가 둘씩이나 사라졌는데도 하나도 모른 채 깊이 잠들었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침실은 조용했으니까요. 게다가 악몽을 길게 꾸셨으면 잠이 깨지 않을 만도 하지요.”
침실은 조용했다는 게 무슨 말일까.
어쩐지 피피가 잠든 자신에게 치댈 때 가차 없이 낚아채 밖으로 들고 나가는 황제가 연상되었다.
“……그런 걸로 하지.”
라실리아는 잠든 사이에 벌어진 일을 애써 생각하는 것은 그만두기로 했다. 설령 황제가 제 생각처럼 굴었다고 한들,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오늘 조찬은 함께 하지 못하신다는 폐하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몹시 아쉬워하셨어요.”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라실리아가 이불을 걷고 일어났다.
“지금 몇 시지? 내가 늦잠을 잤나?”
“아닙니다, 황후 폐하. 늘 일어나시던 시간에 눈을 뜨셨습니다.”
“다행이군. 세수를 하고 싶다.”
“네, 황후 폐하. 물을 준비해 놓았습니다. 이쪽으로.”
이베트가 살뜰한 손길로 발밑에 슬리퍼를 놓아주었다.
* * *
“그새 소식이 하나 더 도착했습니다.”
세르벤이 굳은 얼굴로 레스칼에게 밀서를 내밀었다.
새벽에 온 첫 번째 밀서에 이어 두 번째였다. 몇 시간 간격으로 밀서가 도착하는 일은 드물었다. 그만큼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밀서를 보낸 곳은 황실 근위대 소속의 비밀 정보 수집 기사단이었다. 체계상 근위대 소속이긴 하지만 이 기사단의 정체를 아는 자는 드물었다.
이들의 역할은 제국 곳곳에서 황실에 도움이 되거나 혹은 위협이 될 만한 정보를 수집해 알리는 것이었다.
황제의 수호기사에게 그림자 기사라는 별칭이 붙었듯이, 알려지지 않은 이들에게도 은의 방패라는 이름이 있었다.
“이번에는 뭐라는데?”
평소처럼 집무실 바닥에서 뒹굴대는 대신 창틀에 앉아 있던 리얀이 재빨리 다가왔다.
세르벤의 새벽잠을 깨운 첫 번째 밀서는 하리오스 신전 소속의 신관이 비밀리에 파샤드 후작가를 방문했다는 내용이었다.
두 번째 밀서는 그 다음에 벌어진 일이었다.
“후작 부부가 마차를 탔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하리오스 신전을 향해 가는 것 같습니다.”
레스칼이 미간을 찌푸렸고, 리얀이 관자놀이에 핏대를 세웠다.
“뭐야, 그건……. 파샤드 후작이 황후 폐하의 비밀이 어쩌고 지껄이자마자 신전에서 낚아챘다는 거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