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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불사조가 의미하는 것 (31/96)


31. 불사조가 의미하는 것
2022.12.18.



 
어제는 허락을 미리 구하지 못해 바닥에서 잤다는 말이었다.

레스칼은 먼저 잠든 라실리아를 침대로 옮긴 게 자신이었다는 말을 두 번이나 강조했다.

그러니까 미안하면 침대 옆자리에서 자게 해 달라는 뜻이라는 걸 모를 수가 없었다. 피피가 뻔뻔한 인간이라며 대신 짜증을 내 주었다.

얌전히 바닥에서 잔 걸 보면 동침은 기억을 되찾은 이후로 하자는 약속을 무시할 인간은 아니었다.

아는데도 왠지 좀 긴장이 됐다.


‘그래도 오늘이 마지막이니까.’

내일부터는 부디 황제가 평소대로 돌아가길 바랄 뿐이었다.


“빗질은 이만 할까요, 황후 폐하?”

잠옷을 입고, 머리를 빗겨 주는 마지막 일을 마친 이베트가 물었다.

긴 머리는 충분히 매끄러웠다.


“그래. 수고했다.”

“아이 참. 무슨 말씀이세요. 마땅히 제가 할 일인걸요.”

이베트는 하루 종일 바빴다.

자잘한 몸시중을 드는 것 외에도 시녀들의 빈자리를 정리하고 궁인들과 얘기를 나눠야 했다.

궁인들은 연달아 벌어진 일들로 아직 어리둥절한 상태였다. 매사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시켜 대는 시녀들이 전부 사라졌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이베트는 영리하게도 궁인들이 맡았던 일과 구역을 싹 바꾸었다. 평소 하던 일이 아니라 익숙하지 않은 일을 하게 된 궁인들을 하루 정도 허둥거리게 만들었다. 그사이 궁인들은 황후궁이 달라졌다는 것을 실감할 테고, 시녀들이 없는 새로운 체계에도 적응을 하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는 그 생각이 잘 먹히는 듯 보였다.

황후와 한 몸이 된 것처럼 거만하게 굴던 시녀들과 친하게 지내던 궁인들이 없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물론 어느 날 갑자기 신분이 달라진 이베트에 대한 반발도 있겠지만 시녀들만큼은 아닐 것이다.

라실리아가 이베트의 손등에 손을 올렸다.


“그 외에 달리 힘든 일이 생기면 말을 하도록. 나는 네가 어려운 일을 겪게 만들기 위해 시녀로 삼은 게 아니야.”

“물론이죠, 황후 폐하! 어찌 그런 생각을 하겠어요. 그런데 지금까진 정말 괜찮아요. 오늘만 해도 시녀님들이 한 분도 계시지 않았지만 별 문제 없었잖아요.”

“그래. 네가 잘 하고 있다는 것은 알겠어. 하지만 별개로 필요한 일이 있다면 말을 아끼지 말도록.”

“제 동생들까지 입궁시켜서 저와 한 방을 쓰도록 해 주셨잖아요. 귀한 옷도 그렇게 많이 주셨고요. 필요한 게 또 뭐가 있겠어요. 그저 감사하고 영광스러울 뿐입니다, 황후 폐하.”

이베트가 진심이라는 것은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삐이.”

피피가 졸린 얼굴로 어디선가 날아왔다.

낮에는 조금 날고 피곤하다 칭얼대더니 저녁이 되자 너끈히 방 안을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이러다가 눈 깜짝할 새 성체가 되어 버릴지도 몰랐다.


“렌 님은 그만 자고 싶으신가 봐요. ……아, 그런데 폐하가 아셨다죠? 그래도 곤란한 일은 없는 건가요?”

이베트가 묻자 라실리아가 미간을 약간 찡그렸다.


“그럴지도 모르겠어.”

“헛, 저런. 그럼 제가 뭐 해 드릴 일은 없을까요?”

있기야 했다. 그러나 라실리아는 자신의 비밀에 계속 이베트를 끼워 넣고 싶지 않았다.

아는 게 적을수록 이베트는 안전했다.


“일단 피피가 말을 할 줄 안다는 건 모르는 척 해 줘.”

“아……? 왜 그런……, ……아니, 아닙니다. 따르겠나이다, 황후 폐하.”

이베트는 황후가 반려라는 걸 다들 아는데 왜 굳이 그런 사실을 감춰야 하는지 의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거기까진 묻지 않았다. 라실리아가 시키는 일이라면 뭐든 받아들이겠다는 의미였다.


“고마워.”

“네? 아니, 무슨 말씀이세요. 황송합니다, 황후 폐하.”

빗질을 마지막으로 잠잘 준비가 모두 끝났다.

이제 남은 일은 황제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 * *


“뭐랄까……. 정말로 조용하군요.”

황후궁으로 향하는 레스칼의 등 뒤에서 리얀이 작게 말을 붙였다.

오늘 알현실이 시장통처럼 북적북적댔던 이유는 황후궁에서 벌어진 일의 여파였다.

시작은 파샤드 후작이었다. 그는 황후궁의 제1시녀였던 부인이 하루아침에 쫓기듯 출궁을 당한 사실을 놓고 분노했다.

평소의 레스칼이었다면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을 얘기였다. 그러나 레스칼은 후작의 말도 안 되는 성토를 끝까지 들었다. 새삼 그가 궁이 돌아가는 시시콜콜한 속사정에 관심이 생겨서는 아니었고, 황후에 관계된 일이라 그랬을 것이다.

그 와중에 쫓겨난 다른 시녀들의 부친과 남편들도 줄줄이 알현실을 찾아왔다.

국무대신과 궁내관이 더 급한 국정이 밀려 있다며 발을 동동 구르지 않았으면 알현실은 문짝이 뜯겨 나갔을지도 몰랐다.


“황제궁은 그 난리가 났는데 말입니다.”

“덕분에 황후가 조용히 지낼 수 있었다면 다행이다.”

리얀이 작게 웃었다.

레스칼이 지금 하는 게 구애라면, 그는 정말 잘하고 있었다.

레스칼이 하는 말이나 행동을 보면 그가 황후에게 진심이라는 것을 의심할 수 없었다.

황후는 진짜 반려가 맞았다. 레스칼이 진심이 된 것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문제는 그 황후가 기억상실이라는 말로 무엇을 감추고 있는지였다.


“파샤드 공이 한 말은 신경이 쓰이지 않으십니까?”

궁내관이 근위대를 시켜 끌어내기 직전, 파샤드 후작이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황후가 말도 안 되는 핑계로 자신의 아내를 궁에서 내쫓은 이유가 따로 있다고 했다. 자신의 아내가 황후가 감추고 있던 비밀을 우연히 알았고, 그걸 입막음하기 위해 내보낸 것이라 했다.

몹시 위험하고 추잡한 비밀일 것이라 했다. 그걸 아는 사람은 아내가 유일하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정작 자신은 그 비밀이 뭔지는 모른다고 잡아뗐다.


“어쩌면 사실일지도 모르는데요. 그만한 비밀이 있다고 한다면 황후 폐하께서 갑자기 기억상실에 걸리신 것도 설명이 되지 않습니까.”

“어쩌면.”

레스칼은 심드렁했다.


“그런데도 아무런 조처를 하지 않으실 겁니까?”

“황후는 나의 반려고, 내 곁에 있다. 그 외에 내가 무얼 신경 써야 하나.”

“으음, 그게……. 사실 황후 폐하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지 않습니까. 폐하의 반려이면서 그간 동침을 피한 것에 대해서도, 그 저의가 무엇 때문인지도요. 지난 사 년간 아무런 의도가 없었다고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의도라……. 황후가 의도적으로 동침을 피해서, 그 다음에는? 내가 마족으로 완전히 변이하는 걸 보겠다는 건가?”

상식적으로는 말이 안 되는 얘기였다.

황제의 몰락은 황후의 몰락과 마찬가지였다. 레스칼이 마족이 된다면 카르타헤나의 앞날 또한 장담할 수 없었다.


“물론 말이 안 되는 얘기인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황후 폐하께서는 워낙 말이 안 되시는 분이니까요. 만에 하나라도, 황후 폐하께서 성 말리크 같은 불온 세력과 손을 잡았다면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건 말이 안 돼.”

“어째서 확신하십니까?”

“불사조가 태어났으니까.”

“불사조…… 네?”

리얀이 눈을 끔벅댔다.


“불사조…… 라고요? 그러니까 그,”

“반려에게 준 심장의 일부. 그게 태어났다는 건 양쪽이 하나로 묶였다는 뜻이다. 너도 알다시피 그간 불사조가 다시 태어난 일은 없었다. 최초의 반려가 죽고 불사조 역시 사라졌지. 제국에서 불사조가 존재한 건 그때뿐이었다.”

“네. 기록상으로는 분명 그렇습니다만……. 불사조를 보셨습니까?”

“황후가 데리고 있던데.”

“네? 그런데 세르벤이 몰랐다고요?”

“덜 자랐어. 엄지손가락만 하다. 감춰 두고 있었던 것 같아.”

“아……. 아무리 그렇다 해도 그걸 눈치 못 채다니. 쯧.”

어쩌면 그 붉은 돌 조각이 알껍질이었을 것이다. 그걸 훔쳤으니 새들이 뒤집어질 만도 했다.

리얀이 잠시 자신의 철없던 행동을 반성했다. 그 알을 내내 돌이라고 생각해서 제 주머니에 대충 넣고 다녔다면 불사조는 태어나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불사조가 태어났다면 더는 의심할 것도 없겠군요. 그럼 파샤드 공이 한 말은 대체 뭐였을까요?”

“내 앞에서 거짓을 고한 게 아니라면 황후가 뭔가를 숨기고 있었다는 건 사실일 것이다.”

“다만 폐하께서는 황후 폐하께서 진짜 반려이니 뭐든 상관없다는 말씀이시군요.”

레스칼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황후를 내 눈밖에 놔둘 생각이 없다. 황후가 무슨 마음이든 황후는 나를 떠나지 못해.”

“아, 하……. 그렇군요.”

리얀이 어쩐지 조금 무섭다고 생각하며 뒷목을 긁적였다.

마족의 피가 제 운명의 반려를 두고 하는 말이니 평범한 인간과는 당연히 다르겠지만, 그만큼 평범한 인간이라면 받아들이기 어려울지도 몰랐다.


“황후가 지금은 나를 싫어할지도 모른다는 건 알고 있어.”

몇 걸음 더 걷던 레스칼이 불쑥 이런 말을 내뱉었다.
생각을 딱 들킨 것 같아 리얀이 민망해진 얼굴로 목덜미를 긁었다.


“엇, 싫어하시지는 않을 겁니다. 일전에 이유도 말씀드렸습니다만.”

“나와 같은 마음이 아니라는 건 확실하니까. ……그런데 결국은 황후도 나를 좋아할 것이다.”

리얀이 레스칼의 표정을 살폈다. 무표정과 구분 짓기 어려운 희미한 미소가 드러나고 있었다.


“그건 불사조가 태어나서입니까?”

“맞아.”

리얀이 레스칼을 따라 하듯 웃었다.


“그렇다면 감사를 해야겠군요. 불사조는 뭘 좋아합니까, 폐하? 간식거리라도 바쳐야 할 것 같은데.”

“그건 됐어.”

레스칼의 미소가 씻은 듯 사라졌다. 그게 다가 아니라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기까지 했다.


“너까지 잘해 줄 필요 없다. 그렇지 않아도 건방지니까.”

“어, 음? 그건 좀……. 폐하께서 불사조를 싫어하시는 것처럼 들리는데…….”

“싫어.”

레스칼이 딱 잘라 말했다.


“아이고, 저런. 불사조는 두 분을 잇는 존재 아닙니까?”

“아니. 나의 일부겠지. 내가 곁에 없을 때 반려를 지키기 위한.”

“그런데 싫어하신다고요?”

“어쩔 수 없이 놔두는 것이다. 기꺼워서가 아니라.”

“아하.”

리얀은 레스칼이 불사조를 싫어하는 이유를 깨달았다.


‘동족혐오겠군.’

덜 자랐다는 불사조는, 아마도 레스칼과 똑같이 굴고 있지 않을까.

하지만 겉모습은 작고 귀여운 새일 테니 황후가 불사조를 멀리할 일은 없을 것이다. 레스칼과는 다르게.


‘자리를 빼앗긴 기분이 드실지도.’

리얀이 속으로 킥킥 웃었다.

저 싫다는 감정의 이름은 질투일 것이다.

* * *

그리고 황후와 마침내 한 침대에서 자게 된 오늘, 질투는 정점을 맞이했다.


“삐이이!”

잠옷을 입은 황후가 침실 문을 열어 주었다. 레스칼은 솜털 한 올까지 긴장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했다.

숨을 쉬지 못한 채 겉옷을 벗고, 페르손이 입혀 주는 가운을 받아 입었다. 침대까지 무슨 정신으로 걸어갔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불을 끄겠습니다.”

페르손이 침실의 불을 끈 뒤 정중한, 그러나 지금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긴 인사를 남기고 떠났다.

둘만 남은 침실을 파란 달빛이 채웠다.

온몸이 돌덩이가 된 것 같기도 했고, 물 위에 둥실 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어서 폐가 아플 정도였다.


“어쩐지 긴 밤이 될 것 같군요.”

황후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레스칼은 터질 것 같은 심장을 부여잡은 채, 혹시 손을 잡을 수 있는지 물으려고 했다.

그때였다.


“삐이잇!”

덜 자란 시건방진 새가 날아와 보란 듯 황후의 손바닥 안으로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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