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메너스컬렌 엘링키어 바이야르 피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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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메너스컬렌 엘링키어 바이야르 피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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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메너스컬렌 엘링키어 바이야르 피피
2022.12.14.
시녀들에게는 총 열 권이나 되는 예법서를 전부 다 읽으라는 벌이 주어졌다.
예법서가 열 권이나 되는 것은, 제국의 긴 역사 동안 예법도 자잘하게 계속 바뀌었기 때문인데 그건 라실리아가 알 바가 아니었다.
파샤드 후작 부인과 마찬가지로 독서를 마치기 전까지는 궁에 출입 금지였다. 여덟 명이나 되는 시녀들이 데려온 하인들과 함께 썰물처럼 빠져나간 황후궁은 간만에 한적해졌다.
“정말 그래도 되는 건지 모르겠어요.”
식은 찻물을 한 모금 꿀꺽 삼킨 뒤 이베트가 입을 열었다.
차가 식은 이유는 이베트가 계속 손을 떠느라 찻잔을 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황후와 단둘이 다과 시간을 갖는 것은 제1시녀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그마저도 자주 있는 일이 아니었다.
몇 번이고 찻잔을 쥐었다가 금방이라도 떨어트릴 것 같다며 울상을 짓던 이베트는 차가 다 식고 나서야 간신히 손떨림을 멈추었다. 차를 마시기 직전의 표정은 비장하기까지 했다.
어쨌거나 마셔 보니 차는 차였다.
그야 물론 종잇장처럼 얇은 찻잔은 끝내주게 비쌌고, 차는 식어도 떫은 맛 하나 없이 부드럽고 향긋해서 꼭 꿈같았지만, 그래도 차는 차였다. 마시면 되는 일이었다.
“시녀님들이 안 계실 동안 제가 과연 빈자리를 잘 채울 수 있을까요? 잘 할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너무 건방진 생각 같기도 하고……. 아이 참, 정말 모르겠어요.”
“삐!”
라실리아의 손바닥에 앉아 케이크 위에 얹힌 조림 체리를 받아먹던 피피가 빽 소리를 질렀다.
“피피가 걱정하지 말라는데. 잘 할 수 있을 거래.”
사실 그것보다는 좀 더 거친 표현이었지만 라실리아가 적절히 말을 바꿔 들려 주었다.
이베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피피는 그런 걸 어떻게 아는 거죠? 이제 갓 태어난 작은 새잖아요? 아니, 물론 엄청난 새긴 하지만.”
“삐잇!”
피피가 고개를 좌우로 마구 흔들었다.
“앗, 화난 것 같은데……. 제가 말을 잘못했나요?”
“음……. 네가 아니라 내가 실수한 모양이야. 피피라는 이름이 마음에 안 드나 봐.”
정확히는 이베트까지 자신을 피피라고 부르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다.
“아……. 하긴. 새들의 왕인데 피피라는 이름은 너무 아기 같죠.”
“삐!”
“그럼 이름을 다시 지어야 하나? 그게 낫겠어?”
“피이.”
피피가 조금 애매한 대답을 했다.
다시 지을 필요는 있지만 피피라고 부르는 것은 괜찮다는 말이었다.
“음……. 피피가 싫은 게 아니라면서 왜 다른 이름이 필요한데?”
“삐이잇.”
“피피는 새들의 왕과는 어울리지 않으니까. 그래, 그런데?”
“피이 피이.”
“아, 나는 그렇게 부르라고? 왜 나만?”
“피이…….”
피피가 작은 날개를 모아서 배배 꼬았다. 왠지 부끄러워하는 모습 같았다.
“뭐가 부끄러워?”
“삐!”
라실리아가 이해를 못 하자 이번에는 성질이었다. 눈을 쭉 찢은 피피가 대꾸를 하는 대신 케이크 접시로 내려가 열정적으로 케이크를 쪼아 먹었다.
“그게 참 피…… 피피 님은 황후 폐하를 정말 많이 좋아하시나 봐요.”
피피라는 이름이 싫다고 하니 그 뒤에 조심스럽게 님이 붙었다.
“삐잇!”
피피가 케이크를 먹던 와중에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아무래도 이름을 새로 지어야겠어.”
라실리아의 말에 이베트가 냉큼 일어섰다.
“제가 작명서를 가져올까요? 아니면 연대기라도? 거기에는 역대 귀족들의 이름이 전부 나와 있으니까요.”
“그런 거라면 네가 이미 알고 있지 않아?”
“아……! 그렇네요.”
이베트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삐이?”
사람 둘과 새 한 마리가 머리를 맞대고 이름을 고심하기 시작했다.
두 시간가량 흘렀을 때, 피피는 최종적으로 메너스컬렌 엘링키어 바이야르 피피라는 긴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 * *
“그럼 렌 님, 앞으로 이렇게 부르면 될까요?”
님을 붙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존대가 따라오게 되었다.
피피는 그게 한결 더 마음에 드는 듯 고개를 당당히 치켜들었다.
“삐이.”
“응. 그게 좋겠대.”
이베트가 활짝 웃었다.
“다행이에요. 새 이름이 마음에 드셔서.”
“삐삐. 삐이.”
피피가 기분이 좋은 듯 날개를 파닥거렸다.
“어?”
“음?”
그러자 작은 몸이 허공에 둥실 떠올랐다.
“렌 님! 날고 계세요!”
“벌써 날다니……. 너무 빠르지 않나?”
“그러게요. 태어난 지 이제 사흘도 안 되셨는데.”
티테이블에서 한 삼십 센티미터쯤 떠올라 한참 파닥대던 피피가 헥헥대며 다시 케이크 접시 위에 앉았다.
“피, 피…….”
“지쳤다고 하네.”
“아, 그럼 물이라도 드시겠어요?”
눈치 빠른 이베트가 빈 그릇에 물을 따랐다.
피피가 라실리아의 손을 콕 쪼았다. 물을 먹여 달라는 뜻이었다.
“엄살쟁이. 혼자 마실 수 있을 거면서.”
라실리아가 피식 웃으며 피피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물을 따른 그릇을 기울여 입에 대주었다.
그때였다.
“피이?”
갑자기 피피가 고개를 홱 치켜들었다.
동시에 근위대의 목소리가 울렸다.
“황제 폐하 드십니다!”
“앗,”
당황은 빨랐다. 라실리아가 피피를 잡아 설탕단지에 넣고 뚜껑을 닫았다. 이베트의 머리칼 속이 가장 좋겠지만 지금 급하게 숨기다 보면 이베트의 머리 모양을 망가트리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오셨습니까.”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종일 알현실에서 귀족들과 궁내관, 국무대신을 상대했다는 황제가 어쩐지 지친 듯한 모습으로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내게 손을 한 번 잡을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걸 기억하나?”
기억하고 말 것도 없이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이었다.
“네. 알고 있습니다.”
“지금 써야 해. 아깝지만.”
“그러시군요.”
반은 레스칼이 억지로 만든 기회였지만 그냥 손을 내어주기로 했다. 어쨌거나 블루문이었으니까.
라실리아가 손을 내밀었다.
레스칼은 선뜻 손을 잡는 대신 같은 말을 한 번 더했다.
“진짜 아까운데.”
그래서 어쩌라는 걸까.
“……그럼 나중에 잡으십시오.”
“아니, 지금 잡아야 해.”
“그럼 잡으세요.”
“……아까워.”
뭐가 아깝다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표정을 보면 뭔가를 아쉬워한다는 건 확실했다.
어쨌거나 레스칼이 손을 잡았다. 처음에는 손가락 부분을 잡은 그가 고개를 숙여 손바닥에 대고 숨을 들이쉬었다.
“뭐…… 하시는 겁니까?”
어쩐지 불편하고, 조금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라실리아가 손을 비틀자 레스칼이 손바닥에 입술을 댄 채 작게 대꾸했다.
“이상해서.”
“어떤 게요?”
“그대의 냄새가 아닌 냄새가 맡아져.”
“……?”
“익숙한 냄새인데,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아.”
“…….”
그 말에 안색이 새파래지는 건 이베트였다.
“소, 송구합니다. 제가 황후 폐하를 잘 보필하지 못해서…… 씻을 물을 가져올까요?”
라실리아와 레스칼이 거의 동시에 말을 했다.
“아니. 괜찮,”
“그게 좋겠군.”
“아……?”
난처해진 이베트가 그대로 굳었다.
레스칼을 한 번 힐긋 쳐다본 라실리아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져오도록.”
“네, 네. 황후 폐하.”
이베트가 뒤꿈치를 들고 후다닥 밖으로 나갔다. 눈치껏 함께 자리를 비킨 세르벤과 리얀 덕분에 사실에는 황제와 황후 둘만 남게 되었다.
“……제 손에서 냄새가 나는 줄은 몰랐군요.”
라실리아가 원래 앉아 있던 일인용 소파에 앉자, 레스칼이 자연스럽게 팔걸이에 걸터앉았다. 그는 기억을 잃기 전 원래 나란히 앉는 사이였다는 거짓말을 꿋꿋하게 고수하는 중이었다.
그래도 냄새가 난다니 신경이 쓰여 냄새를 조금 맡아 보긴 했다. 희미한 차향이나 과자 냄새가 나는 것 같긴 했지만 그게 다였다.
“내 후각은 보통 인간과 다르다.”
레스칼이 고개를 옆으로 숙여 머리를 살짝 기댔다.
“과자나 차 말고 다른 냄새가 난다는 말입니까?”
“그래. 살아 있는 것의 냄새가 나.”
……설마 피피를 말하는 건 아니겠지.
라실리아는 설탕단지로 향할 뻔한 시선을 애써 붙들었다.
“그렇다면 이베트의 냄새겠군요.”
“아니. 공녀의 냄새도 아니다.”
그럼 정말 피피를 말하는 것 같은데…….
“이상한 일이군요. 시녀들 외에는 딱히 사람들을 대하지는 않았는데.”
“단순히 사람들하고 같이 있었다고 냄새가 남지는 않아. 이건 손으로 직접 만졌다는 뜻이다.”
……예리하긴.
“자리가 불편하진 않으십니까? 원하신다면 더 넓은 의자로 옮기겠습니다.”
라실리아가 말을 돌렸다.
레스칼이 라실리아의 손을 잡은 채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게 지금 여기 있나?”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네? 무슨 말씀입니까?”
“그대가 이 손으로 만진 그게, 여기에 있냐고.”
“…….”
아니라고 해야 했다. 그러나 황제의 금안은 도무지 거짓말이 통할 것 같지 않았다.
그때였다.
“삐이!”
퍽!
피피가 설탕단지 뚜껑을 머리로 들이받으며 뛰쳐나왔다.
“피! 삐!”
파득파득 날아온 피피가 레스칼을 향해 위협적인 소리를 내며 라실리아의 손등 위에 앉았다.
“피피! 피이!”
“이건……,”
피피를 바라보는 금안이 가늘어졌다.
라실리아가 감추듯 피피를 손으로 감싸 안았다.
“새를…… 주웠습니다. 어미가 버리고 간 것 같아서.”
“…….”
“저를 잘 따르는 것 같아 곁에 둘까 합니다. ……어미가 나타날 때까지만이라도.”
그러니까, 피피의 주인인 진짜 반려가 나타날 때까지만.
“……그대가 원한다면 반대할 수는 없겠지.”
레스칼이 느릿느릿,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투로 답을 했다.
“마음에는 안 들지만.”
“삐이! 삐!”
피피도 피차일반이라며 핏대를 세웠다.
레스칼이 어이없다는 듯 눈썹을 구겼다.
“덜 자란 게 겁이 없군.”
“아……?”
마치 피피의 말을 알아듣는 것 같아 라실리아가 움찔했다.
“삐! 피!”
피피가 금방 자랄 거라며 받아쳤다. 레스칼이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다 자라고 나서 얘기해라.”
“피! 삐이잇!”
피피가 너야말로 의자에 앉는 법이나 똑바로 배우라며 붕붕 날갯짓을 해댔다.
그 사이에서 라실리아는 입을 다물었다.
“…….”
확실했다. 레스칼은 피피가 하는 말을 알아듣고 있었다.
‘마족의 새니까…… 당연히 그렇겠지.’
조심해야 하는 일이 또 하나 늘었다. 거기서 설탕단지 뚜껑을 깨부수고 뛰쳐나온 피피가 조금 원망스러웠다.
‘피피가 말하는 걸 못 알아듣는 척하는 수밖에.’
라실리아가 화제를 돌렸다.
“새가 참 귀엽지 않나요? 벌써부터 나는 연습을 하는 것 같습니다. 다 자라면 아주 멀리 나는 튼튼한 새가 되겠습니다.”
“별로. 다 자라면 성질머리가 더러워지리라는 건 알겠어.”
“삐이!”
피피가 벌써부터 험한 말을 하려는 것 같아 라실리아가 그만두라는 의미로 머리를 쓰다듬었다.
“성격은 앞으로 점잖아지겠지요.”
“그러길 바라지.”
레스칼이 피피를 쓰다듬는 손을 끌어왔다. 피피가 짜증을 냈지만 레스칼은 눈도 깜박하지 않았다.
그가 손등에 입술을 묻으며 속삭이듯 작게 물었다.
“오늘도 블루문이야. 알고 있나?”
“네.”
“그래서 미리 허락을 받고자 한다.”
“무슨 허락 말씀입니까?”
손등을 간질이는 입술의 감촉이 계속 신경을 앗아 갔다. 이러다 황제가 무슨 말을 하든 그냥 네, 라고 대답해 버릴 것 같았다.
“오늘은 나도 침대에서 자도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