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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귀족의 품위 (2) (29/96)


29. 귀족의 품위 (2)
2022.12.11.



“황후 폐하. 오셨습니까.”

라실리아가 사실로 들어서자 시녀들은 재빠르게 표정들을 바꾸었다. 문밖에서 미리 대화를 듣지 않았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알지 못했을 것이다.


“무슨 일로 이렇게들 모여 있었나.”

사실 라실리아가 황후의 몸으로 깨어난 뒤로, 시녀들의 입장은 상당히 애매해졌다.

카르타헤나 황후는 무슨 일에든 시녀들을 대동했다. 양 옆에서 자신을 따르는 여덟 명의 귀족 여인들은 자신을 돋보이게 해 주는 수단이자 동시에 권력의 상징이었다.

황후궁의 시녀들은 황후와 한 몸이나 다름없었고, 황궁 안을 거리낌 없이 휘저으며 안하무인으로 구는 데 몹시 익숙해져 있었다.

하지만 황후가 기억을 잃었다고 주장한 뒤부터는 사정이 완전히 달라졌다.

황후는 옷을 입을 때를 제외하면 시녀들을 찾는 일이 없었고, 시녀들은 황후궁의 빈방에 멀뚱히 앉아 있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할 일이 너무 없는 터라 차나 홀짝이고 종류별로 과자나 먹는 게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다들 조금씩 살도 쪘다.

언제까지 이럴 수는 없었다.

그러나 황후에게 대놓고 불만을 말하기에는 너무 무서웠다. 오늘 아침만 해도 파샤드 후작 부인이 불만을 꺼내 들려고 간을 보는 것만으로도 궁에서 쫓겨났다.

그러다 보니 할 수 있는 건 상대적으로 만만한, 대체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모를 공녀 같지도 않은 공녀를 잡는 일뿐이었다.


“식사는 즐거우셨는지요.”

“폐하께서 두 분이 함께 하시는 식사를 굉장히 고대하셨다 들었사옵니다.”

라실리아는 황후 앞에서는 더없이 공손한 시녀들의 인사를 받는 대신 이베트를 바라보았다.

이베트는 첫날부터 제 역할을 너무 못 했다고 여겼던지 안색이 말도 못하게 어두웠다.


“……슈라이든 공녀에게 옷을 갈아입도록 지시를 했을 텐데.”

이베트는 아직 그 더러워진 옷 그대로였다.

이베트가 숨을 들이쉬며 고개를 푹 숙였다.


“송구합니다, 황후 폐하. 옷을 갈아입으려면 출궁을 해야 해서……,”

각자 가문에서 가져온 짐과 하인들이 궁에 상주하는 시녀들과는 달리, 궁인인 이베트는 이틀에 한 번 꼴로 집에 다녀왔다.


‘이건 정말 내 실수야.’

라실리아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하지만 그건 아마 카르타헤나 황후도 몰랐을 것이다.

이베트는 신분만 달라진 상태였다. 그 신분이 가질 수 있는 것들은 아무것도 주어진 게 없었다. 그래 놓고 제1시녀 노릇을 무사히 해내길 바란다면 너무 양심 없는 짓이었다.


“허락하시면 즉시 다녀오겠습니다.”

“그게 좋겠습니다, 황후 폐하.”

이상하게도 시녀 중 하나인 귀족 부인이 그 말을 거들고 나섰다.

괜히 그러지는 않을 것이다.


‘궁 밖에서는 내 눈이 닿지 않으니까. 괴롭히기엔 더 쉬울지도 몰라.’

최악의 경우 이베트는 궁으로 돌아오지 못할지도 몰랐다.


“아니, 그럴 필요 없다. 갈아입을 옷이 없는 게 문제라면 내 옷을 입도록.”

그러자 난리가 났다.


“네? 네, 황후 폐하? 네?”

일단 이베트부터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다른 시녀들은 말 한마디 조심하던 게 언제냐 싶게 다들 목에 핏대를 세우고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 될 말씀입니다, 황후 폐하!”

“어찌 황족의 옷을 아무나 입을 수 있단 말입니까! 엄연히 피가 다른 것을!”

“궁인이 시녀가 되는 것부터 말이 안 되는 일이었사옵니다!”

어쩌면 시녀들 또한 기억을 잃은 뒤부터 황후가 평소와는 다르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니 두려움도 없이 큰 목소리를 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방식이 다를 뿐, 라실리아가 카르타헤나에 비해 물러터진 성격은 아니었다. 변덕스러운 황후보다는 오히려 예언자가 더 엄격할 것이다.


“더 떠들도록.”

흥분한 시녀들에 비하면 라실리아의 목소리는 몹시 작았다. 그러나 그 작은 목소리는 피부를 훅 적시는 찬물 같았다.


“황후인 내 앞에서 귀가 아프도록 큰 목소리를 내는 게 귀족의 품위라면.”

“…….”

“…….”

순식간에 사실 안이 조용해졌다.

라실리아는 그간 제대로 얼굴을 익히지도 않았던 시녀들을 차분히 살폈다. 딱히 눈에 들어오는 인물은 없었다. 아마 다들 파샤드 후작 부인과 비슷할 것이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묻긴 했다.


“이 중에 훗날 폐하의 반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자가 있을까?”

“네?”

이베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이베트에게 묻고 있는 게 아니었다.


“삐!”

대답은 이베트의 머리 뒤쪽에서 들려왔다. 숱이 많은 이베트는 거추장스럽지 않도록 늘 머리를 올리고 있었는데, 피피는 풍성한 머리칼 어느 틈에 숨어 다니는 듯했다.

그런 이는 없다고 했다. 그럼 더는 신경 쓸 것도 없었다.


“슈라이든 공녀.”

“네, 네?”

“그대는 황실 예법서를 읽었던가?”

“네? 아아, 네! 읽어 본 적이 있습니다.”

“잘됐군. 예법서에 황후가 공작 영애에게 옷을 하사하면 안 된다는 예가 있었나?”

“으음……. 아니요, 황후 폐하. 그런 건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황족이 옷을 하사하는 것은 큰 영광이고, 그런 경우에는 황족을 대할 때마다 같은 옷을 입는 게 예의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나의 시녀들은 내게 예법을 잘못 고했다는 말이로군. 내가 기억을 잃었음을 핑계로 나를 예법도 모르는 황후로 만들려고 했나?”

시녀들의 안색이 변했다.


“황후 폐하……. 그건 너무…… 가혹한 말씀이십니다. 저희들은 그저……,”

“그저?”

“그저…… 이제껏 황후궁에서는 한 번도 없던 일이기에……,”

“예법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그게 어째서 문제가 되지?”

“그게……,”

시녀 중 하나가 손에 쥔 부채를 탁 접으며 외쳤다.


“궁인이 시녀가 되는 예는 없던 줄로 아옵니다, 황후 폐하.”

“공작가의 영애가 궁인이 되는 경우도 없었겠지. 안 그래?”

“그건…….”

곧장 입이 다물렸다.


“본인들의 무지를 알았다면 가서 공녀가 입을 만한 옷을 골라 오도록.”

“황후 폐하. 어찌 저희들에게 그런 일을…….”

라실리아의 표정이 더 차가워졌다.


“내 의중을 따르는 게 그대들의 일이다. 황궁에서 놀고먹기 위해 있는 게 아니라면 그대들도 슈라이든 공녀만큼 제 몫들을 해야 해.”

“…….”

시녀들이 울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옷을 가져와.”

대답은 아주 간신히 들려왔다.


“……네, 황후 폐하.”

 

* * *



“저어, 그러시면…… 아니, 저를 감싸 주시는 건 매우 감사하고 영광된 일이지만…… 그렇다고 시녀님들을 그리 대하시면…… 아니, 그러니까 제가 주제넘게 나서겠다는 건 아니고…… 그래도 황후 폐하의 시녀님이니까요오…….”

이베트가 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는 정말 괜찮은데……. 제1시녀가 됐다지만 그건 신분상의 일이고, 저는 이제껏 하던 대로 성심껏 일을 하면 되지 않을까요. 어차피 저를 공작가의 영애로 볼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고, 음…….”

“슈라이든 공녀.”

“네, 황후 폐하. 아니, 공녀는 너무 과한 것 같습니다. 그냥 이름을 불러 주시면 한결 마음이 편할 것 같아요.”

“공녀를 내 시녀로 두기로 했을 때부터 이런 일은 벌어졌을 거야. 마음 쓰지 말도록. 그럴 일이 아니니.”

“아니, 폐하. 시녀님들은 다들 내로라하는 가문 출신들이고…… 그게 다 황후 폐하의 힘이 되는 거라고 들었습니다. 시녀님들하고 사이가 안 좋게 되기라도 한다면…….”

그렇다면 더더욱 기존의 시녀들과 거리를 둘 이유가 생겨났다.

어차피 황후는 바뀔 것이다. 황제는 일 년 안에 진짜 반려를 찾아 황후로 맞이해야 했다. 기존 황후의 세력이 궁에 남아 있는 게 새 황후에게 도움이 될 일은 없었다.

피피가 옳았다. 이베트는 진짜 반려에게 이로운 사람이었다. 이베트로 인해 황후궁의 기존 세력이 물갈이가 되는 것도 그 이로운 면에 포함될 것이다.


“그건 내가 감당해야 할 일이지. 다시 말하지만 공녀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

“황후 폐하…….”

이베트는 더는 뭐라고 말을 하지 못한 채 눈물만 글썽였다. 분명 자신을 위해서 필요치 않은 위험을 감수한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는 말을 해 주고 싶었지만, 자신이 가짜 반려라는 것은 비밀이었으니 바로잡아 줄 수도 없었다.


“공녀의 체형이 나와 비슷한가? 옷이 잘 맞아야 할 텐데.”

“헙, 아니 무슨 말씀을요! 황후 폐하께서는 저보다 키도 크시고 이렇게나 늘씬하신데요!”

“옷이 안 맞으면 어쩌지?”

“아우, 그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밤을 새워서라도 고쳐 입을게요! 제가 바느질을 정말 잘하거든요!”

이래저래 재주가 많은 인물이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아, 피피는? 머리칼 속에 숨어 있는 것 같은데. 맞아?”

“네! 제 머리칼 속이 둥지와 비슷한 느낌이지 않을까 싶어요. 거기서 잠도 잘 잔답니다.”

“조용한 걸 보면 지금도 잠이 든 모양이지.”

“그런 것 같아요, 황후 폐하.”

이베트가 이유도 없이 라실리아를 보며 해맑게 웃는 사이, 시녀들이 옷을 골라 왔다.

* * *



“딱히 마음에는 안 드는군.”

옷을 가져온 것뿐만이 아니라 시녀들은 이베트가 옷을 갈아입도록 시중도 들어야 했다. 다들 이를 박박 갈고 있다는 게 한눈에 보였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옷이었다.

물론 시녀들은 궁인들을 부릴 뿐 험한 일은 하지 않는 사람들이었지만, 이베트가 지금 입은 붉은색 드레스는 움직이는 게 너무 불편해 보였다.

어깨와 가슴 윗부분을 전부 드러낸 옷은 두 팔을 들어 올릴 수도 없었다.


“하오나 황후 폐하, 이 옷이 가장 적당해 보였사옵니다.”

물론 거짓말일 것이다.

최선을 다해 이베트가 한 번도 입어 보지 못한, 그래서 불편하기 짝이 없는 옷을 골랐을 게 뻔했다.

이베트는 조금만 몸을 격하게 움직이면 주르륵 흘러내릴 것 같은 드레스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쩔쩔매고 있었다.


“슈라이든 공녀는 초록 눈과 갈색 머리칼을 지녔지. 붉은색은 어울리지 않아.”

사실 잘 어울렸다.

하지만 라실리아가 강경하게 말하자 아무도 잘 어울린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 그렇…… 그렇습니까.”

“그대들의 안목을 믿지 못하겠다. 내가 직접 고를 테니 옷을 전부 가져오도록.”

“네, 황후 폐하?”

“들었잖아.”

“…….”

시녀들이 대답 대신 서로 눈치만 주고받았다.


“어서 다녀오도록. 나를 기다리게 하지 말고. 방금 전부터 그대들이 말을 못 알아듣는 통에 계속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잖나. 이젠 좀 언짢아지려고 해.”

“……아, 알겠나이다. 황후 폐하.”

시녀들이 울상을 지으며 드레스룸으로 떠났다. 직접적으로 언짢다는 말을 한 황후 때문에 궁인들을 대신 부릴 용기도 나지 않았다.

드레스룸의 옷을 모두 옮겨 오는 데 반나절이 걸렸다. 치맛단이 풍성하고 화려한 장식이 주렁주렁 달린 옷은 꽤 무거워서 한꺼번에 여러 벌을 옮길 수가 없었다.

게다가 행여나 옷이 바닥에 끌릴까 조심해야 하는 터라 시간이 더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다.

라실리아는 그 옷의 절반을 이베트에게 주었다.

반나절 동안 옷을 나르고 치우느라 갑자기 근육통에 시달리게 된 시녀들은 더 이상 반발할 기운도 남아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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