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귀족의 품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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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귀족의 품위 (1)
2022.12.07.
“송구합니다, 황후 폐하. 저 하나 때문에 두 분의 식사가 늦어졌다니……. 아아, 정말이지 이럴 줄은…….”
이베트는 아직 뚜껑이 열리지 않은 은식기들을 보고 새파랗게 질렸다. 이러다 쓰러지거나 아니면 통곡을 하다 쓰러지거나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이베트가 식사 시간에 늦은 것보다 더 큰 문제는 이베트의 지금 몰골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라실리아가 굳은 얼굴로 물었다.
이베트의 옷은 여기저기 검댕이 묻어 더러웠다. 검댕이 묻은 것을 어떻게든 닦아 보려고 빨아 댄 흔적이 있어 더욱 안타까웠다.
“그게요, 황후 폐하…….”
이베트는 선뜻 말을 하지 못했다. 대신 눈썹을 열심히 움직였다. 어떻게 말을 하면 좋을지 감을 못 잡겠다는 얼굴이었다.
“슈라이든 공녀. 말을 아끼려고 해 봤자 소용이 없다는 걸 알 텐데. 내가 물을 곳이 달리 있다는 걸 염두에 두고 답을 하도록.”
제대로 답을 하지 않으면 피피에게 물어볼 거라는 말이었다.
이베트가 눈치 빠르게 그 말을 알아듣고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지요. 네, 그게 그러니까……,”
오는 길에 사고가 있었다.
계단을 내려오는 이베트의 머리 위 난간에서, 갑자기 벽난로의 재를 긁어모아 버리는 통이 떨어졌다. 순식간에 재를 뒤집어쓴 터라 누가 그랬는지는 보지 못했다.
하지만 뻔한 일이었다. 시녀들이 제대로 텃세를 부리기로 마음을 먹었을 것이다.
이렇게 사고를 가장한 심술이야 앞으로도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그건 앞으로 조심하면 될 일이었다.
야무진 성격의 이베트는 지금 황후궁의 제1시녀는 자신이라는 것을 똑똑히 알고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귀족인 시녀들과 드잡이질을 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궁인들은 다룰 방법을 찾을 생각이었다.
그건 괜찮았다. 하지만 정말 괜찮지 않은 일은 따로 있었다.
“저는 다른 것보다 옷이 너무 더러워져서…… 식사 시중을 드는데 검댕을 묻히고 올 수는 없고…… 그게 너무 속이 상해서……,”
이베트의 둥그런 눈에 울컥 눈물이 고였다.
라실리아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 잘못이다. 파샤드 부인을 궁에서 내보냈다고 다 되는 게 아니었는데.”
이베트가 고개를 홱 치켜들었다.
“아니, 무슨 말씀이세요! 그게 어떻게 황후 폐하의 잘못이 됩니까! 부디 그런 말씀은 거둬 주세요. 제가 아직 경험이 없고 미숙하여 벌어진 일입니다! 앞으로 제가 잘 하면 될 것입니다, 황후 폐하!”
“아니. 네게 텃세를 부린 이들도 황후궁의 사람들이다. 그러니 내가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을 잘 다루지 못했다는 뜻이 된다. 식사 시중은 괜찮으니 공녀는 옷을 갈아입고 오도록. 오늘 공녀에게 벌어진 일은 추후 시비를 가리겠다.”
“그게…… 송구합니다, 황후 폐하. 송구합니다.”
이베트가 울 것 같은 얼굴로 숙이고 있던 허리를 폈다.
세르벤이 조금 안타까운 얼굴을 했다.
“두 분의 식사가 많이 지체되었……. 크흠, 그러니 이만 자리를 비키는 게 어떨지, 크흐흠. 크흠.”
페르손이 은근슬쩍 이베트에게 나가라는 눈치를 주었다.
답지 않게 말끝을 흘린 것은, 도무지 제1시녀로는 안 보이는 초라한 몰골 때문이었다.
옷이며 장신구며 말투며 아무리 봐도 귀족 태가 나지 않는데 황후는 공녀라 칭하니 말을 높이기도, 그렇다고 낮추기도 애매했다.
“아……. 정말이지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어서 나가 보겠습니다. 송구합니다, 송구합니다.”
이베트가 식당을 떠났다.
라실리아가 그다지 밝지 못한 얼굴로 레스칼에게 말을 건넸다.
“황후궁의 일로 식사를 방해한 점을 사과드려야겠군요. 이제 드십시오.”
“더 늦어져도 괜찮은데.”
그러고 보니 레스칼은 아직도 라실리아의 손을 닦는 중이었다. 물기는 진작 다 말랐기에 지금은 그냥 손을 냅킨으로 감싸 만지작대는 것에 불과했다.
“시장하실 텐데요.”
“전혀.”
“……저는 시장합니다.”
“아,”
레스칼이 라실리아의 손을 느릿느릿 놓아주었다.
그것을 신호로 페르손이 절도 있는 동작으로 은접시의 뚜껑을 착착 차례대로 열었다. 그렇게 열린 뚜껑들은 차곡차곡 커다란 은쟁반에 담겨 문밖에서 대기 중인 다른 시종에게 전해졌다.
“어제부터 드는 생각인데,”
레스칼이 포크와 나이크를 들고 요리 하나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페르손이 잽싸게 사슴 넓적다리 구이를 우아하게 잘라 레스칼의 접시 위에 놓았다. 레스칼이 그것을 반으로 잘라 라실리아의 접시에 올려놓았다.
그 모습이 너무 자연스러워 황제와 황후가 원래부터 매일같이 옆 자리에 앉아 식사를 했다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그대가 기억을 잃었다는 게 거짓인 것 같아.”
……달칵.
라실리아의 포크 끝이 접시 가장자리를 스쳐 가며 작은 소음을 만들었다.
표시는 잘 나지 않았지만 그 소음의 이름은 긴장이었다.
“……어째서 그런 말을 하십니까.”
“그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기억을 잃었다기보다는…… 아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는 의미였다.”
“…….”
하마터면 포크를 놓칠 뻔했다.
“그래서 좋아.”
“…….”
“시장하다 했으니 많이 들도록.”
레스칼은 또 그렇게 이 요리 저 요리를 라실리아의 접시로 계속 날랐다. 라실리아가 어떤 요리를 잘 먹는지 지켜보느라 정작 제 접시의 요리는 고스란히 식어 가는 것도 모르는 듯했다.
“……감사합니다. 폐하께서도 어서 드시길 바랍니다.”
“그대가 원한다면.”
다정한 듯하지만 한편으로는 당황스러운 식사가 이어졌다.
* * *
“리얀.”
황후궁의 식당 밖 복도 창문에 걸터앉아 다리를 건들대고 있던 리얀의 등 뒤로 세르벤이 다가갔다.
리얀이 고개를 뒤집어 그를 바라보며 중얼댔다.
“내가 칼이 없었던 걸 다행으로 여겨.”
“헛소리. 나라는 거 진작 알고 있었잖아.”
“아, 너 정도 되는 걸음은 몇 놈 있거든.”
세르벤이 미간을 구겼다.
“뭐? 근위대에?”
“응. 요새 몇 놈 실력이 꽤 늘었어. 방심하지 마.”
“젠장. 너 다음으로는 난 줄 알았는데. ……아, 하여간. 혹시 방금 들었어?”
“음? 뭘?”
리얀이 눈을 끔벅댔다.
근위대 몇 놈이 그새 따라왔다는 얘길 들으면 세르벤이 좀 더 괴로워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다른 얘기를 먼저 하려고 들었다.
“방금 전. 식당에서 벌어진 일.”
“시녀가 지각한 일 말이야?”
“다른 시녀들이 옷에 재를 쏟았다더라고. 그런데 황후 폐하께서 뭐라고 하셨는지 알아?”
“으음……. 설마 궁녀를 시녀로 임명하게 한 나의 더럽고 사악한 계획을 눈치채셨나?”
“아니. 그건 아닌 것 같아.”
“그럼 왜 묻는데?”
“당신 잘못이라고 하셨어.”
리얀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음? 뭐가?”
“당신이 아랫사람들을 잘 다루지 못한 탓이라고 하셨다고. ……미친, 그게 말이나 돼?”
리얀의 입이 딱 벌어졌다.
“그러게. 진짜 미쳤네.”
“아무리 기억을 잃은 흉내를 내고 있어도 말이야…… 그렇게까지 다른 사람처럼 굴 수 있는 건가?”
리얀이 생각에 잠겼다가 곧 고개를 붕붕 흔들었다.
“글쎄……. 진짜 모르겠어. 나는 황후 폐하께서 기왕 다른 사람이 되기로 마음을 먹은 거라면 얼마든지 환영할 생각이었거든. 그런데 이건 고작 마음을 먹은 정도가 아니라 그냥 다른 사람 같잖아?”
“나도 그래. 진짜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다.”
세르벤이 한숨을 내쉬었다.
“게다가 정작 시녀가 그렇게 당하는 걸 보니까 기분이 썩 좋지도 않고.”
“……제기랄, 맞아. 그러니까 음험하고 사악한 쪽은 오히려 우리 같잖아.”
리얀이 투덜대자 세르벤이 정색을 했다.
“말은 똑바로 하자고, 누님. 우리가 아니라 누님 혼자지. 누님이 생각해 냈으니까.”
“닥쳐라, 오라버니. 천재라고 부추긴 게 누구였더라?”
“궁인을 시녀로 만들자는 악랄하고 비열한 생각은 온전히 네 머리에서 나왔어.”
“시끄러워.”
리얀이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뭐, 너무 심해지지 않도록 지켜보긴 해야겠네. 다치거나 하면 안 되니까.”
“그러게.”
“오라버니는 당분간 황후궁에서 지내는 거지? 수고 좀 해. 뭐, 황후궁의 시녀들이 만만하진 않겠지만.”
“……너를 천재라고 했던 나를 좀 원망해도 될까?”
“아, 그건 별개고. 그 생각이 천재적이었던 건 사실이니까. 어쨌거나 슈라이든 공녀가 황후 폐하와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건 아닌지 확인은 해야지.”
“…….”
“잘해 봐.”
리얀이 세르벤의 어깨를 툭 쳤다. 세르벤이 한숨을 내쉬었다.
* * *
‘체한 것 같은데.’
라실리아가 따끔대는 위를 문지르며 제 방으로 돌아왔다.
식사가 계속될수록 황제는 더 유난이었다. 뭘 한 입이라도 먹으면 맛있는지, 그게 좋은 건지, 더 먹고 싶지는 않은지 묻고, 고개를 끄덕일 것 같으면 재빨리 음식을 덜어 왔다.
나중에는 써는 게 귀찮지 않은지 묻기도 했다. 대신 썰어 주는 것도 모자라 아예 입에 넣어줄 기세라 거절하기에 바빴다.
애초에 이베트가 올 것도 없는 일이었다. 식사 시중은 황제에게 질리도록 받은 기분이었다.
‘다음부터는 혼자 먹는다고 해야겠어. ……아니, 저번에는 이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황제가 달라지는 이유는 전부 블루문으로 설명이 가능했다.
라실리아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하루만 더 참으면 돼. 딱 하루만.’
아침 식사 뒤 황제에게 줄줄이 알현 요청이 들어와 있어서 참 다행이었다.
황제는 오늘도 알현을 전부 취소할 생각이었다지만 황실 비서관이 울 것 같은 얼굴을 했고, 그래서 라실리아가 적극적으로 끼어들어 할 일을 하시라는 말을 했다.
그 덕에 잠시나마 황제에게서 멀어질 수 있었다. 알현실로 향하는 황제를 보며 황실 비서관이 원래 폐하의 걸음이 이렇게 느리셨냐며 거듭 놀라워했지만 그런 것은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딱 하루.’
그다음부터는 정말이지 꾀병을 앓아서라도 황제가 제 옆에 붙어 있는 걸 피할 생각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세르벤을 대동한 채 사실로 들어서던 순간이었다.
“쉿.”
근위대가 문을 열려고 하자 세르벤이 그들을 말렸다.
“……?”
라실리아가 세르벤을 쳐다보았다.
세르벤이 근위대를 대신해 소리 없이 문을 열며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안에서 소리가 들립니다. 들어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
세르벤의 말대로, 사실 안에서는 신경전을 벌이는 듯 날카로운 목소리들이 오가는 중이었다.
“……제에 공작가의 공녀라니, 어이가 없지.”
“네 꼴을 좀 보지? 그런 차림새로 황후궁의 제1시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너는 황후 폐하의 수치가 될 것이다.”
“귀족이 귀족다운 건 신분에 걸맞은 품위가 있어서다. 제 주제를 모르는 건 품위와는 반대되는 일이지. 그런 걸 가리켜 천박하다고 하는 것이다.”
“생각하는 머리가 조금이라도 있거든 너 스스로 물러나. 진짜 험한 꼴을 당하기 전에.”
이베트의 대꾸는 들려오지 않았다.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군.”
라실리아가 주먹을 꾹 쥐었다.
“고맙다. 경이 아니라면 몰랐을 것이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세르벤이 애써 양심에 찔리는 표정을 감추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라실리아가 차갑게 웃었다. 이곳에서는 아는 사람이 없었지만 그건 화가 났다는 뜻이었다.
“귀족다운 품위를 운운했으니 품위를 갖추도록 해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