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대홍수
(27/96)
27. 대홍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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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대홍수
2022.12.04.
“말도 안 됩니다! 궁인이 시녀라니요!”
시녀들은 분노했다. 그게 당연했다.
시녀들은 단 한 차례도 궁의 사용인들과 자신을 같은 부류로 여겨 본 적이 없었다. 사용인들은 초나 커튼 같은 소모품에 더 가까웠다.
어느 날 양초가 와서 제1시녀 자리를 꿰차겠다고 하는 것은, 세상이 전부 뒤엎어지는 대홍수 같은 일이었다.
“아, 제가 궁인이었다는 걸 기억하시네요. 신기해라. 궁인 얼굴 같은 건 전혀 모르고 계실 줄 알았는데.”
이베트는 분노하는 시녀들 사이에서도 전혀 기죽은 모습이 아니었다.
사실 껄끄럽긴 했다. 하지만 반발이 있으리라는 건 각오를 하고 있었다.
게다가 끄트머리 말단 시녀도 아니고 제1시녀라니, 후작 부인이 주술사를 고용해 자신을 저주한다 해도 납득이 갈 만한 일이었다.
그래도 이상하리만치 겁은 나지 않았다.
어쩌면 어제 하루 동안 아주 이상한 일들을 연달아 겪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새들의 왕과 그 왕이 지키는 존재인 황후가 제 편인데 뭐가 문제랴 싶었다.
그리고 이베트는 황후를 믿었다. 제국에서 가장 무서운 존재는 황제였다. 황제라서도 그렇고 마족의 피가 섞인 사실도 그랬다. 그 황제도 황후를 이기진 못했다.
그러니 사실 제국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은 황후라고 봐야 했다. 그게 이베트를 몹시 뿌듯하게 만들었다.
“무슨 말을 하는 게냐!”
이베트가 태연하게 제 할 말을 하자 후작 부인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라실리아가 후작 부인을 쳐다보았다.
“무례하군. 공작가의 공녀에게 하대라니. 신분이 달라졌으니 이제부터 주의하도록.”
황후까지 이렇게 나오자 후작 부인은 뒷목이라도 잡을 기세였다.
“화, 황후 폐하! 대체 이런 일이 어디 있사옵니까! 궁인이 어찌 공작가의 공녀가 된단 말입니까!”
“슈라이든 공작이 공녀를 입양했다. 폐하께서 허락하신 정식 입양이었다.”
“대체 슈라이든 공작이 누구란 말입니까! 제국에 그런 이름은 없사옵니다!”
“그대는 계속 나의 말을 의심하는데, 그 무례는 그간 내 곁에서 보낸 시간을 봐서 한 번은 용서하지. 슈라이든 공작이 궁금하거든 제국의 역사사라도 보는 게 어떤가? 말미를 허락할 테니 당분간은 후작저에 머물며 독서에 힘을 쏟도록. 말이 나온 김에 지금 퇴궁해도 좋다.”
파샤드 후작 부인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황후 폐하. 제게 이러실 수는…… 제게 이러실 수는 없습니다. 저를 이렇게 헌신처럼 버리실 수는…….”
“버리는 게 아니라 쉬도록 허락한 것이다. 내 말을 자꾸 왜곡하는 이유가 궁금하군. 일부러 그러는 건가?”
“황후 폐…….”
안색이 한창 창백해진 후작 부인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주위의 다른 시녀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라실리아와 후작 부인의 눈치를 살폈다.
“나가 봐. 말한 대로, 제국의 역사서를 일독하기 전까지는 궁으로 돌아올 필요가 없다.”
“…….”
라실리아가 할 말을 잃은 후작 부인에게서 등을 돌려 다른 시녀들을 향했다.
“오늘부터 내 시중은 제1시녀가 된 슈라이든 공녀가 들 것이다. 시녀 역할은 처음이니 미숙한 점이 있을지도 몰라. 그대들이 공녀의 일을 성심껏 거들길 바란다. 황후궁의 궁인들 모두에게 내 말을 전하도록.”
“…….”
시녀들은 눈을 두루룩 굴리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무도 내 말을 못 들었나?”
라실리아가 다시 채근하자 그때야 모기만 한 대답이 들려왔다.
“네, 네에……. 알겠나이다, 황후 폐하.”
라실리아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럼 이제 목욕을 하겠다. 슈라이든 공녀만 남고 다들 나가도 좋다.”
“네, 황후 폐하.”
그것으로 아침에 시작된 대홍수가 일단락되는 듯했다.
* * *
다행히 오늘 입은 속드레스는 단추가 앞에 달린 것이었다. 혼자서도 얼마든지 입고 벗을 수가 있었다.
옷을 벗은 라실리아가 욕조에 들어가고 난 뒤 이베트가 들어왔다.
“삐이이!”
피피도 함께였다. 이베트의 손에서 톡 튀어나온 피피가 수건을 두른 라실리아의 어깨 위로 앉았다.
“괜찮겠어? 물에 젖어서 미끄러울 텐데.”
라실리아가 피피를 보며 묻자 피피가 고개를 휙휙 내저었다.
“삐이.”
깃털도 다 나지 않은 머리통을 살갗에 문질러 대는 건 어제 밤새도록 보고 싶었다는 말이었다.
라실리아가 웃으며 피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루만 더 참아. 블루문은 내일 진다니까.”
“삐이이…….”
피피도 어리광이 심했다. 꼭 누구처럼.
“그런데 왜 훈욕인가요, 황후 폐하? 이건 시간이 오래 걸려서 밤에 하시는 게 나을 텐데.”
이베트가 연기가 꺼지지 않도록 장작불에 부채질을 살살하다 말고 물었다.
“내 뜻이 아니었다.”
“아, 그럼?”
“파샤드 부인이 뭔가 바라는 게 있었던 모양이야.”
“음, 저런……. 그게 뭐였을까요?”
시녀들 앞에서 옷을 벗어야 한다는 위기감을 주려던 것이었겠지만 이베트 덕에 별 문제 없이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베트에게 그런 말을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중에라도 문제가 될 수 있으니까.’
이베트가 표식에 관한 것을 알고 있었고, 그걸 숨기는 데 동참했다고 알려지면 이베트 역시 처벌을 피할 수 없었다. 어쩌면 슈라이든 공작에게도 영향이 갈지 몰랐다.
그런 일은 없어야 했다.
“글쎄……. 여하간 나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을 테니 당분간은 시중을 줄일 생각이다. 속드레스는 단추가 앞에 달린 것을 입도록 해야겠어. 잠옷도 마찬가지야.”
“아, 시중은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부족함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황후 폐하.”
그걸 피하고자 하는 일이었다.
“속옷 정도는 내가 입게 놔둬. 그게 더 편하니까.”
“아……. 알겠습니다, 황후 폐하.”
이베트는 입을 다물고 열심히 부채질을 다시 했다. 그러다 연기를 먹고 쿨럭, 기침을 했다. 제1시녀가 되긴 했지만 라실리아의 눈에도 이베트는 궁인에 더 가까운 모습이었다.
기왕 연기를 피운 게 아까워 욕조에 들어오긴 했지만 꼭 그럴 필요가 없었다는 생각이 지금에야 들었다.
“이제 그만하겠다.”
“엇, 네? 황후 폐하?”
“먼저 나가서 오늘 입을 옷을 준비해 다오. 나는 물기를 닦고 속옷을 입을 테니.”
“혼자서 하려면 번거로우실 텐데요. 제가 거들겠습니다.”
“아니. 그러면 시간이 더 걸리잖아. 나만 아니라 폐하의 식사 시간도 늦을 것이다.”
“아, 그렇겠네요. 뜻을 따르겠나이다, 황후 폐하.”
이베트가 후다닥 일어나서 욕실을 나섰다.
그런 뒤 라실리아가 욕조에서 몸을 일으키자 피피가 날개로 얼굴을 가리며 등을 돌렸다.
“삐!”
“응, 물이 튀었니?”
“삐이!”
“아, 갑자기 일어나서 당황했다고? 알았어. 다음부터는 말을 하고 움직일게.”
어제 태어난 새 주제에 사람처럼 구는 게 어이가 없기도 했고, 조금 귀엽기도 했다.
“넌 빨리 자라겠구나.”
라실리아가 수건으로 물기를 닦는 내내 피피는 날개로 눈을 가린 채 있었다.
“자라면 어떤 모습이 될지 궁금하네.”
“삐!”
성체가 되면 입이 딱 벌어질 만큼 멋진 모습이 된다고 말하며 피피가 등을 돌린 상태에서 엉덩이를 우쭐우쭐 흔들었다.
“그러게. 붉은 새라니. 정말 근사할 것 같아.”
“삐이이!”
하지만 자신은 그 모습을 볼 수 없을 것이다. 피피가 자라기 전에 제 자리를 찾아가야 할 테니까.
그런 아쉬움을 담아 라실리아가 피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피피는 빨리 옷이나 입고 하라며 날개를 파닥거렸다.
* * *
아침 식사는 황후궁의 식당에서 이루어졌다.
보통 아침은 집무실이나 침실에서 아침 일과를 보며 간단하게 먹는 편이었는데, 황제가 황후궁으로 옮겨 온 다음부터는 어쩐지 소홀히 할 수 없는 일과가 되었다.
뚜껑을 덮은 은접시가 식탁을 채웠다. 식탁은 꽃이 반, 음식이 반이었다. 아침부터 은촛대에서 번쩍번쩍 일렁이는 촛불들이 부담스럽기도 했다.
가장 부담스러운 것은 옆 자리에 앉은 황제였다.
황후궁이라 상석은 황후의 차지인 듯했다. 황제는 그 오른편에 앉았다.
옆자리라고는 하지만 조금만 고개를 옆으로 돌려도 얼굴이 곧장 보이는 자리였다.
아침에 좋다느니 하는 말을 해서 기분을 술렁이게 만들어 놓은 황제는 유독 더 눈부신 차림새로 식탁을 빛냈다.
번쩍대는 은식기가 황제의 얼굴을 한 번 쳐다보고 나면 그새 광택이 죽은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켰다.
“황후궁의 시녀가 늦는군요.”
세르벤이 작게 말을 꺼냈다.
평소 식사 자리라면 그림자 기사가 입을 열 일은 없었다.
그러나 황후의 옆에 서서 냅킨으로 손과 입을 닦아 주고 음식 순서를 알려 주는 등의 시중을 들어야 할 제1시녀가 통 보이질 않았다.
방금 전부터 표정을 굳히고 있던 황제궁의 시종장 페르손이 나섰다.
“다른 시녀를 불러와야겠습니다, 황후 폐하.”
다시 말하지만, 평소 같은 식사였다면 페르손도 나설 일이 없었다.
그러나 페르손은 황후궁의 시녀 때문에 황제의 아침 식사가 늦어지는 일에 슬슬 화가 나던 중이었다.
라실리아도 그 점을 눈치채고 있었다.
“오늘이 시녀로 봉한 첫날이라 일이 번거로운 모양이야. 그렇다고 폐하를 더 기다리시게 만들 수는 없으니 이대로 식사를 시작하는 게 좋겠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폐하?”
“더 기다려도 괜찮아.”
레스칼은 기다렸다는 듯 제꺽 대답을 이었다.
그러면서 그가 식탁 위로 손을 내밀었다.
“그대가 다른 시녀를 원하지 않는다면 식사는 얼마든지 미뤄도 좋다.”
“감사합니다만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음식이 식기도 할 테니까요. ……그런데 손은 왜 내미시는 겁니까?”
“손을 잡기 편하라고.”
“……네?”
라실리아가 고개를 갸웃대며 쳐다보자 레스칼이 잠깐 숨을 내쉬었다.
이제 라실리아는 저게 황제 나름대로 긴장하는 얼굴이라는 것도 알아볼 수 있었다.
“부탁을 들어주면 그대는 손을 잡게 해 주잖아.”
“…….”
“…….”
“…….”
“…….”
레스칼만 빼고, 식당에 있는 나머지 사람들이 전부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특히나 세르벤이 짓는 표정은 안타까울 정도였다.
“아니요. 더 기다리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이대로 식사를 해도 좋습니다.”
“시중도 없이?”
“기억을 잃었다고 해서 음식을 먹는 법까지 잊어버린 건 아닙니다.”
“그렇다면.”
레스칼이 한쪽 눈썹을 꾸물대며 묘하게 시선을 피했다. 그건 조금 실망했다는 표정이었다.
“……그러시면 손을 닦을 물을 따르겠나이다.”
어쨌거나 식사는 해야 했다. 페르손이 하얀 장갑을 낀 손으로 레스칼의 물그릇에 은주전자에 든 물을 따랐다.
레스칼이 물그릇에 손을 넣고 손가락을 퉁기고 나자 페르손이 새하얗고 도톰한 냅킨을 들어 손의 물기를 닦아 주었다.
“황후에게도 씻을 물을 따라.”
“아, 알겠나이다.”
페르손이 레스칼이 앉은 쪽이 아닌, 저 반대쪽으로 식탁을 빙 돌아 라실리아의 왼쪽에서 물그릇에 물을 따랐다.
레스칼이 하던 것을 흉내 내 손을 닦자 레스칼이 잽싸게 몸을 일으켜 페르손의 팔뚝에 걸려 있던 냅킨을 가로챘다.
“그대는 닦아 줄 사람이 없으니까.”
“……네, 폐하?”
냅킨을 쥐고 눈을 빛내는 황제의 의도를 파악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라실리아가 아니라 누구라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해야 해.”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런 사소한 일까지 일일이 거절하는 것도 피곤했다. 이번 일을 거절하면 황제는 또 다른 일을 들고 올 것이다. 차라리 받아들일 수 있는 사소한 일을 받아들이고, 그 다음에 올 일을 거절하는 게 편했다.
레스칼이 라실리아의 젖은 손을 냅킨으로 감쌌다. 그리고 필요 이상으로 아주 꼼꼼히 손가락 하나하나 물기를 닦아 내기 시작했다.
물기를 닦아 준다기보다는 그 핑계로 손가락을 만지작대고 있는 것 같았지만, 레스칼이 황제인 이상 대놓고 그런 말을 할 사람은 없었다.
“이것으로 나는 그대의 부탁을 또 한 번 들어준 셈이다.”
‘그게 아니라 내가 부탁을 들어준 기분인데…….’
“그러니까 나는 다음에 그대의 손을 한 번 잡을 수 있어.”
“…….”
그건 또 어떻게 대꾸를 해야 하는지 고민하던 참이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황후 폐하!”
이베트가 거칠어진 숨을 내뱉으며 식당으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