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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본능과 감정 사이 (26/96)


26. 본능과 감정 사이
2022.11.30.



“……으음.”

오늘따라 잠이 깊었다.

라실리아는 간만에 개운한 기분을 느끼며 눈을 떴다. 해는 맑았고 방 안은 포근했다.

요즘처럼 따듯한 계절에는 벽난로에 불을 떼지 않아서 새벽에는 살짝 추운 기분이 들기도 했는데, 오늘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상할 정도로 아침이 상쾌했다.

라실리아는 기분 좋게 기지개를 켰다. 그러다 침대 옆에서 뭔가 반짝대는 걸 발견했다.


“음? 저게 뭐지?”

시야를 가리던 이불을 치우자 반짝대는 게 제대로 보였다.

황제의 금발이었다.


“……음?”

그러니까 황제가, 바닥에 앉은 자세에서 머리만 제 침대 끝에 기댄 채 자고 있다는 말이었다.


“왜……. 아, 블루문이라.”

같은 방에서 자게 되어 있었다. 라실리아는 당연히 그 전날처럼 변이로 괴로워하는 황제를 그림자 기사들과 함께 지켜보게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자신이 황제를 기다리다 먼저 잠이 들었고……


‘……그래서 그냥 옆에서 잔 건가?’

잘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어제도 분명히 블루문이 떴었다.

라실리아가 소리 나지 않게 몸을 움직여 황제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뼈가 돋았다가 다시 들어간 흔적도 없었고, 핏자국도 없었다.

대신 흠잡을 데 없이 근사한 차림새를 하고 있긴 했다. 그 차림새로 왜 바닥에 앉아 저렇게 불편한 자세를 하고 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이상한데…….’

라실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잠든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러자니 잠든 얼굴은 그저 아름답기만 했다.

처음에는 어젯밤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였다지만, 지금은 그냥 목적 없이 쳐다보는 일이 되었다.


‘……인간이란.’

황제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깜박 시간 가는 것을 잊어버릴 지경이었다. 예언자라 하는 자신조차 아름다움에 혹한다는 사실이 우스워 라실리아가 쓴웃음을 지었다.


‘이러다 예언자의 방에 왜 거울이 허락되지 않았는지도 잊어버리겠어.’

눈에 보이는 것을 경계하라는 의미였다. 눈은 속기 쉬웠다. 예언자는 그저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의 진실을 봐야 할 의무가 있었다.


“……쨋든, 일으켜야지.”

황제는 아직도 깊이 잠이 들어 있었다. 얼마나 저러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계속 그렇게 있다간 몸 여기저기가 아플 것이다.

라실리아가 침대에서 내려와 황제를 어깨로 밀어 올렸다. 이 체격을 자신이 안아서 침대로 올린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고, 미는 게 최선이었다.


“끙,”

온 힘을 다했지만 황제를 침대로 올리는 건 무리였다.

안 되는 일을 빠르게 포기한 라실리아는 차라리 황제를 바닥에 눕혔다.

베개를 하나 가져와 머리 밑에 넣은 다음 이불을 덮어 주었다.

이 정도면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일은 전부 한 것 같았다.

시녀들이 오기 전 잠옷을 속드레스로 갈아입고 있을 생각으로 라실리아가 몸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이불이 덜 덮였는데. 이쪽.”

“……?”

언제 잠들었냐 싶게 황제가 또렷한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톡, 그가 이불 밖으로 나온 손가락 끝으로 바닥을 두드려 소리를 냈다.


“……그래서요?”

“다시 덮어야 하지 않을까 해서.”

라실리아의 눈매가 조금 무서워졌다.


“그래서요?”

“그러니까 가지 말라고.”

“…….”

“……이건 싫은 모양이군.”

황제가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켰다.

방금 전까지 누가 건드려도 모를 만큼 곤히 잠이 들어 있었던 사람이라고는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잠이 든 척하고 계셨던 겁니까?”

라실리아가 온도가 뚝 내려간 음성으로 묻자 금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조금은.”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제가 무슨 짓을 하나 지켜볼 생각이었나요?”

“아니,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다.”

라실리아가 너 같으면 믿겠냐는 표정으로 가만히 있자 레스칼이 서둘러 해명을 했다.


“잠을 자고 있었던 건 사실이야. 그대가 눈을 떴을 때 나도 잠이 깼다. 그런데……,”

“그런데?”

“나를 계속 쳐다보기에.”

“그게 잠든 척한 이유가 됩니까?”

“싫어하지 않는 것 같아서.”

“……?”

황제의 대답은 몹시 의외였다. 예상하지 못했던 대답에 라실리아 잠시 놀랐다.


“내가 깨어 있을 땐 그렇게 쳐다본 적이 없었잖아. 이불을 덮어 주거나 한 적도 없었고. 그래서.”

“그래서……?”

“좋았다.”

“…….”

라실리아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싫어서가 아니라, 당황해서였다.


‘그렇게 사소한 걸…….’

그렇게 사소한 일이 좋아서 눈을 감고 자는 척했다는 말이 생소했다.

블루문에는 반려를 필요로 하는 본능이 강해진다는 건 알았다. 반려라는 존재가 마족의 피에 얼마나 절실한지도 눈으로 확인했다.


‘하지만 이건…… 다르잖아.’

그 본능에는 감정이나 의사 같은 게 들어갈 여지가 없었다. 말 그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본능이었다.

지금 황제가 하는 사소한 게 좋다는 말은 블루문의 본능과는 조금 다르게 들려왔다. 그게 어떻게, 얼마나, 왜 다른지 정확하게 알지도 못하면서 라실리아는 공연히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렇……군요.”

“눈을 떠서 말을 하면 싫어지나?”

황제가 약간 굳은 얼굴로 물었다.

그런 말을 들어서 그런지 이제 저 표정은 제 기분을 조심스럽게 살피는 그런 것으로 읽혔다.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라실리아는 애써 술렁이는 것 같은 기분을 가라앉혔다.

그게 뭔지는 잘 몰라도 황제에게 필요 이상의 감정을 느끼는 것은 좋지 않았다.


“제가 싫어하는 건 폐하께서 난해한 말이나 요구를 하실 때입니다. 잠이 들면 그런 건 없으니까요.”

“구체적으로 말을 해 줘.”

“방금 전 이불을 다시 덮어 달라는 말 같은 게 그렇습니다. 깨어 계셨으니 이불은 혼자서도 얼마든지 다시 덮을 수 있는 일이잖습니까. 그걸 제게 바란다는 건 일부러 저를 괴롭히려는 말 같았습니다.”

“절대 그렇지 않아.”

레스칼이 훌쩍 몸을 일으켜 라실리아의 앞에 섰다.

마음이 급해 나온 행동이었지만 인간이 그의 행동을 제대로 이해하기란 몹시 어려웠다.

레스칼은 너무 빨리, 기척도 없이 움직였다. 금안은 찬란한데 표정은 적었다. 인간이 보는 건 갑자기 제 앞으로 다가온 레스칼의 무표정뿐이었다.


“나는 절대, 그대를 괴롭히지 않아. 만약 그대가 나로 인해 괴롭다면 그건 내가 모르고 실수를 했다는 뜻이다. 그럴 땐 내게 알려 줘. 그래서 그대에게 용서를 구할 수 있게 해 줘.”

“…….”

그리고 라실리아는 어쩐지 레스칼의 표정을 이해하는 방법을 깨달은 기분이었다. 지금 그가 오해를 받아 초조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꼭 그렇게 해라. 꼭 알려 줘.”

“……알겠습니다.”

레스칼이 작게 숨을 내쉬었다. 안도를 했다는 뜻이었다.


“미리 감사한다.”

‘……진심 같아.’

이번에는 라실리아가 한숨을 쉬었다.

좋지 않았다.

잠든 얼굴을 보면서 그를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이제는 표정을 읽고 감정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래선 안 된다는 걸 알잖아.’

황제와 자신의 결말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자신은 그 결말을 피하기 위해 애를 쓰는 중이었다.

이렇게 하나하나 이해하고 감정을 느끼게 되면 자신은 결국 황제를 사랑하게 될 테고, 황제는 그런 자신을 죽이게 될 것이다.


“어제는 변이가 없었나 보군요.”

라실리아가 발을 뒤로 움직이며 말을 돌렸다.


“아……. 그러고 보니.”

황제도 잠이 들어 어젯밤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잘 모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다행이었다. 변이가 없다는 건 블루문이 곧 진다는 말이 아닐까.


“그럼 이제 방으로 돌아가셔도 되지 않을까요. 저는 이제 씻겠습니다.”

“…….”

황제가 입술을 작게 실룩이며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게 아쉽다는 표정으로 읽혀 난처했다.


“……그래야겠지.”

“네, 폐하.”

라실리아는 빠르게 인사를 마친 뒤 도망치듯 욕실로 향했다.

이제는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된 황제의 표정들이 머릿속에 잔상으로 남아 매우 곤란했다.

* * *



“황후 폐하. 오늘은 훈욕을 하시는 날이옵니다.”

파샤드 후작 부인이 등 뒤에 일곱 명의 시녀들을 기사단처럼 세워 두고 입을 열었다.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황제가 보여 주는 아주 작은 표정들을 읽을 수 있게 된 탓인지, 파샤드 후작 부인 같은 선명한 표정은 눈에 쉽게도 들어왔다.

저건 뭔가를 단단히 각오하고 있다는 그런 표정이었다.


“그런가?”

“예, 황후 폐하. 이쪽으로 서시지요. 연기가 사라지기 전에 어서 욕실로 들어가시는 게 좋사옵니다.”

후작 부인이 겉으로는 지극히 공손한 척, 허리를 숙이며 손짓을 했다.


“탈의를 거들겠나이다.”

하지만 목적은 협박이었다.

후작 부인은 황후가 사라지는 표식을 감추고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일부러 시녀들을 전부 불러 놓고 옷을 벗을 상황을 준비해 놓았다.

과연 네가 그렇게 쉽게 비밀을 털어놓을 수 있겠냐는 도발이었다.


“아, 내가 그 말을 하지 않았군.”

그러나 의도치 않게 라실리아는 후작 부인의 도발에 대비를 해 둔 상태였다.


“무엇을 말이옵니까, 황후 폐하?”

“앞으로 내 목욕 시중은 슈라이든 공녀가 들 것이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당황한 후작 부인의 목에 핏대가 섰다.


“슈라이든 공녀라니. 황후궁에 그런 이가 있단 말입니까? 저희들은 이름도 들어 본 적이 없나이다.”

“어제 폐하의 인가를 받아 황후궁의 시녀로 임명했다.”

“어제라니요. 어떻게 그런 일을 한마디 말씀도 없이…….”

후작 부인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라실리아는 이런 일에 둔했지만 황후궁의 시녀들은 사교계의 축소판이자 절정이었다. 황후의 측근 여덟 명, 그중에서도 제1시녀인 파샤드 후작 부인의 영향력은 어마어마했다.

자신들이 구축한 탄탄한 권력의 세계에 느닷없이 돌이 하나 굴러온다는데 충격이 전해지는 건 당연했다.


“내가 내 시중을 들 사람을 고르는 일을 그대들에게 미리 말을 해야 하나? 그럴 리는 없을 텐데.”

“황후 폐하. 궁에는 예법이 있고 관례가 있사옵니다. 그걸,”

“지금 내 앞에서 예법과 관례를 따지고 들겠다는 건가?”

라실리아가 엄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그건 예언자로서 지녔던 모습이었지만, 황후의 모습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누가 황후인지 모르겠군.”

후작 부인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그러나 여기서 물러나기엔 후작 부인은 잃을 게 제법 많았다. 그리고 카르타헤나 황후를 너무 잘 알았다.


“하, 하오나…… 목욕 시중처럼 중요한 일을 어찌 다른 이에게 맡기신단 말입니다. 그건 마땅히 제1시녀인 제 몫이옵니다.”

안타깝게도 라실리아는 카르타헤나 황후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슈라이든 공녀가 제1시녀가 되어야겠군.”

“네……? 황후 폐하, 어찌 그런 말씀을 그리도 쉽게,”

“신분을 따져도 그게 맞지 않나. 슈라이든 공녀는 공작가의 외딸이니.”

후작 부인이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요! 슈라이든 공작가라니, 그런 가문은 제국 내에 없습니다!”

라실리아는 후작 부인이 악을 쓰든 말든 싱긋 웃었다.

마침 욕실 문 뒤에서 삐이, 하는 귀여운 목소리가 들려온 탓이었다.


“들어와, 공녀.”

“어, 어……? 네? 제가 도착한 걸 벌써 아셨나요, 황후 폐하? 그럼 들어가겠나이다.”

잠시 당황한 듯 주춤대던 이베트가 욕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너무너무 좋은 아침입니다!”

“삐이!”

욕실로 들어오는 이베트를 본 시녀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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