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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잠들 수 없는 밤 (25/96)


25. 잠들 수 없는 밤
2022.11.27.



 


“너는 천재야, 리얀! 그런 생각을 다 하다니!”

세르벤이 흥분해 소리쳤다. 그러다 정강이를 또 걷어차였다.


“목소리 낮춰. 누가 듣기 전에.”

“아니, 씨, 아으, 아파……. 하, 누가 듣는다고. 주변에 인기척이라고는 하나도 없는데.”

“인기척이 다가 아냐. 낮말은 새가 듣는다고 하잖아.”

세르벤이 정강이를 감싸 쥐고 끙끙대다 어이없다는 듯 눈썹을 치켜떴다.


“새가 들으면, 뭐가 어떻게 되는데?”

“황후 폐하한테 고자질하겠지, 뭐. 그럼 간만에 내가 꾸민 사악하고 음험한 계획이 물거품으로 돌아갈 테고.”

세르벤이 정강이를 놓고 리얀의 어깨를 짚었다. 그리고 몹시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리얀. 너 어디 잘못된 거 아니지? 이 오빠가 걱정이 크다.”

“이 누님은 몹시 멀쩡하고 똑똑하니까 그럴 필요 없고.”

“아니, 네 착각일지도 몰라. 이 세상에 사람 말을 알아듣고 고자질까지 하는 새는 없어. 그건 알고 있지?”

리얀이 피식 웃었다.


“동생아. 너야말로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슈라이든 공작을 보고서도 그런 말이 나와?”

“아니, 그건 예외잖아. 그러니까 애초에 브레넌 공작도 작위를 물려줄 생각을 한 거 아냐?”

“나는 그게 영 이상하더라고.”

“뭐가?”

리얀이 세르벤의 귓불을 쭉 잡아당겼다. 세르벤은 인상을 쓰면서도 순순히 몸을 숙여 귀를 가까이 대 주었다.


“자꾸만 새가 걸려드는 게.”

“응?”

“내가 황후 폐하의 침실에서 뭘 훔쳐왔다고 했던 거, 기억해?”

“그 빨간 돌?”

“응.”

리얀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세르벤도 쌍둥이 동생을 따라 덩달아 진지해졌다.


“그 돌을 까마귀가 훔쳐갔다고 한 것도 기억해?”

“알아.”

“아까 황후 폐하께서 사라지셨을 때 말이야, 방 안을 둘러보는데 이게 나오더라고.”

리얀이 주머니를 뒤적여 뭔가를 꺼내 들었다.

사과 씨보다 작은 무언가였다.


“이게 뭔데?”

“내가 훔쳐가고 검은 새가 다시 훔쳐간 돌 조각. 그게 다시 황후 폐하께 돌아간 거야.”

“음?”

“이게 깨진 채 바닥에 떨어져 있었어. 나머지는 없는 걸로 보면 치우다가 실수로 흘린 모양이야.”

“돌이 깨져?”

“그럴 리가 없지. 돌이 아니라, 혹시 알이지 않았을까?”

세르벤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단단한 알이 있다고? 돌하고 알은 무게감이 달라.”

“나도 알아. 그런데 이것 봐 봐. 돌조각이라고 하기엔 얇아. 알껍데기라고 하기엔 너무 단단하지만.”

세르벤이 그 작은 조각을 조심스레 쓸어 보았다.


“그건 그러네.”

“그리고 황후 폐하가 계신 곳에는 하필 새가 있었지.”

“그게 왜?”

다시 돌조각을 챙겨 넣은 리얀이 앞머리 쪽으로 푸, 입바람을 불어넣으며 말을 이었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기막히지 않냐 이거야. 내가 훔친 돌을 그 까마귀가 다시 황후 폐하께 가져다준 게 아닐까? 그리고 슈라이든 공작이 오늘 한 짓을 봐. 기가 막힌 순간에 나서서 도움이 됐잖아. 눈치 없이 황후 폐하 옆에 찰싹 들러붙어 있는 바람에 폐하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기도 했지.”

“그래서.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새들이 황후 폐하를 돕는 것 같다고. 그것도 그냥 한두 마리가 아닐 거야.”

세르벤이 이마를 짚었다.


“아니, 좀……. 희한한 일이 두 번 벌어졌다고 쳐. 그렇다고 그렇게까지 생각하는 건 너무 음…… 망상 아냐?”

“최초의 반려.”

세르벤이 한숨을 쉬었다.


“리얀. 가끔 너는 너무 빨라. 갑자기 얘기가 왜 거기로 튀는지부터 설명해.”

“최초의 반려가 늘 새와 함께 했다는 기록이 있지 않아?”

“기록이야 있지. 불꽃 같은 빨간 깃털을 가진, 영원히 죽지 않는 새라고……,”

“‘일컬어졌으며 후대의 인간들에게 새들의 왕이란 칭호를 얻었다.’”

“……?”

“새들의 왕이라잖아. 그런 말이 괜히 생겨났겠어?”

세르벤이 두 번째 한숨을 쉬었다.


“어린애도 못 믿을 옛날얘기 나부랭이를 굳이 황실 기록으로 남겨서 근위대 필독서로 만든 게 누군지 알면 필독서 양피지 개수만큼 패 주겠다고 했던 사람이 누구였더라?”

“지금은 믿어. 황후 폐하가 진짜니까.”

“……리얀. 다시 말하지만 나는 아직 신중하자는 입장이야.”

“그러든 말든. 나중에 두고 봐. 내 말이 맞을 테니까. 하여간 이제 됐지? 나는 간다.”

리얀이 슥 몸을 움직여 세르벤의 옆을 빠져나갔다.


“앗, 잠깐.”

세르벤이 다급히 팔을 뻗었지만 리얀은 아주 매끄럽게 세르벤의 손을 지나쳤다. 그러니까 자신이 길을 막은 게 아니라 리얀이 멈춰 줬다는 말이었다.

세르벤이 리얀이 사라진 복도를 바라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진짜가 아니어도 문제지만 진짜여도 문제라고. 그럼 폐하께서는 평생 황후 폐하를 끔찍이도 사랑하실 텐데 그걸 어쩌냐고.”

혼잣말이 어느 순간 탄식이 되었다.


“지금이야 뭐, 괜찮아 보일지도 모르지. 이유는 모르지만 기억상실인 척하느라 다른 사람처럼 구니까. 그렇다고 사악하고 음험한 그 성품이 어디 가는 게 아니잖아. 리얀 네가 거기에 깜박 속고 있는 거야.”

그러자니 사실 오늘은 그도 속을 뻔했다. 황후는 오늘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궁인 하나의 목숨을 구하려고 그렇게나 애를 쓰다니. 도무지 평소의 황후 같지가 않았다.


“아니, 그야 뭘 꾸미고 있으면 당연히 그래야 되겠지만…….”

그런데, 만일 아니라면.

그저 평범한 궁인이고 황후가 정말로 기억을 잃은 것이라면.


“……아, 그럼 좋겠네.”

세르벤이 고개를 치켜들고 한숨을 내쉬었다.

기억을 잃은 황후가 아예 다른 사람이 된 거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자신은 평생 그 기억이 돌아오지 않도록 기도만 하고 살 수도 있었다.

* * *

오늘도 페르손이 혼신의 노력을 다해 그림처럼 꾸며 놓은 레스칼이 황후궁으로 들어섰다.

잘 시간에 이렇게 치장하는 건 사실 생각과 전부 어긋나는 일이었다.

황후의 곁에 스물네 시간 붙어 있기 위해 짐도 옮겨 왔는데, 몸치장을 하기 위해 레스칼은 꼬박꼬박 황제궁을 다녀갔다.

스스로도 이유를 알기가 어려웠다.

다만 황후에게는 좋은 모습을 보이고 싶었고, 동시에 자신이 좋은 모습을 꾸미려 애를 쓴다는 사실은 들키고 싶지 않았다.

덕분에 페르손을 비롯한 황제궁의 시종들이 덩달아 분주해졌다.


“황후 폐하. 황제 폐하께서 드셨습니다.”

황제의 방문을 알린 근위대가 문을 열었다.

이 문을 열고 들어서면 응접실을 겸한 사실이 나왔고, 그중 왼쪽 방이 황후의 침실이었다.


“따라오지 마라.”

레스칼이 혼자 방으로 들어섰다.

이유를 알기 어려운 일은 몇 가지 더 있었다.

황후를 볼 때면 단둘만 있고 싶었다. 그게 근위대건, 아니면 커다란 새 새끼건 거슬렸다.

다행인 건 황후가 이전처럼 시녀들을 주렁주렁 대동하고 다니는 일을 줄였다는 점이었다.

카르타헤나 황후가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혼인한 직후에는 이런저런 핑계로 부지런히 황제궁을 들락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레스칼이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황후는 태도를 바꾸었다. 날카롭게 굴고, 거짓말을 하고, 여덟 명이나 되는 시녀들에게 에워싸인 상태로 얼굴을 대했다.

그때는 황후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었기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황후의 태도가 달라진 이유도 궁금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황후의 모든 게 궁금했다.

황후가 무슨 비누를 쓰는지조차 궁금했다. 같은 비누를 쓰면 자신에게도 황후한테서 나는 좋은 냄새가 날지 궁금했고, 그러면 황후가 자신이 그렇듯 그 냄새를 좋아할지도 궁금했다.


“……좋아한다는 말은 좀 아닌가.”

황후가 혼자 있을 침실 문을 열려던 레스칼이 동작을 멈추고 피식 웃었다.

좋아한다는 말은 제 상태에 비춰 보면 너무 얌전한 말이었다.

살갗에 코를 들이박고 냄새가 전부 사라질 때까지 삼켜 제 속에 가둬 두고 싶다는 욕구는 좋아하는 말과는 달랐다.

그는 보통 인간의 감정엔 아무런 관심이 없었지만 좋아한다는 말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는 대강 알고 있었다.

제 욕구는 그렇게 점잖고 상냥한 말과는 다를 것이다.

달칵.

생각을 접고 문을 열었다.


“…….”

황후는 여느 때처럼 차분한 얼굴로 오셨냐고 묻지 않았다.

달빛에 감겨 잠이 들어 있었다.


“…….”

레스칼은 자칫 거칠어지려는 숨소리를 누르고 황후를 향해 걸어갔다.

푸른 달빛이 드리워진 피부가 고운 상아 같았다. 풀어서 늘어트린 검은 머리가 어깨와 등에서 아름다운 물결을 그렸다.

그가 처음으로 아름답다고 느낀 인간이었다. 그게 다였지만 처음 보는 순간에는 눈을 떼기 어려웠다.

검은 속눈썹은 반달 모양이었고, 그래서 입술을 대어 보고 싶었다. 반듯하게 솟은 코는 끝이 둥글었다. 그 아래 입술이 한 번도 만져 보지 못한 향긋한 과일처럼 말캉댈 것 같았다.


“……,”

홀린 것처럼 황후에게 다가가던 레스칼이 뚝 걸음을 멈추었다.

자신이 없었다.

어디든 만지지 않을 자신이.

라실리아가 황제에게 선을 그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처럼, 레스칼도 황후에게 자신을 향해 그어 놓은 선이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점잖고 상냥하지만은 않은 본능을 드러내면 황후는 몸을 굳히며 선 밖으로 물러섰다.

갑자기 차가워진 시선과 이제 그만 놓으라는 말은 별것 아닌 것 같아도 계속 작은 생채기를 남겼다.

싫어하는 건 하지 말아야 했다.

그러다 아예 자신을 전부 싫어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니까.

레스칼은 감정에 무뎠지만 다른 감각은 예민했다.

오늘 일로 그는 황후가 언제 자신을 덜 싫어하는지 파악했다.

부탁을 들어주니 계속 손을 잡게 해 준 것처럼, 그렇게 하나씩 계기를 만들어야 했다.


“…….”

생각을 마친 레스칼이 발소리를 죽여 황후에게 다가갔다. 조심스럽게 황후를 안아 들고 침대에 눕혔다.
 

 
다행히 황후는 속눈썹을 살짝 흔들 뿐,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레스칼은 침대 밑에 앉아 머리를 침대에 기댔다. 머리를 괴고 있으니 황후의 얼굴이 잘 보였다.

지상에 있는 존재들을 차갑고 어두워 보이게 만드는 마계의 달빛 속에서도 황후는 아름다웠다.

제 속에서 꿈틀대는 마족의 피를 느끼며 레스칼은 숨을 죽여 황후를 바라보았다.

잠이 들어서는 안 되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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