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공작 영애의 길
(24/96)
24. 공작 영애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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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공작 영애의 길
2022.11.23.
입양 절차는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슈라이든 공작이 엘리아든의 황제에게 입양을 허락해 줄 것을 구두로 요구했고, 이에 황제가 구두로 승낙했다는 문서를 두 장 만들어 인장을 찍었다.
세르벤과 리얀과 이베트는 슈라이든 1세가 정식 인장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놀랐다. 새 발바닥 모양이긴 했지만 인장은 인장이었다.
“엣헴. 이것을 나의 봉작서와 함께 서랍장에 넣어주겠나, 시그레스 경?”
세르벤은 앵무새가 한쪽 발로 건네는 황실 문서를 받아 들며 참 뭐라고 말하지도 못하겠다는 식의 표정을 지었다.
“그, 그러…… 겠습니다.”
“엣헴.”
슈라이든 1세가 황금 새장 안으로 푸드덕 날아 들어갔다.
“어, 그럼 저는 이제 뭘 해야 할까요. 하던 대로 계속 황후궁의 궁인 노릇을 해도 괜찮을까요, 황후 폐하?”
안타깝게도 라실리아가 전혀 알지 못하는 부분이었다. 왕족을 상대한 경험이 있다고 해서 귀족 사회의 관습이나 신분체계에 대해 충분히 아는 건 아니었다.
“글쎄. 어떻게 하고 싶은데?”
“저야 계속 일할 수 있으면 감사하죠. 저는 신분이 달라진 것뿐이잖아요? 제가 공작가에 갓 입양됐다고 밝혀야 되는 게 아니라면 그냥 이대로 지내고 싶은데요.”
리얀이 툭 끼어들었다.
“그럼 시녀로 삼으십시오. 공작가의 영애가 궁인들이 하는 힘든 일을 계속 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니까요.”
“시, 시, 시녀, 시녀라고요? 제가요?”
이베트가 놀라 죽을 것 같다는 표정으로 제 얼굴을 가리켰다.
“그그, 그럴 리가 없는데요. 저는 그,”
“공작가의 영애시죠, 이제. 입양아긴 하지만.”
“그그그렇…… 그, 그렇……? 화, 황후 폐하?”
어쩐지 이베트가 숨을 제대로 못 쉬는 것 같아 라실리아가 등을 토닥여 주었다.
“원한다면 그렇게 해. ……아니, 그렇게 하는 게 좋겠어.”
생각은 짧고, 결정은 빨랐다.
이베트는 피피에 대해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당분간 피피를 보살펴야 하는 입장에서는 이베트만큼 도움이 되는 사람도 없었다.
궁인이 아니라 시녀가 되면 다른 시녀를 거칠 필요 없이 곁에 둘 수 있으니 비밀은 더 안전할 것이다.
“그, 그, 그…… 그럼 매우 황공, 하, 황공합, 니다.”
이베트는 여전히 말을 더듬었다.
“저, 진짜…… 너무 꿈같은데…… 너무 정신이 없는데, 그래도 몹시 기쁜 것 같아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일이라……. 저는 기사는 아니지만 목숨으로 충성하겠습니다, 황후 폐하.”
“아니.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어. 네 역할을 다하면 된다.”
라실리아가 이베트의 손을 살짝 쥐었다 놓았다. 그 작은 동작에는 어쩔 수 없이 여기에 두고 가야 하는 피피를 잘 부탁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제 역할…… 아아, 네. 명심하겠나이다, 황후 폐하.”
슈라이든 공작의 입양딸이 됐으니 북쪽 탑은 이베트의 집이기도 했다.
정식 시녀가 되는 건 내일부터 하기로 하고, 이베트는 북쪽 탑에 남았다.
* * *
북쪽 탑에서 황후궁으로 돌아오는 동안에도 레스칼은 라실리아의 손을 놓지 않았다.
‘이상해. 손을 잡는 게 대체 뭐라고.’
그게 계속 신경이 쓰였다.
‘이 사람이 이러는 건 블루문 때문이겠지만.’
아직 환한 밖은 달빛이 드러날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조금 더 지나 해가 지면 이질적인 새파란 달빛이 밤을 온통 적실 것이다.
“그거 아나?”
발자국 소리 틈으로 황제의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무얼 말입니까?”
“내가 부탁을 들어준 뒤로, 그대가 한 번도 내게 손을 놓으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
“그게…… 그렇군요.”
이래서 마음의 빚이 무서웠다.
그러나 빚을 질 만한 일이었다. 레스칼이 해 준 일이 그리 간단한 게 아니었다는 것을 알았다.
어떤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부탁을 들어주고 싶다는 말은 여전히 가슴을 뜨끔하게 만들고 있었다.
‘접촉을 위해서라는 건 알겠는데. 그래도 좀…….’
너무 다정한 게 아닐까.
그렇게까지 다정할 필요가 있는 걸까.
“그래서 나는 지금 기분이 매우 좋아.”
“…….”
라실리아가 대꾸할 말을 놓친 사이 레스칼이 불쑥 고개를 내렸다.
“앞으로도 부탁할 게 있으면 언제든지 해 주길 바란다.”
“그런……. ……알겠습니다.”
“꼭 해야 해. 반드시, 꼭.”
“…….”
저렇게 말하니 부탁을 하는 게 오히려 선심을 쓰는 것처럼 들려왔다.
‘너무 이상해.’
황후와 황제의 관계는 너무 이상했다. 자신이 이제껏 들어 왔던 게 전부 거짓 같았다.
‘블루문에는 본능만 남아 있는 게 아니라 감정 같은 것도 생기는 건가.’
하여간 그들의 정확한 관계는 블루문이 끝난 다음에 알 수 있을 것이다.
“부탁할 일이 있으면 사양하지 않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라실리아는 그런 말로 혼란을 감추었다.
밤은 생각보다 빠르게 찾아왔다.
* * *
“오늘은 한 방에서 주무셔야 할 겁니다. 어제 겪으셔서 알겠지만, 폐하를 거부하셔도 어차피 소용이 없는 일이라.”
“알겠다.”
각오했던 일이었다.
자신은 진짜가 아니니 한 공간에 있는 것은 소용이 없겠지만 그래도 피할 수는 없었다.
변이가 무섭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달빛이 옅어지면 황제는 금방 원래 몸으로 돌아온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새벽까지만 어떻게든 버티면 될 것이다.
게다가 한 가지 믿는 구석도 있었다. 반려를 향하는 본능 탓인지 황제는 변이를 겪어도 제 모습을 해치지 않았다.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그랬다. 마족으로 변이한 황제는 그저 반려라 믿는 이를 끌어안았을 뿐이었다.
그러니 오늘 밤도 무사할 것이다.
“엇, 음…… 순순히 받아들이시네요?”
당황하는 쪽은 일부러 강압적으로 말을 건넨 리얀이었다.
“경은 내가 블루문에 제 역할을 다하지 않았다고 힐난하는 입장이 아니었나? 왜 놀라지?”
“그러게요……. 이젠 익숙해질 때도 됐는데 계속 놀라게 되는군요. 이전과 너무 다르셔서 그럴 겁니다.”
“기억나지 않는 일을 비교해 봤자 나는 답할 수 없는 일이다. 폐하께 나의 답을 전하고, 시간이 되면 황후궁으로 모셔오도록.”
“알겠습니다, 황후 폐하. 그럼……, ……아, 하나만 더.”
등을 돌려 황후궁의 침실을 나서려던 리얀이 다시 몸을 빙글 돌렸다.
“북쪽 탑은 왜 가신 겁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거기에 볼일이 있으실 것 같진 않은데.”
혹시 누군가 물을까 봐 미리 답을 생각해 두긴 했다.
그 사람이 황제가 아니라 리얀이라는 게 조금 의외긴 했다.
“시간이 나면 궁 여기저기를 살피고 있다. 혹시 기억을 되돌리는 데 도움이 될까 해서. 북쪽 탑은 그러다 우연히 가게 됐을 뿐이야.”
“우연이었다지만 어째서 그 많은 근위대가 폐하의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을까요?”
“그건 그들의 일이지, 내가 해명할 일이 아니다.”
“뭐, 틀린 말은 아니군요. 근위대 놈들을 더 족쳐야지, 원.”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던 리얀이 다시 물었다.
“혹시나 해서 묻는데 말입니다, 밤이 아닌 낮에 폐하의 그쪽 모습을 보셔도 여전히 폐하의 외모에 대한 감상은 그대로인 겁니까?”
“그걸 굳이 묻는 이유가 뭔가?”
“그냥 순수하게 궁금해서요. 밤과 낮은 또 다를 수도 있고 그렇잖습니까. 갑자기 폐하께서 문을 부수고 들어가셔서 굉장히 놀라셨을 수도 있고 그러니까요.”
자꾸 사람의 외모를 두고 하는 질문은 썩 편하지 않았다.
거울도 없는 방의 침묵과 어둠이 익숙한 라실리아에게 사람의 외모란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보여지는 순간은 짧았고 잊을 시간은 아주 많았다.
‘그 사람 같은 경우는 너무 강렬해서 기억이 더 오래 가는 거겠지만.’
게다가 오늘 낮의 모습은 어젯밤보다 더 나았다.
뼈가 튀어나온 데가 없어 덜 고통스럽게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낮이라 그런지 변이가 많진 않았다. 아픔을 덜 겪으셨을 테니 다행이지.”
“아…… 그런 말씀을 하실 줄은 몰랐는데. 그래서 생각은 바뀌지 않으셨다는 겁니까?”
“바뀔 이유가 없다. 잠시 변이를 겪었다고 폐하가 바뀌신 것도 아닌데.”
겉모습이 달라지는 건 그가 점점 더 다정하게 구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폐하의 변이가 황후 폐하께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는가 봅니다. 알겠습니다.”
리얀이 가볍게 허리를 굽혔다.
“그럼 폐하를 모셔오겠습니다.”
탁.
리얀이 문을 닫고 나섰다. 시녀들의 도움 없이 혼자서 잠옷으로 갈아입은 라실리아가 창문을 열고 그 아래 일인용 소파에 앉아 푸른 달을 응시했다.
황궁에서 보내는 시간은 매사가 위태로웠지만 좋은 점도 있었다.
아무 때나 창밖을 쳐다볼 수 있다는 점이었다.
* * *
“북쪽 탑은 별 이상 없어. 아직까진.”
“아, 그렇군.”
“믿기 어렵지만 슈라이든 공작 얘기는 사실이야. 서고 담당자가 확인해 줬어.”
“그쪽은 의심도 안 했어. 딱 선황께서 하실 법한 일이잖아.”
“혹시 몰라서 그 궁인의 신변 조사도 했어. 모친은 어릴 때 사망, 부친도 이후 병사. 동생은 둘이고 둘 다 아직 미성년자야. 극빈층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돈을 마다할 입장도 아니야. 그리고 황립 도서관에서 일한 것도 확인됐어.”
“어우, 책벌레였겠네. 그러니까 황실 기록서 같은 걸 읽을 생각을 다 했지. 그 정도면 도서관에 있는 책은 다 읽은 거 아냐?”
“…….”
황후의 호위를 맡은 세르벤은 황후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리고 리얀은 지금 가볍게 콧노래를 부르며 황제궁으로 가는 길이었다.
걸음을 멈출 생각이 없는 리얀을 잠시 바라보던 세르벤이 결국 앞을 막아섰다.
“잠깐, 리얀.”
“아, 왜.”
“우리 얘기할 거 있잖아. 넌 걱정이 안 돼?”
“걱정할 게 뭐 있는데?”
“뭐긴. 황후 폐하께서 진짜 우연히도 북쪽 탑에, 우연히도 궁인과 단둘이 있었다는 게 말이 되냐고. 당연히 무슨 일이 있는 거지. 폐하와 우리 눈을 피해서 저질러야 하는 일이.”
리얀이 쯧쯧,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어쩌게. 다 끝난 일을 이제 와서 뭐, 다시 뒤엎자고? 폐하께서 그 꼴을 잘도 봐주시겠다.”
“아니, 폐하께서는 그러시더라도…… 너나 나까지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우리라도 그 궁인을 감시하든가 해야지. 나는 당연히 네가 먼저 그 얘길 꺼낼 줄 알았는데.”
“아, 그랬어?”
이어서 리얀이 아무런 조짐도 없이 세르벤의 정강이를 퍽 걷어찼다. 세르벤이 정강이를 붙들고 터지려는 비명을 참았다.
“윽! 왜, 걷어차고, 그래. 말로…… 하면 되지.”
세르벤이 오만상을 쓴 채 간신히 내뱉었다.
“오늘따라 네가 너무 멍청하게 굴어서. 너는 이럴 때 한 대 때려 주면 정신 차리더라.”
“내가, 뭘.”
“쯧쯧……. 그 궁인은 이제 시녀가 됐잖아. 슈라이든 공작 영애로서. 그게 무슨 뜻인지 몰라?”
“음?”
세르벤이 정강이를 놓고 리얀을 쳐다보았다.
“네가 괜히 시녀로 삼으라는 말을 한 게 아니야?”
“지금 황후궁의 시녀장은 파샤드 후작 부인이지.”
“그런, 데?”
“느닷없이 공작 영애가 나타나면 후작 부인이 어떻게 나올까? 황후 폐하의 시녀장이라는 얘기는 사교계에서 2인자라는 소리야. 황후 폐하께 들어가는 청탁은 당연히 전부 파샤드 후작가를 거치게 되어 있다고.”
세르벤의 표정이 변했다.
“그럼?”
“슈라이든 공작 영애에게 뭔가 석연찮은 구석이 있으면, 우리가 뭘 애쓰지 않아도 여덟이나 되는 시녀들이 알아서 탈탈 털어 줄 거란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