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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당신이 믿지 못할 황궁의 이모저모 (23/96)


23. 당신이 믿지 못할 황궁의 이모저모
2022.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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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말리크의 기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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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황후 폐하. 그건요……,”

제국의 역사 전반에 걸쳐 다방면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이베트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라실리아가 전혀 모르는 눈치를 보이자 재빨리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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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리오스 신전의 기사단이에요. 성 말리크의 기사단은 역사가 오래되긴 했지만 고대의 마법을 잇는다고 하는 좀 수상쩍은 집단이라 사회에서는 배척받는 분위기였는데, 얼마 전 하리오스 신전에서 정식 기사단으로 받아들였어요. 굉장히 갑작스러운 일이라 말들이 많았답니다.”

대륙을 만들었다 하는 태초 신의 이름이 하리오스였다.

델라르타에서는 물과 번영의 신 카네스를 주신으로 삼지만 그렇다고 다른 신들의 이름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엘리아든의 주신은 하리오스였다. 지방으로 갈수록 해당 지역의 신을 자유롭게 믿는 편이었고, 제국 내에서 딱히 다른 종파에 대한 제재는 없었지만 그래도 가장 세력이 큰 곳은 하리오스 신전이었다.


“그런데 왜 뱀대가리인 거지?”

“앗,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성 말리크는 고대 마법사의 이름이지 뱀하고는 딱히 연관점이 없거든요. 뱀에 관련한 마법을 썼다는 말도 없었는데……?”

속삭이는 듯했지만 그렇다고 그림자 기사들의 귀를 피할 정도는 아니었다.


“왜냐면 그놈들은 혀가 길거든요, 황후 폐하.”

리얀이 이베트를 쳐다보며 말해 주었다.


“그리고 그 사기꾼 마법사 이름을 들먹이는 걸 보면 알겠지만, 마족의 피가 이어진 황실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고요.”

그것도 아주 오래된 일이었다. 엘리아든의 이름이 생기기도 전이었다.

마족의 등장이 동화처럼 신비롭고 아름다웠을 리만은 없었다. 마족의 존재는 인간에 대한 위협으로 보이기 십상이었고, 마침내 마족이 인간에게 피를 종속시키면서 몸을 인간화하기까지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마법사들은 당시 마족을 상대로 싸운 이들이었다. 그중 가장 큰 역할을 한 게 대마법사 말리크였다.

이베트가 홱홱 고개를 옆으로 저었다.


“제가 성 말리크의 기사단에서 온 끄나풀이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절대로 아닙니다! 맹세할 수 있어요!”

“꼭 그렇다는 말은 아닌데. 뱀대가리들이 폐하께서 직접 황법을 어긴 일을 알게 되면 꼬투리를 잡을 수도 있단 말이지.”

“앗, 그런…….”

이베트가 울상을 지으며 입을 꾹 다물었다.

라실리아가 이베트의 등을 토닥이며 리얀을 마주했다.


“이미 폐하께서는 이베트의 목숨을 보장하셨다. 폐하의 기사가 폐하가 하신 말을 가벼이 여길 일은 없을 텐데, 경은 무슨 말을 더하려는 건가.”

“말씀드렸듯이 폐하의 뜻은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대책은 세우고 싶습니다. 목숨은 살려 두되, 법을 어기지 않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럼 이 궁인이 실제로 뱀대가리들과 한패라 해도 문제가 되진 않으니까요.”

세르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아무런 불만도 없다는 얘기는 아니었다.


“저도 동의합니다. ……여전히 위험하다는 생각은 합니다만.”

사람을 무턱대고 믿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은 라실리아에게도 있었다.

이미 황제에게는 의도하진 않았지만 약간 마음의 빚을 지고 있는 상태였다. 제 죄책감으로 황제에게 쓸데없이 피해를 주는 일은 막고 싶었다.


“그럴 수 있다면 그게 좋겠습니다, 폐하.”

라실리아가 이렇게 말하자 레스칼이 느릿하게 웃었다. 뜬금없이 기분이 좋아 보이는 모습에 다들 조금 어리둥절해졌다.


“황후가 그렇다면. 방법을 말해 봐.”

“음, 그게…….”

이베트가 싹싹 눈물을 닦아내더니 번쩍 손을 들었다.


“폐하의 모습이 달라진 걸 봐도 괜찮은 경우가 있다고 하셨잖아요? 저도 그런 경우가 되면 괜찮지 않을까요? 저는 황족이 아니니 그렇다면 죽음의 맹세를 하겠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베트는 깨끗한 유리 같은 사람이었다. 속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표정으로 곧장 보였다.

리얀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대꾸했다.


“저런 성격에 굳이 끄나풀 노릇을 시킬 것 같진 않지만……. 그건 안 돼. 기사가 아니니까.”

“아, 저런…….”

그새 시무룩해진 이베트의 눈가에 가뭇한 그늘이 드리워졌다.

라실리아가 위로를 하듯 이베트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라실리아를 보고 있던 황제가 반대편 손을 잡아당겨 쥐었다.

라실리아가 왜 그러냐는 식으로 쳐다보자 황제는 은근슬쩍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손을 놓아주지는 않았다.


“예외는 없나?”

아직도 빚진 기분이 드는 터라 라실리아는 손을 포기하고 리얀에게 물었다.


“제가 알기로는 없습니다. 법학자를 불러다 물어보면 좀 더 자세한 걸 알겠지만, 그러자니 비밀이 새어나갈 위험 부담이 늘어나고요.”

황제가 별일 아니라는 듯 툭 말을 던졌다.


“황족으로 만들면 되겠군.”

“네? 궁인을 황족으로요? 어떻게 말입니까?”

“입양하면 돼.”

“아니, 그러니까 궁인을 입양할 황족이 어디 있습니까. 그것도 갓난아기도 아니고 다 자란 성인을요.”

“내가 있잖아.”

“네……?”

이제껏 내내 입장이 달랐던 사람들이 처음으로 다들 똑같은 마음이 되었다. 지금 이런 말을 하는 게 황제인지 믿을 수가 없다는 심정이었다.


“나와 카르타헤나에게는 아직 아이가 없으니. 입양도 이상하진 않아.”

세르벤이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이상합니다! 완전 이상합니다!”

이베트가 당황해 라실리아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황후 폐하. 제가 황후 폐하보다 나이가 더 많습니다. 분에 넘치는 은혜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이건 좀…….”

리얀이 잔뜩 인상 쓴 얼굴로 레스칼을 쳐다보았다.


“폐하. 황후 폐하의 부탁을 들어드리고 싶은 마음은 백번 이해하겠습니다만 방법이 너무 과합니다.”

“그 외에는 방법이 없지 않나? 있다면 말해. 듣겠다.”

“아니, 그렇게 말씀하시면 또 할 말이 없긴 한데……. 그래도 황후 폐하보다 나이가 많은 황녀가 생기면 그거야말로 수상한 일이 있다고 떠드는 모양새가 될 것 같고 그런데요…….”

방법은 몹시 뜻밖의 곳에서 나타났다.


“엣헴! 그건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푸드득!

슈라이든 공작이 커다란 날개를 멋들어지게 포닥이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저건 또 무슨…….”

당혹과 어이없음이 그림자 기사들의 얼굴 위에 총총 쌓였다.

슈라이든 공작은 그런 표정을 기대하고 있었다는 듯, 느긋하게 한 바퀴 허공을 돌다 라실리아의 무릎 위에 착 내려앉았다.


“이 몸은 슈라이든 1세! 엄연한 황족입니다!”

“……음?”

 

* * *

피피는, 어디까지나 보류 중인 임시 이름이었지만, 하여간 슈라이든 공작의 머리 깃털 사이에 잘 숨어 있었다.

피피를 확인한 라실리아가 마음을 놓았다. 피피가 워낙 몸집이 작으니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황족…… 이라고요? 새가?”

“아니, 그 전에. 아무리 앵무새라지만 저렇게 사람처럼 말을 해도 되는 겁니까? 말하는 정도가 아니라 대화를 하고 있는데요.”

세르벤과 리얀이 레스칼을 쳐다보았다.

레스칼은 금안을 가늘게 뜨고 슈라이든 공작을 쳐다보았다. 사실 그도 이 이상한 새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슈라이든 1세?”

“엣헴. 황궁의 북쪽 탑은 슈라이든 1세의 영지입니다. 선황께서 명하셨지요.”

“선황이 왜 그런 짓을.”

레스칼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 표정에 움찔 겁을 먹은 슈라이든이 라실리아의 품 안에 파고들어 소매 사이로 고개만 내밀었다. 그걸 보는 레스칼의 인상이 좀 더 삭막해졌다.


“폐하께서는 브레넌 공작가를 아십니까?”

“……안다. 그리고 새는 원래 그따위로 앉는 짐승인가?”

“브레넌 공작가의 마지막 공작이 저를 키웠지요. 아홉 살의 나이로 불운하게도 생을 마감한 가엾은 공작님이 제게 작위를 물려주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이란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이 탐욕스러운 법. 제가 새라는 이유로 상속권을 강탈하려는 후안무치한 짓거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때 겪은 일을 책으로 써도 서너 권은 족히 나올 겁니다. ……그리고 새는 앉을 때 정갈하게 횃대 위에 앉지요. 맞은편에 앉은 인간이 무섭게 노려보지만 않으면 말입니다.”

“와……. 말 진짜 잘……. 헛,”

감탄을 내뱉던 이베트가 제 실수를 깨닫고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이베트 때문에 잠시 멈췄던 슈라이든 말이 계속 이어졌다.


“브레넌 공작가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짐승보다 못한 짓을 보다 못한 선황께서 작위와 영지를 임의로 회수하셨습니다. 그때는 그저 어린 새였던 제게는 영지를 지킬 힘도 없었거니와 브레넌 공작가를 이을 후세가 계속 새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판단하셨겠지요. 허나 제 상속권은 정당한 법적 절차를 밟은 것이었고, 제국의 황제라 하더라도 함부로 앗아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선황께서는 제게 한 세대만 가능한 새로운 작위를 주시었고, 황궁 한 켠에 영지를 마련해 궁인들로 하여금 저를 보살피게 하셨습니다.”

“아, 저도 그 얘기를 들어 본 것 같습니다!”

이번에도 이베트였다.


“황립 도서관의 황실 기록서에서요. 당시 황실 서기관이 「당신이 믿지 못할 황궁의 이모저모」라는 제목으로 수기를 남겨 두었거든요.”

슈라이든도 열성적으로 외쳤다.


“선황께서 서명하신 봉작 증서도 있습니다! 저 서랍장을 열어 보시면 아실 겁니다!”

그 말에 세르벤이 벌떡 일어서서 서랍장을 향해 다가갔다.

고풍스러운 서랍장을 열자 그 안에는 금판에 깨알처럼 글씨를 새긴 증서가 들어 있었다.


“아니, 무슨 이런…… 동화 같은 일이.”

리얀이 똑같은 얼굴로 그 말을 받았다.


“듣고 보니 선황께서 하셨을 법한 일이긴 합니다. 분명 증서에 서명을 하시면서 낄낄…… 아니, 즐겁게 웃으셨을 겁니다.”

레스칼은 세르벤이 건넨 증서를 힐긋 쳐다본 뒤 도로 세르벤에게 건넸다.

증서는 진짜였다.


“그래서. 네가 브레넌 공작가의 후손이니 피는 섞이지 않았어도 황족이라는 건가?”

“그렇습니다. 브레넌 공작가는 다섯 가문을 제외하면 황실과 가장 근친한 혈통을 지닌 가문이었습니다. 저는 작위를 이어받지 못했을 뿐, 정식 후계자이므로 황족이 맞습니다.”

“……코에 걸어서 코걸이인 식이지만 우겨 볼 수는 있겠군.”

여전히 떨떠름한 얼굴이었지만 세르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네, 폐하께서 입양하시는 것보다는 차라리 새가 입양하는 게 모양새가 나을 것 같습니다.”

리얀도 마찬가지였다.


“슈라이든 공작이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을 테니 입에 오르내릴 일도 덜할 테고요.”

이베트의 얼굴이 흥분으로 달아올랐다.


“저, 그럼 저는 공작가의 영애가 되는 건가요? 정말로요?”

세르벤이 재빨리 설명을 덧붙였다.


“그렇긴 해도 작위를 물려받지는 못해. 슈라이든 공작의 작위는 1세에 한하니까. 재산도 썩 많을 것 같지 않고.”

“아니요, 아니요! 그런 건 바라지도 않습니다. 죽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인데 갑자기 귀족 아가씨가 됐어! 이럴 수가! 꿈만 같아요!”

이베트가 기뻐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얼굴로 라실리아의 손을 꼭 잡고 흔들었다.


“잘됐네.”

라실리아가 이베트를 바라보며 웃자 레스칼도 라실리아의 손을 흔들었다.

라실리아가 레스칼을 돌아보았다.


“폐하께서는 왜 그러시나요?”

“그대가 기쁠 테니까.”

“제게는 기쁜 일이지만……,”

“그러니 내게도 기쁜 일이다.”

 

레스칼이 꼭 쥐고 흔들던 손등에 입술을 댔다. 순간 심장에서 달칵, 소리가 났다.

라실리아가 잠깐 숨을 멈추고 레스칼을 응시했다.


‘아…… 왜 이러지.’

네가 기쁘니 나도 기쁘다는 그 말은 라실리아가 이제껏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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