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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허락받지 않은 자 (22/96)


22. 허락받지 않은 자
2022.11.16.


칼을 드는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게 좋지 않은 의미라는 것은 명확했다.

라실리아가 이베트를 몸으로 감추며 세르벤을 향해 표정을 굳혔다.


“무슨 짓인가, 경. 칼을 내려.”

“그림자 기사로서 의무를 다하는 것뿐입니다, 황후 폐하. 폐하의 모습은 허락받지 않은 자가 함부로 볼 수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리얀이 세르벤의 등 뒤에서 말을 보탰다.


“다시 말해 그 궁인은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았으니 입을 막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황후 폐하.”

“히익, 끅!”

입을 막아야 한다는 말에 이베트가 제 손으로 입을 막았다.

라실리아가 팔을 뒤로 돌려 이베트를 감쌌다.

이베트가 떨리는 손으로 제 소맷자락을 쥐었다. 표정을 보지 않아도 얼마나 무서워하고 있을지 생생히 전해졌다.
  

 


“이해가 가지 않는데. 폐하께서 블루문에 모습이 변한다는 건 궁의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닌가? 그걸 봤다 해서 입을 막아야 한다니. 그게 대체 무슨 말이지?”

“그렇다고 알고 있는 것과 두 눈으로 보는 것은 다르니까요. ……그건 그렇고, 황후 폐하께서는 지금 황법 집행을 방해하시는 겁니까?”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어제만 해도 폐하의 모습을 본 자들이 많이 있지 않나. 왜 지금 꼭 처벌을 해야 한다는 거지?”

“아니요, 황후 폐하. 황후 폐하를 제외하면 저희 둘밖에 없었습니다.”

“그럴 리가. 궁 안에 사람이 어디든 있었는데.”

“인간이 볼 수 있을 만한 움직임이 아니었습니다.”

그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

황제는 어둠 속에서 갑자기 뛰쳐나왔다. 황제의 뒤로 그를 뒤쫓는 근위대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다면 오늘은?”

“목격한 이들은 근위대의 수석기사들이었습니다. 목숨으로 충성을 맹세한 이들입니다.”

“…….”

라실리아가 할 말을 잃었다. 세르벤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한마디 덧붙였다.


“그 모습을 봐도 괜찮은 건 죽음으로 충성을 맹세한 자와 황족의 피가 이어진 자뿐입니다. 그 어떤 예외도 없습니다.”

황족이 마족의 피를 이었다는 사실은 명확했지만 그 모습을 사람들이 직접 목격한 것은 까마득한 옛날 일이었다.

이제껏 레스칼처럼 마족의 피를 짙게 타고난 황제는 없었다. 블루문에 변이를 겪었다는 황제는 초기의 몇 명뿐이었다.

그 뒤로는 모두 제때 반려를 맞이했거나, 아니면 변이를 겪을 정도로 마족의 특성이 강하지 않았다.

그림자 기사들조차 레스칼의 변이에 익숙해지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그 모습을 평범한 사람들이 본다면 커다란 파장이 일 것이다.


“이제 비켜 주십시오, 황후 폐하. 저 궁인의 신변은 저희가 맡겠습니다.”

그럴 수는 없었다.

아무리 법이 그렇다 해도 이베트는 자신의 말을 따른 것밖에 없었다.

라실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그건 너무 과한 처사야.”

“법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황후 폐하.”

세르벤이 일부러 더 냉정한 목소리를 냈다.


“잔혹한 듯 보여도 그런 법이 이제껏 황실과 황제 폐하를 지켜 왔던 겁니다.”

잠깐 말을 끊은 세르벤이 입매를 비틀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저는 명확한 황법을 어긴 궁인을 황후 폐하께서 감싸고도시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대체 언제부터 궁인의 목숨을 아끼셨다고요? 이제껏 황후궁에서 이것보다 훨씬 더 사소한 이유로 죽어 나간 궁인이 몇 명이나 되는지는 알고 계십니까? 아, 물론 모르시겠지요. 말 그대로 황후 폐하께는 너무 사소한 일일 테니.”

“그건…….”

기억하지 못한다는 말은 답이 되지 못했다.

이곳에서 라실리아는 황후였다. 엘리아든의 카르타헤나 황후는 변덕스럽고, 잔인하고, 거짓말을 일삼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황제를 제멋대로 휘두르기 위해 접촉을 무기로 삼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저는 그림자 기사로서 뭔가 다른 목적이 있지 않나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황후 폐하. 저 궁인이 황실의 안위를 위협할 수 있는 존재가 됐음에도 살아남아야 하는 이유가 있는 겁니까? 저 궁인을 통해 무슨 일을 꾸미고 계셔서 그런 겁니까? 그래서 단둘이 아무도 찾지 않는 북쪽 탑을 골라 숨어 있었던 건 아닙니까?”

“네? 아닙니다! 정말 그렇지 않습니다!”

울컥 소리를 지른 이베트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정말…… 정말입니다. 황후 폐하께서는 아무 일도 꾸미고 계시지 않습니다. 저를 통해 뭔가 하려고 하셨다면 제가 알아야죠! 하지만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정말이에요!”

세르벤은 이베트의 말은 귀담아듣지 않았다.

이제껏 겪은 바로는 카르타헤나 황후가 이상한 짓을 할 때는 반드시 이유가 있었다.

기억을 잃었다고 떠들고 다니는 황후가 아무도 모르게 모습을 감춘 게 벌써 두 번째였다. 두 번은 결코 우연일 수 없었고, 그래서 더 철저히 의심해야 했다.

그간 의심하던 것과는 달리 카르타헤나 황후가 진짜 반려일 수도 있었다. 이미 리얀은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는 듯했다.

세르벤은 그게 더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황후에게는 그간 레스칼을 거부해 온 다른 이유가 있다는 말이었으니까.

그 이유는 아직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 분명히 음험하고 사악한, 어떻게든 황제에게 해를 끼치는 이유일 것이다.


“비켜서십시오, 황후 폐하. 일이 더 복잡해지기 전에.”

세르벤이 최후통첩처럼 칼을 들어 올렸다.

라실리아가 입술을 질끈 물었다.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이 순간 기댈 수 있는 것은 황제뿐이었다.


“폐하.”

 

* * *



“흑, 흐윽, 진짜…… 진짜 아닌데…… 저는 정말이지…… 흐윽!”

겁에 질린 이베트가 바닥에 엎드려 어쩔 줄 모르고 울음을 터트렸다.

라실리아가 그 옆에 앉아 이베트를 보호하듯 안았다.


“…….”

제 앞으로 다가온 황제가 눈높이를 맞추려는 것처럼 바닥에 앉았다.

그림자 기사들의 당혹스러운 표정이 얼핏 보였다. 지금 이 순간 올려다보지 않아도 되는 시선은 다정함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폐하.”

라실리아가 어렵사리 다시 한번 레스칼을 불렀다.


“말을 해.”

“……이 궁인이 폐하의 모습을 보게 된 건 그저 우연이었습니다. 결코 의도한 바가 아닙니다.”

“의도는 예외가 되지 않는다.”

“압니다. 하지만 폐하께서는 예외를 만들 수 있는 존재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거래를 하자는 건가?”

“부탁을 드리는 겁니다.”

라실리아를 보는 금안이 가늘어졌다. 뭔가를 살피듯, 혹은 의심하듯.


“들을 만한 청이었다면 기꺼이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 역시 그대가 궁인 하나의 목숨을 내게 청하는 상황이 낯설다.”

그러니 의심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었다.


“폐하의 기사가 말한 것 같은 일은 조금도 없었습니다. 죄 없는 자가 그저 저를 따라왔다는 이유로 과한 벌을 받는 걸 두고 볼 수 없을 뿐입니다. 신의 이름을 걸고 맹세할 수 있습니다.”

“안타깝지만 그대는 신의 이름으로 너무 많은 거짓 맹세를 했다.”

“…….”

대체 황후는 어떤 인간이었던 걸까.

라실리아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이번만큼은 예외로 해 주십시오.”

결국 이런 말을 해야 했다.


“그럼 저도 폐하께 예외를 드리겠습니다.”

“……거래가 맞군.”

거래라는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세르벤이 검의 손잡이를 꽉 움켜쥐며 레스칼에게 말했다.


“폐하. 응하시면 안 됩니다. 황후 폐하께서 어떤 분이신지는 폐하께서 잘 아시지 않습니까.”

“조용히. 생각 중이다.”

“폐,”

레스칼이 손짓으로 세르벤의 입을 막았다.

정말로 생각을 하는 것처럼, 레스칼이 천천히 턱을 매만졌다.


“만일 그대의 맹세가 예외가 아니라면. 그땐 어떻게 할 셈인가.”

“……제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래.”

금안이 제 몸을 꿰뚫을 것처럼 쳐다보았다.


“나에겐 그대를 믿을 이유가 없다. 명확한 법을 어긴 궁인을 위험을 감수하며 살려 둘 이유도 물론 없고. 하지만 나는 지금, 그대가 말하는 걸 들어주고 싶다. 부탁이든 거래든 상관없으니, 뭐든지.”

“끄응, 폐하…….”

세르벤이 이를 물고 앓는 소리를 흘렸지만 레스칼은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 손을 뻗어 라실리아의 뺨을 살짝 어루만졌다.


“그래서 대가가 필요해. 그대가 지금 내게 거짓을 말하고 있다면, 내가 그로 인한 위험을 무릅쓴 대가로 무얼 받을 수 있나?”

이상한 일이었다.

믿지 않는다며 대가를 운운하는 황제의 말이, 이상하게도 그 눈높이처럼 다정함으로 들려왔다.


‘이제껏 내내 거짓말을 해 와서 믿지 않는다며.’

그래도 황제는 제 말을 들어주고 싶다고 했다. 그게 뭐든지, 그 어떤 위험을 감수하면서라도.

그건 절박하게 필요로 한다는 소리가 아니라 눈이 먼 애정처럼 들렸다.


‘이상해. 황제는 황후를 싫어한다면서. 그런데 왜…….’

왜 이렇게 구는 걸까.

왜 이렇게 사람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걸까.


“그렇다면,”

라실리아가 제 뺨을 조심스럽게 건드리는 레스칼의 손에 제 손을 겹쳤다.

지금 이 순간에는 그렇게 해야 할 것만 같았다.


“저 역시 뭐든 대가로 치르겠습니다. 폐하께서 원하시는 거라면, 뭐든지.”

대답이 의외라는 듯, 레스칼이 어깨를 움찔했다. 그러나 약하게 뺨을 어루만지던 손이 곧 얼굴을 힘 있게 감싸 안았다.


“그렇다면 좋아. 공정한 거래가 되겠군.”

그 말에 이베트가 울음을 멈추고 홱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아…… 저, 그럼…… 그럼 저는 죽지 않아도 되는 겁니까?”

레스칼이 라실리아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답했다.


“그렇다.”

“아아……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폐하! 감사합니다, 황후 폐하!”

좀 전까지 억지로 참으려고 애쓰던 울음이, 지금은 오히려 안도를 더해 펑펑 흘러나왔다.

세르벤이 이베트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근심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리얀이 세르벤의 어깨를 한번 툭 친 뒤 앞으로 나섰다.

리얀은 레스칼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쪽이었다. 황후가 진짜라는 게 밝혀졌으니 레스칼은 완전한 접촉이 이루어질 때까지 황후에게 무조건적인 구애를 하는 게 맞았다.

다만 지금 일은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궁인 하나를 감시 못 할 건 아니라지만, 그래도 저 궁인이 어떤 인간인지 하나도 파악하지 않은 상태에서 무턱대고 목숨을 보장할 수는 없었다.


“폐하가 하신 말이니 따르겠지만, 그래도 안전장치는 필요하지 않을까요? 만에 하나 오늘 일이 저 궁인을 통해 외부로 새어나간다면 문제가 생길 겁니다. 가령 뱀대가리라거나.”

처음부터 예외를 두겠다는 상황에는 반대였던 세르벤이 거들고 나섰다.


“맞아! 성 말리크의 기사단이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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