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새들의 왕 (2)
(21/96)
21. 새들의 왕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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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새들의 왕 (2)
2022.11.13.
“새들의 왕?”
“모든 새들의 아버지……? 모든 새들의 아기가 아니라요?”
인간들이 어리둥절해하며 두 마리 새를 번갈아 쳐다보는 사이, 작은 새가 라실리아의 손바닥에서 톡 뛰어내렸다.
슈라이든은 앵무새 중에서도 가장 몸집이 큰 종이었고, 작은 새는 손가락 두 마디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슈라이든 공작에 비하면 작은 새는 새가 아닌 벌레로 보일 정도였다.
작은 새가 바닥으로 내려오자 슈라이든 공작이 눈높이를 낮추기 위해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삐삐. 삐삐이.”
작은 새가 뭐라고 중얼대며 슈라이든의 이마에 제 이마를 댔다.
뭐라고 꼬집어 말하기 어려운, 그러나 몹시 신비로운 느낌이 피부로 와 닿았다.
“세상에…… 동화보다 더 동화 같아요, 황후 폐하.”
이베트가 라실리아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속삭였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지금 눈앞에서 펼쳐지는 일에 정신을 뺏겨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러게.”
잠시 후 작은 새가 이마를 뗐다. 그러더니 라실리아를 향해 자그마한 날개를 퍼덕이며 삐삐 울어 댔다.
다시 들어서 손에 올려 달라는 얘기였다.
슈라이든 공작이 화들짝 고개를 젓더니 몸을 납작 엎드렸다.
“아이고, 제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그 말에 인간들이 놀랐다.
슈라이든이 앵무새고, 그것도 소리를 몹시 잘 따라 하는 종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새였다. 인간의 말을 흉내 내는 느낌이었지 인간처럼 말을 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정말로 말을 했다.
눈을 가리고 있으면 새가 아니라 사람인 줄 알았을 것이다.
“좀 달라진 것 같아.”
라실리아가 말을 하자 슈라이든이 엣헴, 하고 몹시 인간적인 헛기침 소리를 냈다.
“네. 모든 새들의 아버지께서 제게 인간의 말을 할 수 있는 힘을 주셨습니다. 그러니 저는 이제부터 아버지의 입을 대신하는 셈이지요.”
“뭐……? 새에게 그런 힘이 있다고?”
“고작 그것뿐이겠습니까? 지금은 아직 어리셔서 힘을 다 쓰시지 못하고 계시는 겁니다.”
“놀라운 일이네.”
“와……. 그러게요. 진짜 신기해요. 아니, 신비로워요.”
인간들이 감탄을 드러내자 작은 새가 엉덩이를 흔들며 우쭐댔다.
“너 보통 새가 아니었구나.”
“그러게 말이에요. 어쩌죠? 새 취급을 하면 안 될 것 같아요. 막 경어도 쓰고 그래야 할 것 같은데…….”
라실리아가 새를 쓰다듬으려던 손끝을 멈췄다.
왠지 그래서도 안 될 것 같았다.
“그럼 너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 네가 알려 주지 않을래?”
“삐이이.”
작은 새가 어쩐지 수줍은 얼굴로 고개를 떨구었다. 라실리아가 이해를 하지 못하자 슈라이든 공작이 슬쩍 끼어들었다.
“왕께서는 황후 폐하께서 새 이름을 지어 주길 바라시는 것 같습니다.”
“내가? 새들의 왕인데 그래도 되는 건가?”
“그러길 바라고 계십니다.”
“으음…….”
잠시 고민하던 라실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자신이 이 새를 돌보는 건 임시였다. 새들의 왕이라고 하니 사실 돌볼 필요조차 없을 것 같았지만, 그래도 함께 있을 잠깐의 시간이 주어졌다.
진짜 이름을 알 필요는 없을 것이다. 새의 주인은 따로 있었다.
“그럼 피피라고 할게.”
“삣?”
새가 충격을 받았다는 듯 몸을 비틀거렸다.
“왜? 마음에 안 들어?”
“삐이잇!”
이번에도 슈라이든이 나섰다.
“너무 일차원적인 이름이 아닐까요? 지상의 짐승들 중에서 가장 고귀하고 강한 존재임을 상기하심이 어떻겠습니까?”
“아…… 그럼 생각을 좀 해 봐야겠다. 지금 당장은 가장 고귀하고 강한 새에게 어울리는 근사한 이름을 잘 모르겠어.”
“삐잇! 핏! ……삐?”
라실리가 하는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한껏 성질을 부리려던 새가 갑자기 동작을 뚝 멈추었다.
“아…… 이런. 제 영지에 손님이 찾아온 모양입니다.”
슈라이든 공작이 그렇게 말한 순간이었다.
탁탁탁탁!
인간들의 귀에도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오고 있어.”
라실리아가 황급히 작은 새를 슈라이든 공작의 등에 올렸다. 등 쪽에는 깃털이 멋들어지게 솟아 있어서 작은 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피피를 부탁해. 남들 눈에 띄지 않게 해 줘. 피피 너도 조용히 있어.”
“삐!”
“엇, 아버지의 고귀한 모습을 감추라 하시다니. 이런 슬픈 일이…….”
고귀하고 강한 새라고 해도 지금은 손가락 두 마디가 채 안 되는 새끼 새일 뿐이었다.
쾅!
간발의 차이로 슈라이든 공작의 방문이 열렸다. 사실 열렸다기보다는 찢겼다고 해야 맞았다.
방금 부러져 손잡이가 덜컹대는 문을 밀고 들어서는 건 얼굴이 잔뜩 일그러진 황제였다.
* * *
“황, 황, 황제 폐……, 끅!”
이베트는 놀란 나머지 딸꾹질을 시작했다.
황제는 황제였다.
그러나 반쯤은 변이가 일어난 모습이었다. 두 눈이 금빛으로 번뜩이고 왼팔은 전체가 검은 비늘로 덮여 붉은 손톱을 드러냈다. 문이 찢긴 이유가 있었다.
‘아침에 회복이 됐는데…… 그새 또?’
라실리아가 굳은 얼굴로 황제를 쳐다보고 있자 그가 휙 앞으로 다가왔다.
속도가 너무 빨랐다. 어젯밤 그림자 기사들이 뭐가 어떻게 되는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저 멀리 나가떨어지던 장면이 떠올랐다.
“폐하!”
라실리아가 저도 모르게 이베트와 슈라이든 공작의 앞을 막아섰다.
생각을 하고 한 행동이 아니었다. 그냥 몸이 움직였다. 뒤에 있는 이들을 보호하려는 것처럼 라실리아가 황제의 팔을 꾹 붙잡았다.
“또 이지를 잃으셨습니까?”
“……. ……아니.”
다행이었다. 황제는 말을 할 정도로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그럼 왜 갑자기,”
“그대가 사라져서.”
황제가 변이하지 않은 오른손으로 라실리아의 허리를 덥석 끌어안았다.
“찾아야 했다.”
찾아야 했다는 레스칼의 말에는 라실리아가 들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상황이 담겨 있었다.
미친 듯이 서둘러서 씻고, 옷을 갈아입고, 황후궁으로 달려갔더니 황후는 또다시 사라져 있었다. 황후궁을 지키게 한 근위대는 황후가 방을 나서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하얗게 만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변이가 이뤄지는 중이었다.
인간보다 예민한 감각이 황후의 냄새를 쫓았고, 인간보다 빠른 발이 북쪽 탑을 향해 움직였다. 인간보다 날카로운 손톱이 황후를 감추고 있는 문을 찢었다.
이런 변이는 레스칼도 처음이었다.
이제까지는 그저 타고난 고통이자 짐이었던 마족의 피를 스스로 불러냈다.
황후를 찾아야 했으니까.
레스칼이 허리를 감은 팔에 힘을 주자 바스락 옷감이 구겨지는 소리가 번졌다.
“그게……. ……말도 없이 자리를 비워 송구합니다, 폐하.”
라실리아가 착잡해진 표정으로 사과를 했다.
제 잘못이었다. 아직 블루문이 떠 있는 시기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했다.
평소에는 좋아하지도 않는 황후에게 이렇게나 의지를 한다는 건 황제가 그만큼 절실하다는 뜻이었다.
라실리아는 그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는 사실이 미안했고, 그가 또다시 변이의 고통을 겪었다는 사실에 마음이 쓰였다.
“잠깐이라도 눈을 떼면 안 될 것 같아.”
황제가 이렇게 중얼거리며 몸을 더 바짝 붙여 왔다.
어느샌가 왼손이 제 등을 끌어안고 있었다. 작게 중얼대는 황제의 입김이 목덜미에 닿아 왔다. 등을 끌어안은 손이 은근히 살갗 위를 더듬었다.
라실리아의 볼이 살짝 붉어졌다.
‘미안한 건 미안한 건데…… 왠지 좀 이상해지는 것 같아.’
은근슬쩍 황제의 입술이 볼을 스칠 때는 침대에서 나눴던 키스가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볼에 하려던 가벼운 키스가 어떻게 사람을 헝클어 놓는 질 나쁜 키스가 되었는지, 라실리아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 순간 인내가 끝났다.
“폐하. 이제 그만 놓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레스칼이 움찔 굳었다.
“……어째서?”
“몸이 다 회복되신 것 같아서요.”
“아니야.”
“아닐 리가요.”
라실리아가 어깨를 비틀어 황제의 왼팔을 바라보았다.
언제 비늘로 덮여 있었나 싶게 지금은 멀쩡한 인간의 모습이었다.
레스칼이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답했다.
“……몸은 괜찮아졌을지 몰라도 그대가 사라져서 놀란 마음은 여전한데.”
“몸이 돌아왔으니 마음도 곧 안정을 되찾지 않을까요.”
“언젠가는 그럴지도. 아직은 아니야.”
그것 참 마음이 너무 유약한 게 아닐까. 아무리 블루문이라지만.
라실리아가 작게 흘러나오는 한숨을 삼켰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이대로 있어. 내가 마음의 안정을 찾을 때까지.”
“그게 언제쯤이겠습니까?”
“나도 모른다. 내가 아는 건 그대가 또다시 말도 없이 사라져서 굉장히 충격을 받았다는 것뿐이야. 한 번도 아니고, 벌써 두 번씩이나.”
“…….”
“그래. 두 번씩이나.”
두 번씩이나 자리를 비워서 생겨난 죄책감이 그 말에 희석되기 시작했다.
‘이 사람은 정도를 모르네.’
그것도 신전 앞마당의 개 같았다. 여기까지 다가와도 된다고 선을 그어 주면 멋대로 그 선을 못 본 척 해 버렸다.
‘그래서 곤란한 적이 참 많았지.’
대신관도 그랬을 것이다.
쫓아는 내고 싶지만 명색이 신전이라 제 발로 들어온 생명을 내쫓을 수는 없고, 그렇다고 두고 보자니 일일이 눈에 거슬리고 했을 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밥에 독이라도 섞으려고 들지 않았을까.
하여간 그래서 라실리아에게는 개를 다루는 원칙이 하나 있었다.
일단 선을 그었으면 어떻게 해서든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갈수록 다루기가 힘들어졌다.
“그렇다면 벌을 내리세요. 폐하를 놀라게 한 죄로.”
라실리아의 말에 레스칼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벌을 내리라고?”
“네. 제가 말도 없이 자리를 비워 생겨난 일이니 근신이 합당할 것 같습니다. 제 침실에서 근신하겠습니다.”
금안이 느릿하게 한 바퀴 굴렀다.
“벌을 내릴 생각은 없었는데…… 근신이라면 나쁘진 않겠군. 내가 같이,”
“아니요.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저인데 폐하께서 함께 벌을 받으실 이유는 없습니다. 저 혼자 근신하겠습니다.”
라실리아의 원칙은 명확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레스칼은 개가 아니었다.
“벌을 받겠다는 핑계로 나를 떼어놓으려고 하는군.”
“그렇게 들렸습니까? 제게는 폐하께서 제 잘못을 빌미로 약속을 깨려는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대가 오해한 거야. 약속을 깨려는 의도는 없었다.”
“그랬나요? 볼에 입술이 닿았는데.”
“그대는,”
레스칼이 라실리아를 보며 미세하게 입술을 실룩였다.
“역시 나를……,”
그때였다.
“폐하!”
우당탕탕, 평소와는 다르게 거친 발걸음 소리와 함께 그림자 기사들이 탑을 뛰어 올라왔다.
* * *
“아, 하. 결국 찾으셨군요.”
“후우, 다행, 입니다.”
리얀과 세르벤은 둘 다 땀범벅이었다.
세르벤이 소매를 끌어내려 땀을 닦는 사이 숨을 고른 리얀이 레스칼을 훑었다.
“그리고 몸도 회복이 되셨고.”
“아……? 그러게.”
땀을 닦고 난 세르벤이 안도를 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정말로 다행입니다, 폐하. 아까 갑자기 변이를 겪으실 때는 정말이지 섬찟……. ……엇, 그런데?”
세르벤이 말을 자르고 눈가를 찌푸렸다.
“문제가 있었군요. 허락받지 않은 자가 있다니.”
그가 칼끝으로 라실리아의 등 뒤를 가리켰다.
“끅! 그, 그건 저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레스칼이 나타난 뒤부터 숨죽여 딸꾹질을 참고 있던 이베트가 화들짝 놀라 입을 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