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 새들의 왕 (20/96)


20. 새들의 왕
2022.11.09.



 


“그게…….”

비밀을 들켰다. 라실리아는 침착하게 상황을 넘길 방법을 찾았다.


‘괜찮아. 새가 하는 말을 알아듣는 걸 들킨 것뿐이야. 그걸로 내가 황후가 아니라는 생각은 못 할 거야.’

심장에서 태어났다는 말에 너무 놀라 다른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게 문제였다. 더욱 조심해야 했다.


“……그렇다고 하면, 이상한가?”

궁인이 손으로 입을 가렸다. 튀어나오는 탄성을 가리기 위해서였다.


“아, 어쩜. 아니, 아니. 이상하지 않사옵니다, 황후 폐하. 다른 곳도 아니고 엘리아든이니까요. 주술이나 마법, 정령 같은 것들은 이미 옛날 얘기가 된 지 오래라지만 엘리아든에는 아직 가장 강력한 주술이 남아 있지 않습니까.”

가장 강력한 주술이란 마족과 마족의 피에 관한 종속의 주술을 말할 것이다.


“황후 폐하께서는 주술사의 피가 이어지셨으니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요?”

궁인이 반짝반짝 눈을 빛냈다.


‘이게 아닌데…….’

애초에 라실리아는 새와 대화를 한다는 말을 믿을 사람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황후가 평소에도 거짓말을 했다니 이것도 그런 거짓말인 것처럼 넘길 생각이었다.

황후의 성격을 아는 궁인이라면 적당히 맞장구를 쳐 주는 척하면서 넘어갈 것이라 생각했다.


‘진짜 믿고 있는 것 같아.’

이제 와서 다시 아닌 척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네 이름은 뭐지?”

“아, 네. 저는 한 달 전 황후궁에 배속된 궁인이고, 이름은 이베트라고 합니다.”

“그래, 이베트. 그 이름을 기억하겠다. 오늘 일을 비밀로 해 줄 수 있겠나? 황후가 기억을 잃은 것도 모자라 미쳤다는 소리까지 듣고 싶진 않으니.”

“무, 물론이옵니다!”

이베트라는 이름의 궁인이 다시 넙죽 엎드렸다.


“삐잇!”

갓 태어난 새가 라실리아의 손을 콕 쪼았다. 배가 고프다는 말 같았다.


“이런……. 그럼 뭐를 줘야 하지? 새는 뭘 먹어야 하니?”

“삐이…….”

“너도 몰라?”

“삐!”

태어난 지 얼마 안 돼서 모른다고 했다.


“어쩌지. 나도 새는 키워 본 적이 없는데.”

오늘 일을 목격한 게 이베트라는 점은 여러모로 라실리아에게 행운이었다.

황후궁에 들어온 지 고작 한 달이 된 궁인은 황후를 잘 몰랐다.

분위기가 어떤지 눈치로 대강 짐작할 시기긴 했지만 황후가 저지르는 짓들을 매번 두 눈으로 봤던 건 아니었다. 덕분에 황후에 대한 반감도 적었다.

이베트가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새는 곡식이나 야채를 먹습니다, 황후 폐하. 좀 더 크면 벌레도 잡아먹고요. 어릴 때 새를 키워 봐서 잘 알아요. 제가 준비해 올까요?”

“그건,”

“물론 아무도 모르게 하겠습니다. 저, 그러니까 황후 폐하께서 그렇게 하라고 하시면요.”

황후궁에 들어온 지 한 달이 됐다는 궁인은 눈치가 빠르고 싹싹했다. 게다가 새를 키우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삐이…….”

“…….”

라실리아와 작은 새의 눈이 마주쳤다. 작은 새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저 인간은 괜찮다는 뜻이었다.


“그럼 네게 맡기마.”

“네, 황후 폐하! 영광이옵니다!”

이베트가 후다닥 일어나 방을 떠났다.


“삐이이.”

작은 새가 뭐라고 말을 건넸다. 이베트는 무해한 인간이니 곁에 두면 좋을 것이라고 했다.


“그걸 어떻게 아는데?”

라실리아가 눈을 둥글게 뜨고 작은 새를 향해 고개를 갸웃댔다.


“너는 네가 뭘 먹고 사는지도 몰랐잖아.”

“삐!”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라고? 그래도 말이 안 되는 것 같은데.”

“삐삐. 삐!”

“아…….”

작은 새가 말했다.

나는 너를 위해 태어났으며 너를 위해 존재하니 네게 좋은 것과 좋지 않은 것은 본능적으로 구분할 수 있노라고.


“이상해……. 너는 그럼 정말로 그가…… 그러니까 그 마족이 자신의 심장으로 만든 거야?”

“삐이이.”

“그건 몰라? 누가 널 만들었는지는 모르는데, 나를 위해 태어났다는 건 알아?”

“삐삐.”

이제 갓 태어난 새는 모르는 게 더 많았다. 새의 머릿속에 있는 것은 단 하나, 자신이 태어난 이유였다.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누군가의 심장에서 만들어졌다는 것.

마치 그 꿈속에서처럼.


“있잖아.”

“삐?”

“그건 맞을 거야. 네가 누군가를 위해 태어났다는 것.”

“삐!”

새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게 나를 위해서는 아닐 거야. 네가 지금 막 태어나서 아직 그것까진 구분을 못 하는 게 아닐까.”

“삐이?”

이 새는, 황후를 위해 태어난 걸까.

그게 아니라 아직은 누구인지 모를 진짜 반려를 위해 태어났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언제가 됐든 황제는 반드시 한 쌍으로 태어나게 되어 있다는 그 반려를 찾아서 황후궁으로 데려올 것이다. 이 작은 새는 그날을 준비하기 위해 미리 태어난 것일지도 몰랐다.


“네가 지킬 그 사람을 만날 때까지는, 내가 널 돌봐 줄게.”

“삐?”

새는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두 눈을 끔뻑거렸다.


“그러니까 네 존재는 비밀에 부치는 게 좋겠어.”

진짜 황후도, 진짜 반려도 아닌 자신이 반려를 위해 태어난 새를 보살피고 있다는 게 알려지면 오해를 살 수도 있을 것이다.


“삐이이이?”

작은 새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게 무슨 소리냐는 의미였다.


“이틀이면 돼. 이틀만 숨어 있어.”

블루문이 지면 황제도 돌아가지 않을까.

그 전에 두 달간 옆에서 붙어 있겠다는 말이 있긴 했지만, 라실리아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블루문이 되기 전에 마음이 급해져서 내린 결정이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황제가 그렇게나 오랜 기간 제 생활을 팽개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만약 이틀이 지나도 황제가 계속 황후궁에 있겠다고 하면 너는 그냥 평범한 새인 걸로 하자.”

“삐잇!”

작은 새가 작은 가시 같은 솜털을 부풀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직 손가락 두 마디 크기도 안 되는 작은 몸으로 성질을 부리는 게 귀엽기도 하고, 앞날이 걱정스럽기도 했다.


“미안해. 하지만 지금은 그게 최선인 것 같아.”

“삣!”

“약속할게. 네가 지켜야 할 그 사람이 나타나도록, 나도 최선을 다하겠다고.”

“삐이?”

작은 새가 거푸 고개를 갸웃댔다.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고? 나는 네가 뭘 모르겠다는 건지 모르겠는데. 하여간 나도 노력하고 있다는 걸 알아줘. 너무 화내지 말고.”

“삐이이.”

새는 더 말하기에는 배가 너무 고프다며 화장대 한구석에 주저앉았다. 라실리아가 서랍에서 손수건을 꺼내 여러 번 겹친 다음 새를 그 위에 올려 주었다.


“이래도 별로 푹신하진 않겠다. 네가 먹고 잘 곳이 있어야겠는데……. ……아!”

마침 떠올랐다.

이 드넓은 황궁 안에서, 새가 지내기에 딱 적당한 곳이.

* * *



“저, 그런데 황후 폐하, 대체 이런 길을 어찌 알고 계시는지요?”

이베트는 새 먹이를 구해 빠르게 돌아왔다. 다행히도 황제가 오기 전이었다.

라실리아는 이베트와 함께 일전에 황제를 잠재우고 숨어 있었던 탑으로 향했다.

황후궁에서 이어진, 궁인들조차 거의 다니지 않는 복도 안쪽 길을 따라 이동하자 이베트가 거듭 놀랐다.


“기억을 잃으신 게 아니었……, ……아니아니,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니옵고,”

“새가 알려 주었다.”

“네? 새, 새가요?”

“황궁에서 살아서 길을 잘 아는 모양이야.”

이베트는 이 말도 아무런 의심 없이 믿었다.


“와……. 진짜 신기하네요. 이런 건 건국 설화에서만 나오는 얘긴 줄 알았는데……. 황궁은 엘리아든의 시초이다 보니 그 옛날의 신비한 일들이 계속 남아 있는 모양이에요.”

“엘리아든의 설화를 잘 아는가 보군.”

“앗, 네. 황궁에 들어오기 전에는 도서관에서 일했습니다, 황후 폐하. 책 읽는 걸 좋아해서요.”

어쩌다 보니 대화가 이어져 이베트가 적당한 기사 가문 출신이었다는 것과 부친이 젊은 나이에 지병으로 사망한 뒤에는 먹고살 길이 막막해져 학업을 그만두고 일을 구하게 되었다는 것, 도서관에서 일하는 게 몹시 좋았지만 벌이가 시원찮아 높은 급여를 보장하는 황궁으로 오게 되었다는 시시콜콜한 일까지 알게 되었다.


“삐!”

그리고 새가 한 말이 맞았다.

이베트는 무해하고 유익한 사람이었다. 황궁의 사정에는 아직 조금 어두울지 몰라도 그 외에는 아주 해박한 잡지식을 지니고 있었다.


“황후 폐하. 지금도 새가 뭐라고 말한 건가요?”

작은 새가 어깨를 우쭐우쭐 흔들고, 라실리아가 피식 웃으며 자그마한 머리통을 손가락으로 쓰다듬는 것을 본 이베트가 신기해하는 얼굴로 물었다.


“네가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하는군.”

“네? 아니, 정말이요? 새가 그걸 어떻게 알 수 있는 거죠? 진짜 신기하네요.”

그러면서 휘둥그레 벌어지는 눈은 속이 맑은 사람처럼 보이긴 했다.


‘……하지만 플로타도 그랬지.’

자신은 플로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플로타가 제 등을 찌르는 순간에서야 배신을 실감했다.


‘너무 의지해서는 안 돼.’

라실리아가 쓴 표정을 다독였다.


‘새가 그랬잖아. 자신이 지켜야 할 사람한테 좋고 나쁜 것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다고. 그러니까 이베트는 내가 아니라 진짜 반려한테 도움이 될 사람인 거야.’

그럴수록 빨리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뒤를 쫓아왔다.


“이곳이다.”

탁.

라실리아가 북쪽 탑으로 올라가는 문을 열었다.


“헙, 여기는 북쪽 탑 아닌가요?”

숨겨진 통로를 벗어나 탑에 올라서자 이베트는 장소를 알아보았다.


“이곳을 알고 있나?”

“아니요, 아니요. 듣기만 했습니다. 북쪽 탑을 담당하는 궁인이 따로 있다고 했거든요. 듣기로는 일이 까다로워서 새로 들어온 궁인들은 얼씬도 못 한다더라고요.”

“일이 까다롭다……. 그럴 수도 있겠군.”

계단을 전부 올라간 라실리아가 탑 꼭대기에 있는 방의 문을 두드렸다.

똑똑.


“슈라이든 공. 들어가도 될까?”

대답이 또렷하게 들려왔다.


“어서 오세요!”

이베트의 얼굴에 홍조가 어렸다. 기대감인 듯싶었다.


“황궁의 탑에 사시는 공작님이라니. 너무 신기해요. 동화책 속에 들어온 것 같아요.”

라실리아가 작게 웃었다.


“어쩌면. 나도 이곳만 다른 곳 같아. 슈라이든 공도 아주 놀랍고.”

“어쩜 좋아. 그럼 무, 문을 열어도 될까요?”

발그레해진 얼굴로 이베트가 문을 연 뒤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황후 폐하 드십니다.”

라실리아가 먼저 방으로 들어갔다. 이어서 이베트가 들어와 문을 닫았다.

탁.

그와 동시에 양쪽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세상에! 저분이 공작님이세요? 진짜인가요?”

“세상에! 왕, 왕이 오셨다!”

슈라이든 공작이 후드득 라실리아의 앞으로 날아왔다.


“왕! 왕이 오셨다! 새들의 왕! 모든 새들의 아버지!”

이베트는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슈라이든 공작을 바라보다 라실리아에게 목소리를 한껏 낮춰 물었다.


“폐하께서 새들의 왕이신 건가요? 아, 그래서 새들이 하는 말을 알아들으시나 보군요?”

“글쎄……. 지난번에는 저런 말을 하지 않았는데.”

후드득!

라실리아의 발치에 내려앉은 슈라이든 공작이 마치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여 바닥에 이마를 댔다.


“이 몸은 슈라이든 1세! 새들의 왕에게 인사를 올립니다!”

정말 놀라운 일은 그다음에 벌어졌다.


“삐이.”

작은 새가 뭐라고 말을 하자 슈라이든 공작이 고개를 들었다. 한쪽 날개를 가슴 앞에 대는 게 정말로 극진한 예의를 차리는 것 같았다.


“환영합니다. 왕이시여.”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