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꿈과 현실
(19/96)
19. 꿈과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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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꿈과 현실
2022.11.06.
“목욕을 하시려면 시종이 있어야겠군요. 시종장을 불러올까요?”
“됐다. 시중은 필요 없어. 옷은 네가 적당히…… 아니, 그럼 안 되겠군. 페르손을 불러와.”
라실리아가 한 가지 오해하는 게 있었는데, 레스칼은 황궁 내에서 겉차림에 가장 무관심한 인물이었다. 그가 요 며칠 늘 그림 같은 성장 차림을 하게 된 이유는 오로지 라실리아였다.
평소 같으면 리얀이 대충 가져다주는 옷을 대충 입고도 남았을 테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게다가 레스칼은 어젯밤 일로 엄청나게 위축되어 있는 상태였다.
아무 옷이나 입을 수는 없었다.
황후에게 조금이라도 더 괜찮게 보여야 했으니까.
이미 늦은 일 같기는 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알겠습니다.”
리얀이 욕실 문을 열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자연스러운 동작이었지만 레스칼의 눈을 피하지는 못했다.
“왼손을 쓰는군. 오른쪽이 불편한가?”
오른쪽 어깨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세르벤에게는 가볍게 긁힌 정도라고 했던 상처였다.
“하루 정도는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네가 막아설 수 없을 정도였나?”
“그게…… 어제는 평소와 달랐습니다.”
레스칼이 블루문 때 겪는 변이와 그로 인한 고통은 그림자 기사들에게는 익숙한 일이었다.
그러나 어제는 달랐다. 변이가 일어났다고 해서 레스칼이 두툼한 철제 빗장을 세 개나 채운 침실 문을 부수고 뛰쳐나오는 경우는 이제껏 없었다.
고통을 겪지만 백지처럼 이지를 상실하는 경우도 없었다. 레스칼은 방 안에서 홀로 신음할 뿐이었다.
“제가 막아설 수 없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칼을 써 볼 틈도 없이 전하께서 저를 지나치셨습니다.”
칼은 휘두르기도 전에 부러졌다. 아직도 제 오른쪽 어깨가 어떻게 다친 건지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어젯밤 레스칼은, 그저 두렵고 두려웠다.
“그리고 변이도 가장 많이 이루어졌습니다. 등에서 튀어나온 뼈가 거의 완전히 날개의 형태를 갖춘 것처럼 보였으니까요. 제 생각에는, 서른 번째 생신이 얼마 남지 않아서 변이가 가속화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
레스칼이 이를 무는 소리가 들려왔다.
리얀도 그 심정을 이해했다. 자신도 그저 까맣게 절망했을 것이다. 황후가 아니었다면.
황후의 손길이 닿자 순식간에 인간으로 되돌아오던 그 모습을 본 게 아니었다면.
“그러니 폐하, 그냥 황후 폐하와 한 침실을 쓰십시오. 블루문이건 아니건 간에요. 아니, 아예 그냥 한 몸이 됐다 생각하십시오. 황후 폐하를 커다란 장신구라 여기시고 아예 몸에 매달고 다니십시오.”
“……?”
“황후 폐하로 인해 변이가 멈춘 게 두 번째입니다. 한 번은 우연일 수 있다 쳐도 두 번은 그럴 수 없습니다. 황후 폐하께서는 진짜 반려가 맞습니다.”
“……. 나와 같이 있으려고 할까?”
레스칼이 주저하다 물었다.
“황후는 내가 변이한 것을 봤다. 겁을 먹고 도망치는 게 당연해.”
“아, 그게요.”
리얀이 갑자기 씨익 웃었다.
장난을 칠 때의 짓궂은 미소도, 자조를 위한 가짜 웃음도 아니었다. 진심이었다. 리얀은 정말로 기뻐서 웃고 있었다.
“잘생겼다고 하시던데요.”
“……뭐라고? 누가?”
“황후 폐하께서요.”
“누구를?”
“폐하를.”
레스칼이 혼란스럽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어젯밤에 한 말은 아니겠지. 어제는 변이한 걸 봤잖아.”
“변이한 것도 그렇게 이상해 보이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생김새는 같다고요.”
“……?”
혼란이 더 거세졌다. 금안이 지진을 겪는 것처럼 이리저리 흔들렸다.
“……황후가, 미친 건가?”
“운명의 반려라는 건 그 정도는 해야 된다는 말 아닐까요?”
리얀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마족의 피를 종속시켜야 하니까요. 애초에 엘리아든의 시초가 된 그 마족이 평범한 인간을 제 운명으로 묶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래도 황후는…….”
레스칼은 여전히 주저했다. 리얀이 답답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말씀하실 게 아닙니다, 폐하. 변이가 가속화됐으니 그만큼 시간이 없다는 얘깁니다. 이제껏 황후 폐하께서 무슨 이유로 폐하를 거부해 왔는지, 폐하께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 이제 그런 걸 신경 쓸 여유가 없습니다.”
“…….”
“그리고 그냥 제 생각이긴 합니다만, 황후 폐하께서 폐하께 품은 감정이 아주 나쁘지만은 않을 겁니다.”
레스칼의 금안이 가늘어졌다. 날카롭게, 그만큼 예민하게.
“어째서?”
“잘생겼다고 하셨다니까요.”
“그게 감정과 상관이 있나? 나도 처음 봤을 때부터 황후의 겉모습은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저를 믿으십시오, 폐하. 만일 상대가 싫고 무섭기만 하다면 절대 잘생겼다는 말은 나오지 않습니다.”
“…….”
레스칼은 여전히 그 말을 쉽게 믿지 못했다.
리얀은 갈 길이 멀다고 생각하며 그를 욕실 안으로 밀었다.
“저는 그럼 잽싸게 시종장을 불러오겠습니다.”
* * *
“아…… 그런데 블루문은 이제 끝나지 않았나?”
레스칼이 목욕을 하는 동안 라실리아도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는 중이었다.
별 생각 없이 레스칼이 다시 온다는 걸 막지 않았는데, 창밖을 보니 해가 화창했다.
블루문은 끝났다. 다음 블루문은 석 달 뒤였다. 잘하면 델라르타의 신관이 도착해서 그 안에 제국을 떠날 방법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블루문이 끝났으니 이제 황제는 원래의 무심한 성격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래야 했다.
“아니옵니다, 황후 폐하.”
그런데 파샤드 후작 부인을 대신해 옷을 입혀 주던 궁인 하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니라니?”
“블루문은 사흘 간 지지 않습니다. 낮 동안에도 블루문은 계속 떠 있습니다. 해가 환해 잘 보이지 않지만요.”
“아…… 그렇군.”
대륙 남단의 델라르타에는 블루문이 뜨지 않았다. 블루문이 뚜렷하게 보이는 곳은 엘리아든 제국과 그 주변의 몇몇 나라였다.
“사흘. 아직 이틀이 더 남았다는 소리네.”
남은 이틀 동안 어젯밤이 계속 반복되는 걸까.
다치는 사람만 없다면 아주 못 할 짓은 아니었다. 어쨌거나 정신을 잃은 사람은 이쪽을 꼭 끌어안는 것 외에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처음부터 정신을 잃는 건 아니니까……. 변이가 일어날 동안은 또 고통스러워하겠지.
그 과정을 생각하면 마음이 답답해졌다.
내 잘못이 아닌데. 나는 그냥 어쩌다 황후의 몸을 얻게 된 것뿐인데. 그런데 왜 자꾸 내가 잘못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걸까.
라실리아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기분이 들수록 빨리 사라져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래야 황제가 진짜 반려를 찾게 될 것이다.
남은 이틀에 대한 반감은 죄책감이 섞여 혼탁해졌다.
‘그래, 이틀.’
이틀은 더 참을 수 있었다.
피를 흘리면 닦아 주고, 안으면 안겨 주고, 고통스러워하면 지켜봐 줄 수 있었다. 그것조차 하지 못하겠다고 하면 너무 양심 없는 짓이었다.
툭, 툭툭.
투르륵, 툭. 툭툭.
그때 화장대 서랍장에서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 이게 뭐지?”
라실리아는 소리가 들려오는 서랍장을 열었다.
향수가 가득 들어 있는 서랍장 안에는, 붉은 돌 하나가 병 사이를 구르며 툭툭 부딪치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어제 검은 새가 물어다 주었던 그 돌이었다.
꿈에서 본 알과 아주 닮아 있긴 했지만 이건 돌이 맞을 것이다.
꿈은 꿈일 테니까.
“이게 왜 여기에 있지?”
“앗,”
라실리아가 돌을 들어 올리자 치맛단을 매만지던 궁인이 납작 바닥에 엎드렸다.
“제, 제가 넣어 두었습니다, 황후 폐하. 침실을 청소하다 창틀에 고이 올려놓으셨기에 일부러 놔두신 줄 알고 잘 보관한다는 게……. 주, 죽을죄를 졌사옵니다! 제가 그만 폐하의 뜻을 여쭙지도 않고! 부디 용서해 주세요, 황후 폐하.”
“……? 죄를 짓다니. 내 물건을 잘 놓아둔 것인데 어째서 죄가 되나. 일어서. 너는 잘못한 게 없다.”
“아…… 아아? 그, 그게 정말입니까?”
“그래도 돼.”
“아, 아아……. 마, 망극하옵니다, 황후 폐하!”
별것도 아닌 일이었는데 반응이 과했다.
그 짧은 시간에 정말로 벌을 받는다 생각했던지 궁인의 작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평소 황후가 궁인을 다루는 방식 때문일 것이다.
라실리아는 손에 돌을 쥔 채 궁인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앞으로는 이런 일로 일일이……,”
라실리아가 갑자기 말을 끊고 손을 쳐다보았다.
툭툭, 찌익.
분명 돌일 텐데, 그 돌에서 희미한 움직임이 전해졌다.
“……음?”
툭…… 찌익!
그게 다가 아니었다. 한쪽 부분이 깨져서 금이 번지고 있었다.
“이게 지금……,”
“삐이!”
그리고 깨진 부분에서 자그마한 머리통이 불쑥 튀어나왔다.
“허억!”
방금 전까지 몸을 떨던 궁인이 숨을 커다랗게 내쉬었다.
“도, 돌에서 뭔가가……. 아아, 아니! 알! 알이었습니다, 황후 폐하!”
돌이 아니라, 알이었다.
꿈은 꿈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꿈속에서 등장했던 알이 지금 제 손바닥 위에 놓여 있었다.
“삐이!”
아직 눈도 못 뜬 작은 생명체가 울컥 소리를 질렀다.
신기하게도, 라실리아는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 나오고 싶다는 건가?”
“삐!”
“알았어. 잠시만.”
라실리아가 반쯤 깨진 알을 화장대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껍질을 깨 줘야 할 것 같은데…….”
이름을 모르는 궁인은 눈치가 빠르고 손끝이 야무진 인물이었다.
라실리아가 알 속에서 버둥대며 벌써부터 성질을 부리는 자그마한 생명체를 놓고 난처해하자 후다닥 반대편 서랍장을 열어 얇고 가는 유리막대를 꺼냈다.
“이런 것도 괜찮을까요, 황후 폐하? 향수를 섞을 때 쓰는 봉인데, 아직 쓰지 않은 새것입니다.”
“이거면 되겠네. 고마워.”
“화, 황공하옵니다!”
톡톡.
라실리아가 유리막대 끝으로 알의 남은 부분을 살짝살짝 두드려 깨트렸다.
노력은 헛되지 않아 알은 무사히 깨졌다.
“삐이이!”
알에서 나온 작은 생명체는 새였다. 작긴 해도 부리와 날개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아직 깃털 대신 솜털만 송송 난 분홍 살덩이 같았지만, 라실리아는 이 새가 다 자라면 불꽃처럼 강렬한 붉은색을 지니게 되지 않을까 싶었다.
새의 뒤통수에 딱 하나 돋아난 깃털이 아주 예쁜 빨간색이기 때문이었다.
“삐이.”
새는 눈을 뜨자마자 라실리아의 손바닥에 톡 올라왔다. 그리고 작은 머리를 손바닥에 비벼대기 시작했다.
“그래, 반가워. 너는 어디서 왔니?”
“삐.”
“……아?”
“삐이.”
새의 대답은 놀라웠다.
“심장에서…… 왔다고?”
“네? 심장에서요?”
라실리아가 놀라 표정이 굳는 동안, 마찬가지로 궁인 역시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황후 폐하께서는, 지금 새가 하는 말을 알아들으시는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