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맹세
(18/96)
18. 맹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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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맹세
2022.11.02.
“…….”
해가 뜰 때까지 한숨도 자지 못했다.
“…….”
“…….”
그건 그림자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황제는 아직도 정신을 잃은 채였다. 그 와중에 꽉 끌어안은 제 몸을 놓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자신도 함께 침대에 누워야 했다.
황제가 마족으로 변이했으니 그림자 기사들은 그 곁을 떠날 수 없었다.
결국 넷이서 다 같이 한 침실에 들어왔다.
세르벤은 문 옆에 기대섰고, 리얀은 침대가 보이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둘 다 남의 침실에 갑자기 들이닥친 사람들 같지 않게 태연히 자기 자리를 찾는 게 신기했다.
그중에서 가장 이상한 건 황제였다.
자신을 끌어안으며 정신을 잃은 황제는 죽은 것처럼 잠을 잤다.
숨소리도 거의 나지 않았다. 서서히 인간의 모습이 돌아오지 않았다면 황제가 죽은 줄 알았을 것이다.
덕분에 라실리아는 꼼짝도 못 한 채 뜬눈으로 황제를 지켜봐야 했다.
이마를 뚫고 나온 뼛조각은 뿔이었다. 황제가 피투성이였던 이유는 몸의 변이 때문이었다.
뼛조각이 튀어나온 건 등이 훨씬 심했다. 거의 난도질한 수준이었다. 날개가 뿔보다 훨씬 크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너무 처참한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인간의 육신으로 감당하지 못할 고통이라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제 거의 다 돌아오신 것 같네요.”
바닥에 다리를 접고 앉아 턱을 괸 자세로 황제를 뚫어져라 보고 있던 리얀이 불쑥 내뱉었다.
“……그렇군.”
라실리아가 이제껏 내내 눈을 떼지 않고 있던 황제를 새삼스럽게 다시 살폈다.
얼굴은 거의 다 회복이 되어 있었다. 핏자국만 닦아내면 평소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등은 아직도 깊은 상처가 남아 있었지만 살갗을 찢고 솟구치던 뼛조각들은 전부 들어갔다. 그 외에는 상처 부위를 중심으로 검은 비늘이 군데군데 남아 있는 정도였다.
칼을 조각내 붙여 놓은 것 같은 비늘은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투명해지고 얇아지다가 사라지는 식이었다.
“얼굴이라도 닦아 두면 좋겠는데. 물수건을 가져오도록 사람을 불러도 되겠나?”
세르벤이 벽에 기댔던 몸을 뗐다.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아무래도 이 모습을 보이는 건 좋지 않으니.”
아직 변이의 흔적이 남아 있는 레스칼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라실리아가 물었다.
“하지만 블루문에 대한 사실은 비밀이 아니지 않나? 엘리아든의 사람이라면 황실에 마족의 피가 섞였다는 걸 모를 리 없을 텐데.”
“그래도 직접 두 눈으로 보게 되면 동요가 있을 테니까요. ……리얀, 너는 계속 폐하 곁에 있을 거야? 올 때 약이라도 가져다줄까?”
“됐어. 안 아파.”
“놔두면 흉이 질 텐데.”
“그냥 긁힌 거야. 다녀와.”
“뭐, 그렇다면.”
세르벤이 침실을 떠났다.
그사이 황제가 고개를 움직이는 바람에 피에 젖은 머리칼이 라실리아의 가슴 윗부분에 닿았다. 싫다기보다는 간지러워서 라실리아가 황제의 머리칼을 쓸어 정돈했다.
“진짜 신기하네요.”
그 모습을 보던 리얀이 말했다.
“내게 한 말인가?”
“네, 뭐. 어제도 느낀 거지만. 무섭지 않으십니까?”
“폐하가?”
“네. 변이도 그렇고, 어젯밤 갑자기 나타나신 것도 그렇고. ……떼어낼 수 없었다지만 밤새도록 폐하를 잘 참아 내고 계셔서 말입니다.”
리얀의 말대로 두 기사들이 아무리 애를 써도 황제를 떼어낼 수가 없었다. 평소에도 황제의 신체는 평범한 인간들과 달랐다.
변이했을 때는 인간이 아니라 마족에 더 가까운 모양이었다.
“무섭지 않아.”
놀라긴 했다. 달라진 모습도 그랬지만 두 기사들이 쾅쾅 나가떨어지는 것도 그랬다.
그래도 무섭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황제가 코앞으로 다가섰을 때에도, 라실리아는 그가 자신을 해치려 한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정신을 잃었으니 무서워할 이유도 없고. 이렇게 깊이 잠이 들었는데 다른 이들에게 해코지를 하진 않을 테니까.”
“음, 굉장히 예상 못 한 관점이네요. 생김새는? 아무리 봐도 인간이 아닌데 아무렇지도 않습니까?”
“아무렇지 않다는 말은 못 하겠군. 굉장히 고통스럽다는 게 내 눈에도 보여.”
“그런 뜻으로 물은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소름이 끼친다거나 무섭다거나…… 하다못해 너무 못생겨서 싫다거나 그러지 않으시냐고요.”
이 모습은 무서운 건가.
라실리아는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질 만큼 가까운 거리에 있는 황제를 바라보았다.
뼈가 튀어나오고 비늘이 돋아난 모습일 때도 아파 보여서 문제였지 무섭지는 않았다.
어쩌면 그런 꿈을 꾼 탓일지도 모르겠다.
똑같이 비늘이 돋은 얼굴로, 몹시 애틋하고 다정한 시선을 보여 주던 누군가를 미리 본 탓에. 그리고 그 눈이 황제와 똑같은 금안이었던 탓에.
“이 얼굴을 못생겼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은데.”
리얀이 떨떠름한 얼굴로 중얼댔다.
“어……. 그것도 굉장히…… 기대하지 않았던 답변이로군요.”
라실리아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폐하께서는 미형이시지 않나? 내 눈에만 그런 건가?”
“아니, 그게……. 그야 물론 비범한 미모를 지니셨습니다만, 변이가 일어났잖습니까.”
“그래도 생김새는 같아. 살갗이 변하고 뼈가 튀어나왔을 뿐이다.”
“그러니 문제인 게 아닙니까.”
“결국 회복이 되니까. 그리고 비늘이 있어도 그렇게 이상하진 않던데.”
다시 말하지만 꿈에서 나온 그 마족 탓이었다. 미리 그 모습을 보아 둔 덕에 황제가 변이한 모습도 아주 이질적이거나 무섭게 여겨지지 않았다.
그저 안 되어 보일 뿐이었다. 너무 아플 것 같아서.
물끄러미 라실리아를 보던 리얀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는…… 정말로 황후 폐하를 모르겠습니다. 말씀하시는 걸 보면 운명의 반려가 아닐 수도 없는 분 같은데, 어째서 그렇게 폐하를 거부하시는 겁니까?”
“…….”
라실리아도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
왜 황후는 표식을 잃고 있었을까.
“나는 답을 들려 줄 수 없다. 기억하는 게 없으니.”
리얀이 피식, 입술을 비틀어 웃었다.
“아아……. 그 기억상실이라는 거, 진짜 더럽게도 편리하네요.”
거기까지 했을 때 세르벤이 돌아왔다.
“물과 수건을 가져왔습니다, 황후 폐하. ……그새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 * *
세르벤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눈동자를 흔들었다. 방 안의 공기가 좀 전과 다르다는 게 예리한 감각을 지닌 기사에게 느껴진 모양이었다.
라실리아가 입을 열었다.
“딱히. 시그레스 경의 충성심이 인상적이었을 뿐이다. 수건을 줘.”
“어, 그렇게……? 넘어가시는 겁니까? 정말로?”
“넘어간다는 표현을 쓸 만한 일은 없었어.”
세르벤이 힐긋 리얀을 쳐다보자 리얀이 은근슬쩍 시선을 피했다.
세르벤은 팔뚝에 두둑하게 감아 온 수건을 물에 넣고 꼭 짠 뒤 라실리아에게 건넸다.
“여기 있습니다, 황후 폐하.”
“수고했다.”
물수건을 받아 든 라실리아가 자연스럽게 레스칼의 얼굴을 닦기 시작했다.
“엇,”
그러자 세르벤이 갑자기 주춤대는 바람에 하마터면 물그릇을 엎을 뻔했다. 리얀이 옆에서 잽싸게 물그릇을 붙들었다.
“왜 그러지?”
라실리아의 말에 세르벤이 두 눈을 미친 듯이 끔벅댔다.
“그게…… 다, 닦아 주고 계십니다?”
“그러기 위해 물수건을 가져오라고 했는데.”
“황후 폐하께서 얼굴을 닦으신다는 말이 아니었습니까?”
“내 얼굴이 지금 폐하의 얼굴보다 더러운가?”
“물론 평소처럼 겉모습은 더럽게도 아름다우시…… 죄송합니다. 실언했습니다. 일부러 무례하게 굴려던 게 아니라……. 아니, 닦아 주고 계시잖습니까! 폐하를요!”
늘 침착하고 차분하던 세르벤이 흥분해 아무 말이나 내뱉는 걸 보면 정말로 당황한 모양이었다.
“그대들보다 내가 낫지 않을까 싶은데. 폐하께서 지금도 나를 붙들고 계시니.”
팔이 붙들리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어쨌거나 이렇게 꽉 끌어안겨 있는데 남이 황제를 닦는다고 옆에서 얼쩡대면 불편해지는 건 라실리아였다.
세르벤이 멍청하게 입을 벌리거나 말거나, 라실리아는 젖은 수건으로 레스칼의 얼굴을 꼼꼼하게 닦았다.
아무리 봐도 이 얼굴이 무섭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이제껏 라실리아가 봤던 그 어떤 인간보다 미형이었다.
이 얼굴을 처음 보는 게 자신이 죽던 꿈이 아니었다면 처음부터 그렇게 무섭게 여기진 않았을 것이다.
“수건을 바꿨으면 하는데. ……시그레스 경?”
핏자국을 닦다 보니 수건이 금방 더러워졌다. 라실리아가 수건을 바꿔 달라는 의미로 세르벤을 쳐다보는데, 세르벤과 리얀 둘 다 반응이 없었다.
둘 다 정신없이 무언가를 쳐다보는 중이었다.
“경?”
라실리아가 다시 한번 부르자 리얀이 손가락으로 레스칼의 등을 가리켰다.
“보이십니까?”
보일 리가 없었다. 레스칼은 라실리아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어깨에 머리를 기댄 자세였으니까.
“왜 그러나?”
“상처가……,”
“상처가?”
리얀이 믿지 못하겠다는 듯, 두 눈을 커다랗게 뜬 채 말했다.
“사라졌습니다. 전부. 순식간에.”
그때였다.
“……꿈을 꾸는 건가.”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 레스칼이 눈을 떴다.
“폐하……?”
그가 한 손을 뻗어 라실리아의 뺨을 쥐었다.
“그대가 내 침대에 있다니.”
울컥 끓어오르는 것 같은 말을 내뱉은 레스칼이 그대로 입술을 겹쳐 왔다.
* * *
“그게 아니라 폐하께서 제 침대에 계신 겁니다.”
다행히 키스는 시도에 그쳤다.
리얀과 세르벤이 순간 당황해 내뱉은 신음이 레스칼을 뒤돌아보게 만들었고, 라실리아는 그 틈에 이불을 끌어올려 얼굴을 가릴 수 있었다.
레스칼은 변이가 일어나고 난 이후의 일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그가 아는 것은 스스로를 방에 가두고 리얀에게 문을 지키도록 했다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지금 이곳이 황후의 침실이라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대가 내게 와 준 게 아니라고.”
레스칼이 작게 내뱉었다.
라실리아를 향하는 시선은 머뭇대는 것처럼 느렸다. 눈을 뜨자마자 느닷없이 입술을 겹치려던 때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그럼 혹시…… 내가 그대를 강제로…….”
“아닙니다, 폐하!”
그 말에 펄쩍 뛰듯이 답을 한 것은 세르벤이었다.
“두 분께서 비록 한 침대에서 밤을 보내셨지만 저희도 이 방에 머물렀습니다. 우려하시는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아……,”
레스칼이 작게 얼굴을 구겼다. 화를 내는 건지 아니면 그 반대인 건지 알아보기 힘든 표정이었다.
“그렇다면 다행이로군. 다친 곳은 없나?”
이상한 일이었다. 표정은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금안은 정반대였다. 꿈속의 그 마족처럼 다정하고 애틋했다.
너를 지키기 위해서는 아픈 것도 상관없다는 마족처럼, 황제도 그 비슷한 다정함을 품고 있는 것 같다는 착각이 일었다.
……대체 왜 그런 꿈을 꿔서는.
라실리아가 밀려오는 쓴웃음을 감추었다.
“없습니다, 폐하. 어젯밤 일에는 더는 마음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다면.”
그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켜 세웠다.
“내가 계속 여기 있는 건…… 안 되겠지?”
“목욕을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얼굴은 닦아 드렸지만 다른 곳에는 아직 피가 묻어 있는 곳이 많으니까요.”
“그렇군.”
아주 느리게 레스칼이 침대에서 일어섰다.
밤새 두 사람이 꼭 끌어안고 누워 있던 침대는, 한 사람이 일어서자 금방 훈훈하던 온도를 잃었다.
그래서 숨쉬기가 편해졌지만, 또 한편으로는 피부가 조금 서늘해지기도 했다.
“목욕을 하고 나면 다시 와도 되나?”
무의식중에 양팔로 몸을 감싸던 라실리아에게 레스칼이 물었다.
그것도 좀 이상했다. 태연하게 거짓말까지 해 가며 자기 마음대로 할 구실을 만들던 황제가 지금은 과할 정도로 조심스러워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당분간 이곳에서 지내기로 하신 게 아닙니까?”
“그게 맞아.”
물을 때는 느렸지만 답은 빨랐다.
“목욕을 마치고 오겠다.”
“뜻대로 하십시오.”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황제는 안 해도 될 말을 굳이 덧붙인 뒤 리얀을 대동해 침실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