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블루문이 뜰 때 (2)
(17/96)
17. 블루문이 뜰 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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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블루문이 뜰 때 (2)
2022.10.30.
쾅!
“폐하……?”
리얀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푸른 달을 배경으로, 레스칼이 끔찍하게 일그러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 주위에 아무도 없는 걸 보면 일부러 근위대를 물린 모양이었다.
“블루문인데! 황후 폐하와 함께 보내시는 게 아니었습니까?”
리얀은 황제궁에서 근신 중이었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황후가 물에 빠지는 사고가 벌어지는 바람에 처벌을 받아야 했다.
그놈의 새 때문에 순간 눈이 멀어 실수를 했다. 물론 실수라고 하기엔 억울한 감이 없지 않았다.
배에서 뛰어오르려던 그 순간 물고기 떼가 나타나 배를 들이받으리라 짐작할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래도 제 탓이긴 하니 무려 한 달씩이나 내려진 금검령도 얌전히 받아들였다. 레스칼은 그림자 기사들에게는 꽤 관대한 편이라 낮 동안 새 사냥은 계속할 수 있었다. 그건 퍽 다행이었다.
“……화가 났어.”
“네?”
툭, 투둑.
레스칼의 입꼬리에서 피가 흘러 카펫 위로 떨어졌다.
레스칼이 주먹으로 입술을 닦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내가 한 짓 때문에.”
“아, 황후 폐하께서요.”
리얀이 재빨리 달려가 레스칼을 어깨로 떠받치며 제 옷으로 피를 받아냈다.
“……아니, 그렇다고 폐하를 쫓아내신 겁니까? 블루문이 뜬 걸 알면서도요? 대체 황후 폐하께서는 심장이 없는 겁니까? 반려가 아니라 생판 남이라도 이런 짓은 못 할 텐데요!”
레스칼을 침실로 끌고 가면서도 리얀은 화를 멈추지 못했다.
“리얀.”
레스칼이 걸음을 멈췄다.
“네, 폐,”
“황후를 입에 올릴 땐 예의를 갖춰라.”
“어…… 네, 폐하?”
리얀이 얼떨떨한 얼굴을 했다.
블루문이 떴다. 레스칼은 피를 내뱉고 있었다. 몸 안쪽이 전부 뒤틀리기 시작했다는 뜻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황후를 두고 예의 운운할 줄은 몰랐다.
“저는…….”
“컥!”
그때 레스칼이 피를 토했다. 덩어리가 섞여 있는 피였다.
“일단 옮기겠습니다, 폐하.”
리얀이 부리나케 레스칼을 부축해 침대로 옮겼다. 침실에 있는 서랍장을 열어 닥치는 대로 약병을 꺼내온 리얀이 뚜껑을 열어 레스칼의 입에 쏟아 부었다.
아편이 섞인 진통제와 수면제였다.
과연 효과가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부디 조금이라도 고통을 덜어 주길 바랄 뿐이었다.
“묶는 게 좋겠습니까?”
약병을 전부 비운 리얀이 침실을 뛰어다니며 창문을 닫고 빗장을 걸었다.
“……됐어. 어차피 얼마 못 버텨.”
그새 레스칼의 옷은 흥건히 피로 젖어들었다. 그새 또 피를 토했을 것이다.
“그럼 무얼 해 드릴까요? 말씀하십시오, 폐하.”
이럴 때마다 리얀은 자신의 무력함에 화가 났고, 황후가 증오스러웠다.
황후가 진짜일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희망이 생겨난 지금은 더했다. 마족의 피를 다스릴 힘이 있으면서도 황후는 시침을 떼고 이 고통을 방관하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황후를 질질 끌어와서라도 레스칼의 침실에 가두고 싶었다.
“허락하시면 황후 폐하를 모셔오겠습니다.”
“불허한다. 나가.”
“……폐하.”
“나가.”
“…….”
리얀이 입술을 꽉 물었다.
하지만 황명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문을 단단히 잠가라. 내가 뛰쳐나가 황후를 찾아갈 일이 없도록.”
“……뜻대로.”
입술에 잇자국이 난 채, 리얀이 침실을 떠났다.
레스칼이 말한 대로 침실 문에 철로 된 빗장을 세 개나 걸고 사슬까지 칭칭 감고 난 리얀이 그대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빌어먹을.”
리얀이 머리칼을 죄 뽑을 것처럼 양손으로 잡아당겼다. 오늘따라 마계에서 흘러나오는 달빛은 잔인할 정도로 파랬다.
굳게 닫아건 침실 안쪽에서 레스칼이 내뱉는 신음이 들려왔다. 그럴 때마다 제 머리칼을 마구 헝클이던 리얀이 어느 순간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아니, 못 참아.”
리얀이 황후궁을 향해 달려갔다.
* * *
톡톡.
“……응?”
톡톡.
설핏 선잠이 들었던 라실리아는 창문이 울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창밖에 검은 그림자가 기웃대고 있었다.
“아……. 너구나.”
-네, 네. 문 열어 줘, 열어 줘.
“잠시만.”
라실리아가 침대에서 내려서며 신발을 찾았다. 신발을 신다 보니 그걸 벗기던 과정이 떠올라 저절로 어깨가 흠칫했다.
“어쩐 일이야?”
검은 새였다.
-이거, 이거.
검은 새가 창틀에 내려놓은 뭔가를 머리로 툭 밀었다.
“이게 뭐야?”
엉겁결에 집어 들고 보니 붉은색을 띤 돌이었다. 놀라울 정도로 꿈에서 보았던 그 붉은색 알과 비슷했다.
라실리아가 놀라서 물었다.
“이게 뭐야? 설마 정말 알인 건 아니지?”
-잘 간직해, 간직해.
“대답해 줘. 이건 알이야?”
-몰라. 그건 몰라.
“그럼 왜 가져왔어?”
-돌려주는 거야. 원래 여기 있었어.
“응? 그게 무슨 말이야?”
검은 새가 눈을 두르륵 굴리더니 고개를 휙휙 흔들었다.
-몰라. 여기 있었어, 있었어. 그 여자, 훔쳐갔어.
“이게 원래 여기 있었는데, 누가 훔쳐간 거라고? 그 여자가 대체 누군데?”
그 말에 검은 새가 어쩐지 피곤하다는 얼굴로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그 여자. 그 인간. 우리 귀찮게 해.
“귀찮게 한다고?”
-네, 네. 계속 귀찮아, 귀찮아. 그래서 우리 이제 못 와.
“못 오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불러도 못 와. 그 여자, 나빠. 못 와.
거기까지 말했을 때였다.
탕탕.
“황후 폐하. 들어가겠습니다.”
그림자 기사 리얀이 침실 문을 두드렸다.
푸드득!
그와 동시에 검은 새가 잽싸게 날아가 버렸다.
* * *
“리얀. 이걸 눈감아 주기는 무리일 것 같은데.”
리얀이 침실 문을 열기 전, 세르벤이 그 앞을 막아섰다.
침실 문을 연 라실리아가 본 것은 두 그림자 기사가 마주선 채 서로를 응시하고 있는 장면이었다.
둘 다 맨손임에도 칼을 들고 서 있는 것 같은 긴장감이 전해졌다.
“폐하께서 황후 폐하를 지키도록 지시하셨다. 네게도 비슷한 지시를 내리셨을 테지. 황제궁으로 돌아가.”
“나는 황명을 어기겠다는 게 아니야.”
리얀이 세르벤의 어깨 너머로 라실리아를 쳐다보았다.
“황후 폐하께 읍소해 보겠다는 거야. 황후 폐하께서 제 발로 가신다고 하면 폐하께서도 어쩔 수 없는 거잖아?”
“네가 하면 그게 읍소겠냐?”
“그렇다고 내가 황후 폐하를 칼로 위협해서 억지로 데려간다는 것도 아니지. 나는 지금 칼도 없다고.”
“어, 그래. 칼이야 없지. 그렇다고 네가 갑자기 다른 인간이 되는 건 아니잖아.”
“일단 좀 비켜 줄래? 읍소는 해 보게.”
“미안한데, 그 말은 못 믿겠다. 폐하께서도 안 믿으실 걸.”
스릉!
세르벤이 칼을 뽑아 들었다.
“황후 폐하, 들어가 계십시오. 리얀은 제가 돌려보내겠습니다.”
리얀이 피식 웃었다.
“그냥 계시는 게 나을 겁니다. 저는 지금 좀 눈에 뵈는 게 없는 상태고, 그럴 때 세르벤은 제 상대가 못 되는 터라. 괜히 문짝만 망가질 겁니다.”
세르벤이 혀를 찼다.
“과장한 겁니다. 근위대가 올 때까지는 버틸 수 있습니다.”
“허세예요, 황후 폐하. 그 말 믿다가 뒤통수 맞습니다.”
쌍둥이 기사들이 지금 싸우겠다는 건지, 아니면 친한 사이를 과시하는 중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라실리아는 자신을 두고 칼싸움이 벌어지는 것을 두고 보는 성격은 아니었다.
“일단 칼을 넣는 게 좋겠군. 무슨 일인지는 듣겠다.”
그 말에 리얀이 울컥 화를 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는 겁니까, 지금? 블루문이 떴잖습니까!”
“그래서. 내게 바라는 게 뭔가.”
“하, 지금도 기억상실이라는 변명을 들이댈 참입니까? 블루문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다 까먹으셨다고요? 그래서 하나도 모르겠다고요?”
알고 있었다.
그림자 기사가 갑자기 눈이 뒤집혀 달려온 이유도 알 것 같았다.
그래서 문제였다.
알지만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는 게.
“그대는 내가 기억을 잃기 전에도 이렇게 굴었나?”
라실리아는 애써 침착함을 가장했다.
황제가 겪고 있다는 고통은 유감이었다. 하지만 황후가 표식을 잃었다면 애초에 황후조차 진짜 반려가 아니었을 것이다.
아무리 안타까워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죽을 것처럼 황제를 사랑했다던 황후가 그랬듯이.
“사 년간 블루문이 뜰 때마다 내 침실 문을 두드려 나를 끌어냈나?”
“그때는 사정이 다르지 않았습니까.”
“뭐가 달랐는데.”
“그때는 폐하께서도 원치 않으셨……. 젠장, 그냥 한 번이라도 황후의 책무를 다할 수는 없는 겁니까? 황후랍시고 온갖 짓을 다 하고 살았으면서, 오늘 하루만이라도 황후답게 굴 수는 없는 겁니까?”
“나는,”
기억이 돌아오면 그렇게 할 것이다.
폐하와 내가 그렇게 하기로 했으니 네가 끼어들 일이 아니다.
그렇게 말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훨씬 양심이 괴로웠다.
“그런 게,”
그때였다.
쾅!
뭔가가 부서지는, 끔찍하게 커다란 소리가 울렸다.
* * *
“거기 누구냐!”
세르벤이 복도 쪽을 향해 소리를 쳤다.
휙!
바람이 불었다. 동시에 복도를 환하게 밝혀 놓은 등불과 촛불이 전부 꺼졌다.
눈에 보이는 건 새파란 달빛이 비추는 게 전부였다. 이계에서 솟아오른다는 이질적인 달은 시야를 전부 비틀어 놓는 것 같았다.
“누구냐고 묻잖아!”
앞으로 뛰쳐나가려는 세르벤을 리얀이 붙잡았다.
“칼 내놔. 너는 황후 폐하를 지켜.”
세르벤이 군말 없이 칼을 넘겼다. 칼을 세운 리얀이 비틀린 어둠 속으로 뛰어들었다.
“움직이지 마십시오.”
등으로 라실리아를 가린 세르벤이 작게 내뱉었다.
“침입자인가?”
델라르타 같은 작은 왕국에서도 종종 겪었던 일이었다. 제국은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큰 소리를 내는 침입자는 드물긴 했다.
“지금으로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왠지,”
잠시 말을 끊은 세르벤이 턱선을 비틀었다.
“인간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인간이 아니라니.”
“황제 폐하와 리얀이 있는데 저렇게 큰 소리를 내면서 쳐들어올 간 큰 인간은 없어서요.”
“그럼……,”
다음 순간, 침입자의 정체가 드러났다.
퍽!
“으윽!”
어둠 속으로 뛰어들던 리얀이 세르벤의 발치까지 튕겨져 날아왔다.
“리얀? 리얀!”
세르벤은 보고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리얀은 피로 물든 오른팔로 부러진 칼을 쥐고 있었다.
“정신 차려, 리얀!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세르벤이 리얀을 잡아 일으켰다.
그사이 어둠 속에서 침입자가 걸어 나왔다.
세르벤의 말대로 인간이 아니었다.
갈기갈기 찢긴 옷 사이로 드러나는 양손이 검은 비늘로 뒤덮여 있었다. 붉은 손톱은 칼날처럼 뾰족했다. 그 손톱 끝에서 피가 툭툭 흘렀다.
반은 허물어진 것 같은 얼굴은 피투성이였다. 피부를 뚫고 솟구쳐 나온 뼛조각이 보였다.
“제길! 황후 폐하! 피하십시오!”
세르벤이 리얀을 놓고 부러진 칼을 움켜쥔 채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러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퍽!
칼이 있거나 말거나, 침입자는 세르벤을 그대로 지나쳤다. 아니, 너무 순간적이라 지나치는 것으로 보였을 뿐 세르벤의 몸이 맞은편 벽에 처박혔다.
다음 순간 인간이 아닌 침입자가 제 눈앞에 있었다.
“……!”
비명이 나오지 않은 것은 그 눈 때문이었다.
“폐하……?”
아무리 모습이 변했어도 저 금안을 몰라볼 수는 없었다.
“아…….”
……툭.
대답처럼, 모습이 변한 황제가 고개를 기울였다. 이마가 이마에 닿는다 싶자 양손이 힘껏 제 몸을 감싸 안았다.
황제가 그대로 라실리아에게 기댔다.
“읏, 무겁,”
……쿵!
한 몸처럼 안고 안긴 두 사람이 동시에 바닥으로 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