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블루문이 뜰 때 (1)
(16/96)
16. 블루문이 뜰 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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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블루문이 뜰 때 (1)
2022.10.26.
핑계였군.
라실리아가 소파에서 벌떡 일어섰다.
충격은 무슨. 너무 멀쩡해 보이는데.
매번 말하기도 입 아팠지만 오늘도 황제는 현란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빈틈없이 번듯한 성장을 갖추고 돌아왔다. 이쯤 되면 황제란 날마다 옷을 차려입기 위해 사는 존재가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그럴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어째서?”
라실리아가 일어나자 황제도 따라 일어섰다.
“제가 물에 빠진 건 벌써 몇 시간 전의 일이고, 충격을 받았더라도 다 해소됐을 테니까요.”
“아닌데.”
“그리고 충격을 받았으면 물에 빠진 당사자가 더 많이 받지 않았을까요? 제 심정도 배려해 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아……. 그랬겠군.”
그런 말을 할 정도로 몸 상태가 나쁘진 않았지만 귀찮게 들러붙는 황제를 떼어놓기 위해서는 아픈 척을 할 마음도 있었다.
“내 배려가 부족했다. 물에 빠진 건 그대였는데.”
“네, 그러니……,”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되었다.
“그대는 쉬어야 해.”
황제가 예고도 없이 제 몸을 번쩍 안아 들었다.
“폐하! ……놓아주세요. 이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놓을 것이다. 그대를 침대 위에 눕히고 나면.”
“아니, 그럴 필요가……,”
“나는 한동안 제대로 서 있지 못했어. 그대는 더 하겠지. 물에 빠진 당사자니까.”
“…….”
라실리아가 입을 다문 건 제대로 서 있지도 못했다는 말이 꼭 진실처럼 들려서였다.
침실 문을 어깨로 밀어서 연 황제가 침대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결국 침대 위에 누울 때까지 라실리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편히 있도록. 괜찮아질 때까지.”
사실 지금도 괜찮은데.
황제 앞에서는 말 한마디도 조심해야 한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이 사람은 예측이 안 돼. 어디로 튈지 모르겠어.
그래서 황제를 상대할 때에는 늘 긴장을 하게 되는 모양이었다.
“……그러겠습니다.”
이대로 누워 있어야 할 모양이었다. 어차피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가는 늦은 시간이었다.
어쩌면 일찍 잠이 드는 편이 나을 것이다.
오늘은 블루문이 뜬다고 했으니까.
라실리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레스칼이 이불을 들어 올렸다. 자리를 잡으면 덮어 주겠다는 뜻 같았다.
“잠시만요. 신발을 벗고요.”
“아……. 신발을 잊었군.”
선뜻 이불을 내려놓은 레스칼은 라실리아가 움직이기 전, 빠르게 발을 잡았다.
“폐하.”
그간 그가 하는 이상한 짓에는 익숙해졌다고 하지만 이번은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가만히 있어. 신발을 벗겨 주려는 것뿐이니.”
“제가 하면 됩니다.”
“내가 하면 안 되나?”
안 되지 않을까.
“황제가 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가…….”
잠시 생각하던 레스칼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런 건 없는 것 같아. 그대에게는.”
레스칼은 당황해 엉거주춤 뻗어 오는 라실리아의 손을 빤히 보며 발을 쥔 채 고개를 숙였다.
“발등이 이렇게 생겼었나.”
느리게 구두를 벗기고 나서도 황제는 계속 발을 쥐고 있었다.
왠지 또 뭔가 어이없는 짓을 할 것 같아 라실리아가 그의 손목을 잡았다.
“이제 그만 놔주세요.”
“왜?”
“불편합니다.”
“…….”
금안이 느리게 한 바퀴 굴렀다.
그래도 라실리아는 그가 언제나처럼 그렇다면, 이라고 말한 뒤 제 말을 따라 줄 줄 알았다.
“……나는 늘 그대의 발등에 키스했는데.”
“무슨,”
그런데 이런 헛소리를 해 댔다.
“우리는 사이가 아주 좋았으니까.”
“…….”
라실리아가 이를 꾹 물고 치솟는 화를 참았다.
‘날 바보 취급 하는 건가. ……하아. 그래도 참아야지.’
오늘만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다. 블루문이 떴다 지면.
“지금은 제가 기억을 못 하니까요. 유감입니다.”
라실리아가 이제 그만하라는 듯 레스칼의 손을 밀어냈다. 그러나 레스칼이 라실리아의 손을 붙잡는 게 빨랐다.
“그대가 불편하다면 발등에 키스하는 건 참겠다.”
뭐 대단한 양보를 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그냥 안 하면 되는 일일 텐데.
“대신 다른 데 하게 해 줘.”
“……제가 분명히, 불편하다고 말씀을 드렸는데요.”
“그래서 발등은 참겠다고 했다.”
“…….”
“내가 신발도 벗겨 줬잖아.”
“…….”
애초에 내가 벗는다는 걸 억지로 뺏어 가서 벗긴 사람이 누군데.
“이런 불편함이 계속되면 제가 끝내 폐하를 저어하게 될까 걱정이 됩니다.”
그러자 황제가 입술을 실룩였다.
“그렇다고 매번 나를 피하면 그대의 기억이 돌아올 리도 없지. 내가 스물네 시간 그대의 곁에 있기로 한 건 기억이 돌아오도록 돕기 위해서라는 걸 잊었나?”
레스칼이 움켜쥔 손에 은근히 힘을 주었다. 간절히 쓰다듬는 것처럼.
“맹세했다. 하루라도 빨리 기억을 되찾기로. 하지만 그대는 기억을 되찾기 위한 노력을 전혀 하지 않는 것 같아.”
후우.
라실리아가 짧게 숨을 내쉬었다.
그때도 느꼈지만 황제는 신전 앞마당의 개를 연상시키는 구석이 있었다. 한 번 쓰다듬기 시작하면 남의 사정도 모르고 팔이 아플 때까지 졸라 댔다.
……그래. 블루문이니까. 오늘만이야.
“차라리 제가 하겠습니다.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비교적 당혹감이 적은 부위를 고르던 라실리아가 이렇게 말했다.
어차피 그런 부위는 없을 것이다. 이제껏 황제의 입술이 닿았던 곳은 곤혹스러울 정도로 잠열이 남아 내내 기분을 수상쩍게 만들었다. 그럴 바에는 그냥 자신이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순간 금안이 번쩍였다.
“그대가 해 주겠다고? 키스를?”
“네.”
눈 깜짝할 사이에 얼굴이 불쑥 코앞으로 다가왔다.
“좋아. 해 줘.”
가뜩이나 휘황찬란한 금안이 오늘따라 더 부담스러웠다.
“……크흠, 어디가 좋겠습니까?”
라실리아가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려 헛기침을 했다. 황제는 눈도 깜박이지 않고 이쪽을 쳐다보았다.
“그대가 좋다면 어디라도 괜찮아.”
“그럼…… 일단 눈을 감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뜻대로.”
황제가 눈을 감았다.
라실리아는 최대한 무난한 느낌이 들 만한 곳을 찾으려 애썼다.
‘왠지 실수한 것 같아.’
그러다 보니 의도치 않게 황제의 얼굴을 구석구석 살피는 시간이 되어 버렸다.
‘이마는 무난할 것 같았는데.’
이렇게 보니 전혀 그렇지 않았다.
반듯한 이마는 무슨 조각상 같았다. 이마에서 이어지는 눈썹 뼈와 콧대가, 대칭을 이루는 광대뼈가, 좁은 콧방울과 그 밑의 선명한 입술선이 전부 다 곤혹스러웠다.
‘눈을 감아서 그런가.’
인간이라고 하기엔 너무 현란한 금안이 보이지 않아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눈을 감은 황제는 더 이상 이질적인 존재로 보이지 않았다.
비현실적으로 잘생긴 남자일 뿐이었다.
“너무 오래 걸리는 것 같은데.”
황제가 눈을 감은 채 낮게 중얼거렸다.
“그새 마음이 바뀐 건가?”
“고르는 중입니다.”
“그럼 그냥 입술에 하도록.”
이제 와서 무슨 소리야.
“볼에 하겠습니다.”
“오른쪽, 왼쪽?”
그것까지 말해 줘야 하나…….
“오른쪽.”
“좋아.”
말을 해 놓고 보니 괜히 더 긴장이 되었다.
라실리아는 마른침을 삼키며 황제의 오른쪽 뺨을 바라보았다.
‘하아. 모르겠다. 빨리 해치우면 되겠지.’
그렇게 결심하고 입술을 댔다.
그리고 그 순간, 황제가 고개를 홱 돌렸다.
“……?”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황제가 고개를 돌린 순간 뺨이 아니라 입술이 닿았고, 그렇게 의도치 않았던 키스가 시작되었다.
‘이게…… 뭐야?’
입술이 입술에 닿는 순간,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던 감각이 전해졌다. 말캉하게 젖은 살갗이나 뒤섞이는 숨결은 라실리아가 이제껏 겪었던 모든 감촉을 뛰어넘는 무엇이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황제에게 꽉 끌어안긴 자세로 함께 침대에 누워 있었다.
“……읏!”
퍽!
라실리아가 황제를 밀어냈다.
“아…….”
의외로 황제는 쉽게 떠밀렸다. 평소 꿈쩍도 하지 않을 때와는 달랐다.
“아니, 그게…….”
황제가 눈을 깜박댔다. 어딘지 모르게 정신이 없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이건 너무 비겁한 짓입니다.”
라실리아가 씨근덕거리는 숨을 내리누르며 말했다.
“그게……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면요? 누가 강제로 고개를 돌렸단 말입니까?”
“그냥……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됐어.”
“말도 안 되는 변명 같군요. 그만 나가 주십시오.”
“변명이긴 하지만 사실이기도 하다. 정말이야.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묘하게 허둥대는 듯한 저 표정이 더 화가 났다.
“나가세요.”
“그……. ……화났나?”
“화가 나지 않으면 그게 이상한 겁니다. 다시 말하는데, 나가세요.”
말하는 자신이 깜짝 놀랄 정도로 목소리가 차가웠다.
어깨를 축 늘어트린 황제가 미적미적 침대에서 일어섰다.
“잘못했다……. 진심이야.”
“네, 잘못하셨습니다.”
“어떻게 해야 화를 풀 수 있는지 알려 줄 수는 없나?”
“화가 나게 만든 사람이 화가 난 사람에게 할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스스로 알아내십시오. 그리고 계속 여기 계신다면 화가 더 날 것 같습니다.”
“알겠다.”
미적대던 동작이 조금 빨라졌다.
“나갈 테니 화내지 마.”
“화는 이미 났습니다.”
“그게……. ……정말로 잘못했다.”
축 늘어진 어깨가 더 아래로 처졌다. 황제가 힘없이 등을 돌려 침실을 떠났다.
“하아.”
황제가 사라지고 나서야 숨을 쉰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 전까지는 어떻게 숨을 쉬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미쳤어. 이런 짓까지 하다니.”
라실리아가 손등으로 입술을 벅벅 문질렀다.
“이런 짓에…… 이런 기분이 들 줄이야.”
그게 문제였다.
처음에는 뭐가 잘못됐는지도 몰랐다는 게. 저절로 그렇게 됐다는 황제의 말처럼 자신에게도 그저 자연스러웠다는 게.
“미쳤나 봐.”
키스를 하기 직전, 자신은 황제가 너무 잘생겼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것부터가 말이 되지 않았다. 정체를 들키면 황제는 자신을 죽일 것이다. 그 광경을 다 봤으면서도 황제가 잘생겼다는 속 편한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는 게 도무지 믿기질 않았다.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 내가 당신의 운명이에요.
꿈에서 그렇게 소리를 쳤다. 찬란한 두 눈에 한 올의 감정도 내비치지 않는 남자에게.
그게 정말로 자신의 미래가 될까 봐 라실리아는 두려웠다.
“두 달도 너무 길어.”
델라르타의 사정을 알게 될 때까지 버틸 생각이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황제의 곁을 벗어나는 게 더 급한 일이 되었다.
“방법을 찾아야 해. 이대로는 안 돼.”
다짐을 하듯, 혼자서 고개를 끄덕이던 라실리아의 어깨 위로 푸른 달빛이 드리워졌다.
창문을 향해 고개를 돌린 라실리아의 눈이 커다래졌다.
“저게…… 블루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