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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비밀의 대가 (15/96)


15. 비밀의 대가
2022.10.23.


……툭.

흠뻑 젖은 겉옷이 발치로 떨어졌다. 한결 몸이 가벼워진 라실리아가 고개를 돌려 파샤드 후작 부인을 마주했다.


“그게 무슨 뜻이지? 약조라니.”

후작 부인이 긴장한 듯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제게 약조를 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아이예프 백작의 상속권을, 백작의 딸이 아닌 제 둘째 아들에게 주시기로요.”

아이예프 백작가에는 아들이 없는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대가 내 옷 시중을 드는 대신 나는 그대에게 다른 가문의 상속권을 빼앗아 주기로 했다는 건가? 내가 지금 이해한 게 맞나?”

“보통 옷 시중이 아니지 않습니까, 황후 폐하? 그간 입단속을 하느라 제가 얼마나……!”

라실리아가 후작 부인의 말을 잘랐다.


“그간 뭘 어떻게 했다는 말인지 모르겠군. 그대도 알다시피, 나는 이전 일을 조금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 그런……. 제, 제게까지 그러지 않으셔도 될 일이옵니다, 황후 폐하.”

후작 부인도 기억상실이 가짜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그대에게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니? 기억상실이 사람에 따라 선택적일 수 있는 건 아닐 텐데.”

“…….”

후작 부인이 입매를 일그러트리다 양손을 꽉 마주잡았다.


“제게…… 이러실 수는 없습니다, 황후 폐하. 제가 무얼 지켜 드리고 있는지 아신다면 제게 이러실 수는……,”

“글쎄. 그것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그대가 나를 위해 무엇을 지켜 주고 있다는 말인가.”

“아시잖습니까. 표식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

역시나 짐작한 게 맞았다. 후작 부인은 황후의 비밀을 칼처럼 쥐고 강도질을 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 칼을 먼저 쥐어 준 게 황후일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칼을 쥔 이상 후작 부인은 자신이 원할 때에 칼을 휘둘러 볼 수 있었으니까.


“표식이라니?”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쪽이 얌전히 칼을 맞아야 한다는 말은 아니었다.


“……네?”

“표식이 뭔데?”

파샤드 후작 부인이 믿지 못하겠다는 듯,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표식도 모르는 척하실 겁니까.”

“나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 그러니 말하도록. 표식이 어떻게 되고 있으며, 그게 무얼 의미하는지. 그리고 내가 아이예프 백작의 상속권을 빼앗아 주지 않으면 그대가 그 사실로 무얼 할 건지.”

“그…… 그렇다면 아, 알려져도 상관이 없다는 말씀이십니까?”

“말했듯이, 나는 그게 뭔지 모른다. 이제껏 그대가 나를 위해 감춰 주었다니 알려져서는 안 될 일인가 보군.”

“무, 물론입니다! 만일 그걸 황제 폐하께서 아시게 된다면……!”

“그렇다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데?”

“네? 그, 그야 마땅히 피엘리온 가문이……,”

“파샤드 가문은? 이제껏 함께 비밀을 감춰 왔는데 파샤드 가문은 상관이 없나?”

“그……게……?”

파샤드 후작 부인이 모르는 게 하나 있었다.

예언자만큼 협박이 소용없는 인간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협박의 전제가 폭로라면, 그것은 예언자에게 아무런 위협도 되지 못했다. 예언자의 본분이야말로 폭로였다.


“피엘리온 가문이 화를 입는데 파샤드 가문은 혼자 무탈하리라는 보장이 있으면 폐하께 말을 올리도록. 나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입장이라 더는 할 말이 없군.”

“아…….”

후작 부인이 이상한 신음을 내며 입술을 꾹 물었다.

이제껏 후작 부인은 충성을 가장한 협박으로 황후에게서 이것저것 얻어냈을 것이다. 황후가 기억상실을 핑계로 더는 대가를 주지 않겠다고 했을 때, 후작 부인이 비밀을 폭로한다면 남은 것은 함께 죽는 일뿐이었다. 라실리아는 결코 혼자서는 죽지 않겠다는 뜻을 드러냈다.

그것으로 협박하는 사람과 협박당하는 자의 입장이 바뀌었다.


“할 말이 그게 전부였다면 옷을 마저 벗겨 주었으면 하는데. 그만 씻고 싶다.”

“……. ……네, 황후 폐하.”

혼자 눈밭에서 구르다 온 사람처럼 창백해진 얼굴로 후작 부인이 속드레스를 마저 벗기기 시작했다.

툭, 투둑…….

떨리는 손끝이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조금 더 빨리.”

라실리아가 후작 부인을 채근했다.


“아, 앗! ……네, 네. 황후 폐하…….”

어쩐 일인지 후작 부인은 한층 더 허둥대기 시작했다.


“너무 겁먹을 것 없어. 그대는 이제껏처럼 그대가 맡은 일을 하면 된다. 그럼 나 역시 그대를 이전과 같이 대할 것이다. 손이 너무 떨린다면 조금 기다렸다 하도록.”

“그…… 아, 알겠나이다.”

한참 부들부들 떨리던 손이 동작을 잠시 멈추었다. 그러더니 안정을 찾은 것처럼 제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라실리아는 몰랐다.

후작 부인의 손을 떨게 만든 이유가 따로 있었다는 것을.

속드레스의 단추를 전부 풀자 드러나는 엉덩이골 바로 윗부분에 반도 넘게 지워져 갔던 표식이 선명하게 되살아났다는 사실을.


* * *


“입으십시오, 폐하.”

레스칼은 오 분 만에 목욕을 마쳤다. 뜨끈하게 데워진 물에 비누칠을 한 몸을 한 번 담갔다 나온 수준이었다.

오늘은 세르벤이 물기를 닦아 주는 일도 말리지 않았다.

다른 인간과의 접촉을 싫어하는 레스칼은 어지간한 일은 혼자서 하는 편이었다.

하여간 물기를 다 닦아낸 세르벤이 레스칼의 몸에 새 옷을 입혔다.

군말 없이 셔츠에 팔을 밀어 넣고 단추를 채우며 레스칼이 물었다.


“리얀은?”

“새 사냥을 구상 중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새 사냥은 허락하겠다. 검은 빼앗아.”

“……네?”

뜻밖의 말이라 세르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황후가 물에 빠진 책임은 져야지. 한 달이다.”

“하, 한 달씩이나요?”

한 달 동안 검을 들고 다니지 못하게 한다면 리얀은 욕구불만으로 미쳐 가는 한 마리 야수로 돌변할 게 뻔했다.


“조금만 줄여 주실 수는 없습니까, 폐하?”

세르벤이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대답은 칼 같았다.


“안 돼.”

“……엄청나게 고통받으며 반성하겠군요. 알겠습니다.”

리얀이 고통받는 한 달 동안 자신이 애먼 화풀이 대상이 될 게 눈에 선했다.

세르벤이 벌써 괴로워지려는 마음을 애써 다독이며 옷을 마저 입히던 중이었다.

탓!


“폐하?”

“…….”

레스칼이 갑자기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신발을 신을 때 쓰는 발판 덕에 호되게 엉덩방아를 찧진 않았지만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다.


“왜 그러십니까? 혹시 어디 다치신 겁니까?”

세르벤이 후다닥 다가와 레스칼의 발목을 붙들었다.


“아니. 다치진 않았는데…….”

다친 곳은 없었다. 좀 전까지만 해도 레스칼은 아무 문제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나 예민한 감각이 부상을 눈치채지 못할 일도 없었다.

그러나 둘 다 할 말을 잃은 건 레스칼의 손이 떨리는 게 보이는 탓이었다.


“왜 이러지?”

레스칼이 힘을 주어도 떨림이 멈추지 않는 손을 보며 물었다.


“그게……. 으음…… 그, 황후 폐하께서 물에 빠지시는 걸 보셨을 때 얻은 충격이 이제야 느껴지는 게 아닐까요.”

팔다리가 잘리는 수준의 극심한 부상을 입었을 때 뒤늦게 충격이 오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칼과 더불어 사는 기사들에게는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었다.


“충격……. 그런가.”

“네. 많이 놀라셨을 겁니다.”

그 말에 레스칼이 수로에서 있었던 일을 잠시 떠올렸다.

귓가에 풍덩, 하고 황후가 물에 빠지는 소리가 되풀이되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속이 메스꺼워졌다.


“앞으로 황후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안 되겠군.”

레스칼이 떨리는 손으로 주먹을 쥐며 낮게 내뱉었다.


“내가 내 몸을 통제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르니.”

“어, 그…… 그 정도라면, 네. 안 될 것 같습니다.”

레스칼이 휙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앞으로 네가 황후의 호위를 맡아.”

“네?”

세르벤이 놀란 표정으로 자신을 손가락질했다.


“저 말씀입니까?”

“리얀은 한 달 동안 검을 못 쓰니까.”

“아니, 저는…… 저는 그림자 기사입니다, 폐하!”

기사 서임장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부터 폐하의 친위대를 맡아 왔다는 걸 잘 알고 계시지 않느냐는 뜻이었다.


“그러니까.”

“아니, 폐하……. 황제와 황후는 다르고, 그러니까 호위도 다르고 그런데……,”

“같다. 오늘부터는.”

세르벤은 울상을 짓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아닙니다. 다릅니다. 황후 폐하께서는 폐하의 반려시고 황실의 일원이시지만 제국의 피를 잇지 않으셨습니다.”

“같아.”

레스칼은 단호했다. 그 외에는 어떤 것도 답이 될 수 없다는 식이었다.


“황후가 물에 빠졌을 때, 심장이 깨지는 것 같았다. 황후가 죽으면 나도 죽겠지. 그러니 같아.”

“아, 아니 그게…… 이렇게 갑자기…….”

“지켜. 아무 일 없게.”

“그…… 그렇다면, 뜻대로.”

세르벤은 황제의 기세에 눌려 그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레스칼이 이미 황후와 스물네 시간 붙어 있기로 결정한 지금 시점에 호위를 지정하는 게 의미가 있나 싶긴 했지만, 그보다 더 앞서 생각해야 할 일이 있었다.

황후가, 아무래도 진짜 반려인 게 맞겠다는 생각이었다.


‘리얀이 별로 안 좋아할 것 같은데.’

세르벤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물론 나도 별로고. 황후 폐하의 인성이라면…….’

그 인성이라면 황제가 진심이 됐다는 걸 알았을 때 얼마나 더 끔찍하게 굴지 눈에 훤했다.

지금도 황후는 제멋대로 궁을 휘저으며 살았다. 사치는 별일도 아니었다. 미혼 시절의 연인을 거리낌 없이 황궁으로 불러들였고, 신분이 없는 궁인 따위는 몇이든 죽여 없앴으며, 마음에 안 드는 귀족들을 매장시키는 일도 아주 흔했다.

황제가 황후에게 일말의 애정도 보이지 않았을 때에도 그러고 살았다. 이제 황제가 제 목숨처럼 자신을 아끼게 됐다는 걸 알게 된다면…….


‘안 봐도 뻔해.’

끔찍하다는 말도 부족했다.

세르벤이 이를 지그시 물고 마음을 다독였다.


‘가능한 한 그런 일이 없도록 해야지. 어쩌면 황후 폐하의 호위가 된 게 다행일 수도 있겠네.’

되도록 황후가 황제의 진심을 모르게 해야 했다.

그러자니 또 눈앞이 막막했다.


‘그런데 저렇게 구시면 바보라도 다 눈치챌 텐데……. 진짜 난감하네, 이거.’

하여간 애는 써 봐야 했다.

일단 황후가 가데니아 꽃을 좋아한다는 유용한 정보 같은 건 일절 알려 주지 않을 작정이었다.

* * *

쿵!

빨리도 왔다.

이제는 황제의 갑작스러운 등장에도 익숙해져 가는 기분이었다.


“오셨습니까, 폐하.”

그나마 옷을 다 입었을 때 와서 다행이었다.
황제가 묘하게 초조한 표정으로 금발을 쓸어 넘겼다.


“이렇게 오래 걸릴 생각은 아니었다. 목욕도 빨리 마쳤는데……,”

목욕은 빨리 마쳤는데 뭔가 다른 일이 있었다는 말 같았다.

아니, 오래 걸리긴. 너무 빨랐는데.


“황제궁까지 거리가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전혀 늦지 않으셨습니다.”

초조했던 표정이 미세하게 밝아졌다.


“그렇다면.”

황제가 아주 자연스럽게 제 옆에 앉았다.

문제는 이럴까 봐 라실리아는 일부러 일인용 소파에 앉아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제가 팔걸이에 걸터앉았다는 점이었다.

자연스럽게 몸이 딱 달라붙었다. 자연스럽게 이쪽을 내려다보는 금안이 선명했다. 보다 보니 저 현란함도 적응이 되는지, 이제는 어느 정도 표정이 읽히는 것 같았다.

황제가 라실리아의 머리 끝을 살짝 쥐고 입을 맞췄다.


“내가 늦은 건 그대 때문에 충격을 받아서였어.”

“그러셨군요.”

그렇다고 키스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그러니까 충격이 사라질 때까지 계속 예외를 둬야 할 것 같아.”

……뭐라는 거야,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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