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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스물네 시간 (2) (14/96)


14. 스물네 시간 (2)
2022.10.19.


퍼억!

범인은 물고기 떼였다.

마치 라실리아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수로에 사는 물고기 떼가 빠르게 헤엄쳐 오다 조각배 아래로 파고들었다.

마침 리얀이 발에 힘을 주고 뛰어오르려던 순간이었다. 물고기 떼가 그 반대편을 들어 올리자 배가 순식간에 뒤집어졌다.


“까악!”

다행히도 검은 새는 무사히 날아가 버렸다.

무사하지 않은 것은 인간들이었다.

첨벙!


‘아……. 나 수영할 줄 모르는데.’

몸이 기울어진다 싶자 곧 물속이었다. 몸이 빨려들기라도 하듯이 물속에 잠겨 들어갔다.


“카르타헤나!”

“앗, 폐하!”

제 이름이 아닌 이름이 들려왔다. 라실리아는 본능적으로 팔다리를 버둥거렸다.

숨이 막히고, 물이 무게가 되어 온몸을 짓눌렀다. 묶이지도 않은 몸이 꽁꽁 묶인 기분이었다. 더 발버둥쳐야 하는데 눈이 감겼다.


“카르타헤나!”

더는 숨이 막힌다는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을 때, 제 몸을 누가 낚아챘다.

* * *

이번에는 아주 다른 꿈이었다.
 


-이것.

금안이 눈부셨다. 처음에는 황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황제와는 조금 달랐다. 비슷한 생김새였지만 귀 끝이 뾰족했다. 이마 한가운데는 몹시 아파 보이는,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가 있었다.


-선물이다.

-선물?

황제와 비슷한 남자가 건넨 것은 계란보다 작은 크기의 붉은 돌이었다.

돌을 건네는 손톱도 그 돌처럼 붉었다. 강철처럼 단단해 보이는 손톱 주변에는 투명한 비늘이 돋아나 있었다.

그래서 그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내가 없을 때 너를 지킬 게 있어야 하니까.

엉겁결에 손을 내밀어 돌을 받았다. 돌은 따듯했다. 그리고 아주 작은 심장박동이 느껴졌다.


-알이네.

돌이 아니라, 알이었다.


-이 안에서 뭐가 태어나는 거야?

-네가 좋아하는 모습으로 태어날 것이다.

처음에는 황제처럼 현란할 뿐 몹시 차갑고 무감하다고 느껴지던 금안이 이 순간에는 조금 달랐다.

애틋하고 부드러웠다. 다정하다 할 만큼.


-내 심장을 일부 잘라 내서 만들었다. 네가 있는 한 이것은 한 번 태어나면 죽지 않아. 영원히 너를 지킬 것이다.

그 다정함이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건 좀 슬퍼.

자신에게 주기 위해 잘라 냈다는 심장을 찾아 가슴에 손을 댔다.

인간이 아니니 심장의 위치도 다를 테지만 그건 상관없었다. 어차피 그 안에 있을 테니까.


-당신이 아팠을 거잖아. 당신이 나를 위해 스스로를 아프게 했다는 게 슬퍼.

-아픈 건 괜찮아.

그가 가슴 위에 얹은 제 손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아픔이 네 곁에 있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라면, 얼마든지 아플 수 있어.

그래서 생각했다.

당신이 아픈 걸 피할 수 없다면, 차라리 같이 아프기라도 했으면 좋겠다고.

* * *



“……쿨럭, 컥!”

울컥 물을 토하고 나자 숨이 쉬어졌다.


“살았어!”

커다란 손이 제 뒤통수를 감싸 안았다. 몸이 타인의 무게로 짓눌렸다. 기껏 숨을 쉴 수 있게 됐는데 다시 숨이 막혔다.


“폐하. 그러다 정말 돌아가시겠습니다. 조금만 살살.”

“…….”

다행히도 리얀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난 뒤 몸이 조금 느슨해졌다.


“하아…….”

라실리아가 숨을 크게 내쉬었다.


“내가…… 물에 빠졌었군요.”

“네, 황후 폐하. 다행히 폐하께서 건져 올리셨습니다.”

자신만 홀딱 젖은 게 아니라 황제와 그림자 기사도 마찬가지였다.

물에 흠뻑 젖은 황제는 보기만 해도 무거워 보이는 그 화려한 성장을 전부 입은 채였다. 체온이 식었는지 희게 젖은 얼굴이 유독 차가워 보였다.


“폐하께서 저를 구하셨군요. 감사합니다.”

“…….”

황제는 미동 없이 입술을 꽉 문 채 이쪽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가 이런 표정을 짓는 것을 처음 보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어쩐지 조금, 가슴이 울렁거렸다.


‘이상해. 닮았어.’

꿈속의 그 금안이 떠올랐다.

어쩐지 애달프고, 어쩐지 다정했던.

그래서 어쩐지 제 가슴이 아팠던.


 


‘그건 황제가 아니었는데.’

그럼 대체 누구였을까.

예언자가 어째서 그런 꿈을 꾸었을까.

그 꿈은 도무지 평소에 꾸던 예언 같지 않았다. 앞으로 일어날 미래의 일이 아니라 아주 오래된 과거처럼 느껴졌다.


“헉헉…… 화, 황후 폐하가 저, 정말로 물에 빠지셨…… 헉헉.”

어느샌가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정원 입구까지 동행한 근위대와 시종들이었는데, 개중에는 근위대에게 손목이 틀어 잡힌 채 질질 끌려온 궁정의도 있었다.

근위대의 속도에 맞춰 죽을힘을 다해 뛰어오느라 가엾게도 얼굴이 새파래진 궁정의가 또 다른 의미로 안색이 변해 숨을 헐떡대며 중얼거렸다.


“아니, 절대 절대 배는 싫다시던 분이 어째서 물에……. 아, 아무튼 어서 안으로 옮기셔야 합니다. 어서 몸을 따듯하게 해야……,”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황제가 불쑥 제 몸을 안아 들었다.


“폐하!”

몸이 들리자 한껏 물을 먹은 옷이 주르륵, 물기를 쏟아냈다.


“비켜.”

황제가 낮은 목소리를 냈다.

낮고, 조용한 그 목소리에 주위를 에워싼 근위대가 일순간 반으로 싹 갈라졌다.


“걸을 수 있습니다, 폐하.”

라실리아가 뺨에 닿는 레스칼의 가슴에 손을 대고 밀어냈다. 물론 그가 밀리는 일은 없었다.


“이번은 예외로 쳐.”

“……? 예외라니요.”

“기억이 안 나고, 낯설고, 그래서 닿으면 싫고. 그런 것에서 예외로 치자고.”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갑자기 제 기억이 돌아온 것도 아닌데.”

“나는 방금 전 그대를 잃을 뻔했다.”

그 말은 라실리아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어쩐지 애달프고, 어쩐지 다정해서.


“…….”

눈을 들어 올리자 황제가 이를 당겨 무는 듯, 울큰 치솟는 턱 근육이 보였다.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자 다른 건 전부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아무것도 안 들어와. 그대가 지금 살아서 내 품에 있다는 것밖에.”

“…….”

“그러니까 지금은 예외로 쳐. 내가 다른 것은 하나도 모르겠으니까.”

“…….”

라실리아가 끝내 아무 말도 못 하는 사이, 레스칼을 밀어내는 힘도 점점 사라졌다.

저벅, 저벅.

물에 젖은 질척한 걸음 소리만이 황후궁까지 숨죽여 이어질 뿐이었다.

* * *

황후궁까지 오는 길은 너무 길었다.

황제에게 안겨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걸음에 따라 흔들리는 몸이 인식되었고, 너무 가까운 숨결이, 살갗에 직접 닿는 체온이 매번 생생해서 곤혹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황후궁에 도착했을 땐 완전히 진이 빠진 기분이었다.

게다가 황제에게 안겨서 등장하자 이쪽을 향하는 경악 어린 시선들이 부담스럽기도 했다.

블루문이 한차례 지나갈 때까지 황후궁의 궁인들은 놀랄 일이 참 많을 것도 같았다.


“이제 내려 주세요. 욕실로 가겠습니다.”

침실 문이 열리자 라실리아가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피곤해 보이는데. 눕는 게 낫지 않나?”

“먼저 물기를 닦고 싶습니다.”

“누워서는 물기를 닦지 못하나?”

“그럼 침대를 버릴 텐데요.”

“무슨 상관이야. 그대가 피곤한데.”

“…….”

라실리아가 좀 피곤하다면 침대 하나쯤은 그냥 버리라는 말을 하는 황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황실은 재산이 아주 많은 모양이야.’

델라르타에는 저런 왕족이 없었다.

그런 정신 나간 인간이 있었다면 진작 신께서 예언을 통해 보여 주셨을 테니까. 그 왕족은 예언자의 이름으로 말도 안 되는 낭비를 꿈꾼 벌을 받았을 것이다.


“그런 짓은 제가 싫습니다. 내려 주십시오.”

“왜 싫다고 하지?”

“싫으니까요.”

“지금 쓰는 침대가 좋은 건가?”

그럴 리가.


“……네. 그런 것 같습니다. 기억은 나지 않아도.”

황제가 뭔가를 생각하는 듯 턱을 만지작대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내가 욕실에서 몸을 닦아 주겠다. 그러면 침대를 버릴 일도 없고, 내가 그대와 떨어져 있을 일도 없으니. 그게 좋겠어.”

좋긴 뭐가 좋은데.

진심으로 저런 말을 하는 건가 싶어 황제를 쳐다보는데, 황제는 아주 진지했다.

진심이네.


“싫습니다.”

“이번에는 왜?”

그걸 말로 해야만 아는 걸까……. 아무래도 블루문에는 사람이 좀, 아니 많이 이상해지기도 하는 듯했다.


“그럴 이유가 없으니까요. 궁인들의 일이 아닙니까.”

“흠. ……이것도 예외로 하면 안 되나?”

뭐라는 거야, 정말.


“안 됩니다.”

“…….”

황제가 입술을 실룩대더니 결국 라실리아를 내려 주었다.

하지만 얌전하게 내려만 주는 것은 아니었다.


“너무 오래 몸을 혹사하지 말도록. 그대가 나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고 있겠다.”

“……? 폐하도 옷을 갈아입으셔야 할 텐데요. 젖으셨습니다.”

“나는 튼튼해서 괜찮아.”

괜찮을 리가 있나.


“카펫이 젖습니다.”

“젖는 게 무슨 상,”

“제 침실의 카펫이 너무 좋아서요. 다른 것으로 교체되는 건 싫습니다.”

“…….”

“갈아입고 오십시오. 그럼.”

탁.

황제가 또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방해를 할까 봐 라실리아는 재빨리 욕실로 들어갔다.


“후우…….”

문을 닫고 기대서자 비로소 숨쉬기가 편해졌다.


“더 심해졌어.”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황제가 계속 이상해지고 있다는 걸 모를 수가 없었다. 사이가 좋았다는 거짓말까지 해 가며 옆에 붙어 앉아 있으려고 할 때부터 그랬다.


“오늘이라고 했는데.”

검은 새가 알려 주었다. 오늘 달이 뜰 것이라고.


“그러니까 오늘 하루만 버티면 돼. 달이 떴다 지려면 시간이 한참 남았다는 게 문제지만.”

지금도 욕실까지 따라오겠다는 헛소리를 하는데, 과연 괜찮을까.


“어쩔 수 없지. 일단은 맹세를 믿는 수밖에.”

그것보다 지금은 이 젖은 옷을 어떻게 벗어야 할지 그것부터 방법을 찾아야 했다.

궁인들의 손을 빌릴 수는 없었다. 표식에 대해 안 이상 목격자를 늘릴 수는 없었다. 그러니 어떻게 해서든 혼자 옷을 벗어야 했다.


“황후 폐하.”

하지만 황후는 진작 이런 상황을 겪고 있었다.

옷을 갈아입는 일부터 목욕까지, 전부 시중을 받는 입장에서는 몸에 새겨진 비밀을 매번 감출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택한 방법이 파샤드 후작 부인이었다.


“……? 어떻게 된 거지?”

“욕실을 쓰시리라 생각해 미리 대비를 해 두었습니다. 이리로.”

익숙해 보이는 태도에 라실리아는 황후와 파샤드 후작 부인이 비밀을 공유한 사이라는 것을 짐작했다.


“너무 경계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른 이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미 표식을 알고 있다면 감추려는 노력은 의미가 없었다.

라실리아가 순순히 후작 부인이 이끄는 대로 욕조 앞에 섰다.

후작 부인이 능숙한 손길로 등에 달린 촘촘한 진주 단추들을 열었다.

젖은 옷의 무게가 조금씩 줄어든다 싶을 무렵, 후작 부인이 은근히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퍽 곤란하시겠습니다. 황제 폐하께서 저리 나오셔서요. 아무리 블루문이라 해도 그렇지, 처소까지 바꿔 감시를 하시겠다니요.”

“……?”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황후 폐하. 이제껏 그랬듯이 제가 잘 지켜 드리겠습니다. 입단속을 시키는 일이라면 이 황궁에서 저를 따라올 자가 없습니다.”

입단속이라…….

황후궁에서 조용히 사라졌다는 궁인들을 두고 하는 말인 걸까.


“폐하께서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제껏처럼요.”

후작 부인은 이제껏이라는 말을 반복했다. 정말 하고 싶은 말은 저 이제껏이라는 뜻이었다.


“그렇다니 다행이로군.”

라실리아가 느리게 대꾸하자 파샤드 후작 부인의 목소리가 한층 은근해졌다.


“그러니 황후 폐하, 그때 약조하신 아이예프 백작의 상속 건은 언제쯤 해결이 될는지요?”

“……?”

후작 부인의 존재는 황후가 비밀을 감추기 위한 방법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후작 부인이 황후의 비밀을 이용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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