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스물네 시간 (1)
(13/96)
13. 스물네 시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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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스물네 시간 (1)
2022.10.16.
‘숨 막혀 죽을 것 같아.’
황제와 반나절을 보낸 뒤 라실리아가 느낀 감정이었다.
‘왜 저렇게 쳐다보는 거야.’
늘 곁에 있겠다는 말이 이런 건 줄 몰랐다.
밥을 같이 먹고, 차도 같이 마셨다. 독서도 했고, 비서관이 잔뜩 날라 온 공문서에 황실 인장을 찍는 일도 지켜보았다.
다만 알현은 모두 거절되었다. 알현실까지 가기 싫다는 하찮은 이유였다.
‘……아니, 왠지 하찮지 않은 것 같아.’
저 집요한 시선은 절대로 하찮다고 말할 수 없었다.
알현실에서도 저런 눈으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으리라 생각하면 까닭 없이 한기가 돌았다.
‘다들 황제가…… 미치거나 뭐 그 비슷한 상황인 줄 알지 않을까.’
블루문이라는 게 그렇게나 지독한 모양이었다.
평소 거들떠도 안 보던 황후를 지금은 일 분 일 초가 아깝다는 식으로 쳐다보고 있는 걸 보면.
‘그렇다고 내가 블루문 전에 기억이 돌아올 일은 없는데.’
탁.
황제가 마지막 공문서에 인장을 찍었다.
“이제 끝났어.”
“그러시군요.”
내심 불안하긴 했다.
‘읽지도 않고 인장만 눌러 대는 것 같았는데.’
뭐, 남의 제국 일이긴 했다.
“이제 뭐든 할 수 있다. 하고 싶은 거라도 있나?”
그런 건 없고, 그만 좀 쳐다봤으면 좋겠다.
“딱히 없습니다.”
“산책을 가지, 그럼.”
황제는 거절을 미리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산책을 제안했다.
“산책……?”
“산책은 싫은가?”
“잘 모르…… 아니, 싫지 않습니다.”
황제는 모르고 있겠지만 산책이라는 말은 라실리아에게 굉장히 신선하게 들려왔다.
예언자의 삶은 단순했다.
대신전 가장 깊숙한 곳, 창문이 없는 어두운 방에서 잠을 자는 게 일과의 대부분이었다.
라실리아는 예언자의 능력이 발현된 시기가 빨라 어릴 때부터 창문이 없는 삶을 살았다.
물론 신전 밖으로 나갈 때도 있었다. 대부분 왕실의 행사 때 대신전의 상징 같은 존재로 사람들 앞에 서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것은 산책과는 아주 다른 일이었다.
라실리아가 적당히 황후 노릇을 하고 있는 건 예언자로서 왕족들을 대할 일이 잦았던 탓이었다.
꿈을 해석하기 위해 라실리아는 대륙의 역사와 정세에 많은 것을 알고 있었지만, 반대로 예언자 노릇에 필요 없는 일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더 많았다.
가끔 신전을 벗어날 때면 볼 수 있는 외부의 모습은 라실리아에게는 온전히 미지의 영역이었다.
황궁에는 어느 방이나 커다란 창문이 있었다.
황제가 하루 종일 저렇게 쳐다보고 있지만 않았다면 라실리아는 평생 침실 안에만 있어도 숨이 막힌다는 생각 같은 것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황제가 제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나 찾았군.”
“뭐를 말입니까?”
“그대가 좋아하는 것.”
“……?”
“표정이 달라졌어.”
라실리아가 저도 모르게 얼굴을 만져 보는 사이, 황제가 임시로 가져다 놓은 책상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그럼 갈까.”
황제가 라실리아의 앞에 정중히 팔을 내밀었다.
* * *
산책은 생각보다 자유로웠다.
앞 뒤 옆을 에워싸고 따라온 근위대와 시종들은 정원 입구에서는 소리 없이 자취를 감추었다.
황궁의 정원은 크게 네 곳으로 나뉘었는데, 지금 온 곳은 물의 정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곳이었다.
황궁에 물을 공급하는 깊고 커다란 수로를 끼고 펼쳐진 드넓은 정원은, 일부러 나무를 줄이고 키가 낮은 꽃을 심어 툭 트인 전망을 지녔다. 분수와 조각상이 색색의 꽃들과 어우러진 정원은 몹시 아름다웠다.
‘아…….’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에 시선을 빼앗긴 탓에 제 팔을 단단히 걸고 있는 황제로 인한 불편함을 잠시 잊었다.
옆에서 걷는 주제에 고개를 틀어 제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것도 잊었다.
“좋은가?”
황제가 물었다.
“네, 폐하.”
“나와 함께 산책을 온 게?”
라실리아가 은근슬쩍 말을 돌렸다.
“정원이 아름다워서요. ……하나만 빼고.”
뒷말을 붙인 건 뒤늦게서야 정원의 구석진 곳을 발견한 탓이었다.
이 완벽한 정원에 단 한 곳, 꽃들이 전부 잘려 나간 곳이 있었다.
“저기는 무슨 일이 있었나요?”
꽃들이 잘려 나간 게 문제긴 했던 모양인지, 그곳에는 정원사들이 부지런히 꽃가지가 잘려 나간 나무를 다듬던 중이었다.
“이쪽.”
레스칼이 어제까지만 해도 가데니아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던 그곳을 은근슬쩍 제 몸으로 가리며 반대쪽을 가리켰다.
“네, 폐하?”
“이쪽으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뱃놀이는 어때? 원한다면 배를 띄우도록 하지.”
아무래도 수상했다. 뭔가 감추려는 모습이었다.
“배도 좋습니다. 그런데 저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알고 싶습니다.”
레스칼이 눈썹을 찡그렸다.
“그걸 왜 알아야 하지?”
“제가 알면 안 되는 일이라도 있었나요?”
“그런 건 없다. 그대가 뱃놀이를 좋아할 것 같아서였어.”
배는 아직 타 본 적이 없었다. 물에 떠서 흘러가면 어떤 기분이 들지 궁금했다.
“말하기 곤란한 일이라면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황제가 끝까지 감추겠다고 하면 새들에게 물어볼 생각이었다.
뜻밖에도 황제가 어색한 표정으로 눈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아니, 내가 뭘 감추려는 게 아니라……,”
그때 리얀이 끼어들었다.
“그냥 말씀하시지요, 폐하. 별로 비밀도 아닌데요. 괜히 오해라도 사시면 그게 더 곤란한 일 아닙니까.”
마침 리얀이 꽃나무 아래서 기어나오는 통에 라실리아가 깜짝 놀랐다.
더 놀라웠던 것은, 기척이 느껴지자마자 황제가 팔을 뻗어 제 몸을 단단히 감싸 안았다는 점이었다.
“……너는 왜 거기서 나오는 건데.”
“놀라게 해 드렸다면 죄송합니다, 폐하. 망할 까마귀 때문에.”
“까마귀?”
“네. 저한테서 뭔가를 훔쳐갔는데 그걸 뒤쫓다가 어쩌다 보니…….”
리얀이 들리지 않는 욕설을 한숨에 섞으며 몸에 묻은 흙먼지를 툭툭 털었다.
“하여간 그냥 말씀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폐하. 설마 황후 폐하께서 가데니아 정원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고 계셨겠습니까? 황궁에서 그나마 마음에 들어 하시던 곳인데요.”
“……?”
라실리아가 애써 고개를 틀어 황제를 쳐다보았다. 그가 팔로 완전히 몸을 감싸는 바람에 턱 아래서 위를 올려다보는 자세가 되었다.
“……. 일부러 망친 건 아니야.”
경직된 턱선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황제는 여전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냥…… 가장 좋아한다기에 할 수 있는 한 많이 가져오라고 말했을 뿐이다.”
“……. ……아.”
라실리아는 비로소 꽃이 몽땅 잘려 나간 정원과 황제의 비밀을 연관시킬 수 있었다.
어제 황제가 잔뜩 보내왔던 그 꽃을 가데니아라고 하는 모양이었다.
“망치신 게 아니라고요.”
“……저렇게 될 줄은 몰랐다.”
“그렇다면 장미 정원도 비슷한 모양이 됐겠네요.”
“거긴 괜찮아. 꽃다발 하나만 만들라고 했으니.”
그 크기를 꽃다발 하나라고 하기엔 너무 양심 없는 일이 아닐까.
“알았으니 놓아주십시오.”
“…….”
황제가 미묘하게 입술선을 비죽였다. 라실리아에게는 벌써 익숙해진 표정이었다.
‘놓으라고 하면 꼭 저런 표정을 짓네.’
미적미적 마지못해 손을 거두는 것도 익숙한 일이었다.
그리고 자신도 이런 일에 조금씩 익숙해져 가는 듯했다. 예를 들면, 리얀이 리얀이라는 것을 몰랐을 때 황제가 자신을 단단히 끌어안던 일 같은 것에.
‘모르는 열매를 먼저 먹겠다고 하던 일과 좀 비슷하기도 하고.’
그게 꼭 뭔지 모를 위협에서 자신을 먼저 감싸는 그런 일처럼 느껴졌다.
‘황후에게 감정은 없다고 해도 반려로서의 본능 같은 게 있는 걸까. ……하긴, 그런 게 있으니까 운명의 반려라고 하는 거겠지.’
안타까운 일이었다. 황후의 표식이 사라져 간다는 게.
‘그건 어쩌면 다른 반려가 있다는 증거일지도 몰라. 황후의 표식이 지워지면서 다른 반려에게 나타났을지도.’
반드시 한 쌍으로 태어난다고 했으니 황후가 진짜가 아니라면 어딘가에 진짜 반려가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이 먼저 알아서 나타나 주면 좋으련만.’
둘 중의 하나였다.
진짜가 스스로 나타나든지, 아니면 황후가 사라져서 황제가 직접 진짜를 찾아 나서든지.
‘꿈이라도 꾸면 좋겠는데. 진짜 반려에 대한 걸.’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였다.
흙먼지를 털다 말고 레스칼의 반응을 유심히 살피던 리얀이 물었다.
“그런데 두 분, 이제 배를 타실 겁니까?”
황제가 이제야 시선을 맞췄다.
“그대의 생각은?”
“저는 좋습니다.”
모르고 있었지만 라실리아는 조금 들뜬 상태였다.
황후궁을 벗어나 물의 정원까지 천천히 걷는 일도 좋았고, 신선한 햇살과 공기를 피부로 직접 느긋하게 느끼는 일도 좋았다.
배를 타는 건 더욱 새로울 것이다.
“아하, 배를 타는 게 좋으시군요. 그럼 두 분은 천천히 선착장으로 내려오십시오. 저는 먼저 가서 배를 준비하도록 이르겠습니다.”
말을 마친 리얀이 후다닥 수로를 향해 뛰어갔다.
* * *
“으음…… 진짜로 배를, 좋아하시네요?”
배를 탄 지 십 분 정도가 지났을 것이다.
리얀은 부득불 자신이 노를 젓겠다고 우겨 뱃놀이에 동행했다.
소드 마스터급의 기사가 작정하고 노를 젓자 수로에 띄우는 작은 조각배가 전투선이라도 된 것처럼 쏜살같이 물 한가운데로 돌진했다.
뱃놀이가 처음인 라실리아는 뭐가 문제인지 알지 못했다.
그냥 뱃놀이라는 건 말을 타는 것보다 훨씬 더 신이 난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런 것 같아. 속도가 빨라서 재미가 있군.”
“네? 빨라서, 재미있다고요?”
“그런데.”
“…….”
리얀이 제 얼굴을 보며 눈을 끔벅거렸다.
레스칼은 그 표정에서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짐작했다.
“해가 너무 뜨겁지는 않나?”
레스칼이 주의를 돌릴 겸, 핑계를 대고 조금이라도 더 붙어 있을 겸 라실리아에게 말을 거는 순간이었다.
“악! 저놈의 새!”
까아악!
리얀이 배 안에서 벌떡 일어서며 노를 레스칼에게 넘겼다.
“폐하! 외람되지만 좀 저으십시오. 야 이 망할 새야! 내 물건 돌려 내!”
리얀이 칼까지 뽑아 들고 공중을 향해 휘저으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 저 새는…….”
분명히 제게 말을 거는 그 새들 중 까만 새였다.
“까악!”
-이따, 이따. 달이 떠, 달이 떠.
저 멀리서 검은 새가 말을 걸어 왔다. 이 말을 해 주려고 나타난 모양이었다.
“그게……,”
라실리아가 손으로 입을 가렸다.
달이라면 아무래도 블루문을 뜻하는 것 같았다.
리얀이 버럭 성질을 냈다.
“좀 보십시오, 폐하! 저 새 말입니다, 엄청나게 수상쩍지 않습니까? 이상하게 저만 보면 괴롭히려고 든단 말입니다.”
라실리아가 모른 척 새를 두둔했다.
“그게 아니라 그냥 지나가는 길 아닐까? 새가 괜히 인간을 괴롭힐 이유는 없을 텐데.”
리얀이 이를 갈았다.
“황후 폐하께서 모르셔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저 악독한 새가 방금 전에도 제게 무슨 짓을 했냐면…… 앗, 기회다!”
라실리아가 보기엔 아직도 한참 거리가 멀었는데 리얀에게는 아닌 모양이었다. 이전까지는 새라고 대충 봐줬지만 이제는 진심이었다. 오른손에 칼을 들고 몸을 낮춘 리얀이 공중으로 도약하려고 했다.
“경! 그만둬!”
라실리아가 리얀을 붙잡으려고 했다.
“위험해! 일어나지 마.”
그런 라실리아를 레스칼이 먼저 붙잡아 말렸다.
‘안 된단 말이야!’
라실리아가 버둥대며 속으로 간절히 외쳤다. 그사이 날카로운 눈으로 거리를 잰 리얀이 칼을 쥔 채 튀어 올랐다.
새는 하늘에 있고, 인간은 하늘을 날 수 없는데도 리얀은 어떻게 해서든 검은 새를 붙잡을 것만 같았다.
“안 돼!”
라실리아가 간절히 외치는 그 순간, 무슨 일이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