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붉은 돌
(12/96)
12. 붉은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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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붉은 돌
2022.10.12.
“음…… 꽤 먼 곳입니다. 마차를 죽도록 달리면…… 어디 보자. 하루 다섯 시간만 자면서 길을 재촉한다고 해도 두 달 정도. 중간에 산맥도 하나 넘어가야 하고요.”
두 달. 델라르타까지 가는 시간이었다.
‘진짜 머네. 가는 데만 두 달이라면.’
돌아오는 시간까지 하면 더욱 까마득히 멀게 느껴질 것이다.
라실리아가 힐긋, 황제의 표정을 살폈다. 손은 아까부터 황제에게 꼭 붙잡혀 있는 상태였다.
델라르타로 가고 싶다는 말이 나온 순간부터였다. 부탁하는 게 있는 입장이라 매정하게 손을 잡아 뽑지 못했다. 손이 계속 저보다 훨씬 뜨거운 체온에 데워지고 있었다.
“두 달. 나쁘지 않군.”
“그런데 거긴 왜 물으십니까? 엘리아든과는 아무런 교류도 없는 곳인데요.”
“황후가 그곳에서 필요한 게 있다고 해서.”
거리가 멀다며 거절할 줄 알았던 라실리아는 속으로 안도했다.
‘그럼 이제…… 돌아갈 수 있는 건가.’
델라르타에 돌아간다고 해서 이 모든 일이 끝나는 건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 델라르타의 상황이 어떤지, 리카르도 왕제가 대신전을 그대로 놔두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낯선 장소를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벌써 마음의 무게가 달라졌다. 대신관이 자신을 믿어 준다면 뭔가 방법이 생길 것이다.
“그럼 이제 내 차례.”
황제가 손에 힘을 주며 귓가에 대고 나직하게 말했다.
“내가 그대의 청을 들었으니 그대도 내 청을 들어주었으면 하는데.”
델라르타로 갈 수 있다면 그 정도는 할 수 있었다.
“말씀하십시오.”
황제가 새삼스럽게 접촉을 청하진 않을 것이다. 그건 기억을 되찾은 뒤라고 못을 박았으니까.
하지만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 두 달 동안 내가 그대 곁에 있고자 한다.”
“……네?”
그게 무슨 말인가 싶었다.
“곁에 있는다는 게 정확히 무슨 뜻입니까, 폐하?”
“말 그대로.”
“말 그대로?”
“곁에 있겠다. 늘.”
“늘……?”
“그대가 오늘처럼 과거를 잘못 기억하는 일이 없도록.”
레스칼이 쥐고 있던 손을 들어 입술을 댔다.
“내가 하나씩 알려 주겠어.”
그것도 이상했지만 두 달이라는 것도 이상했다.
“그 말은…… 폐하께서도 델라르타에 가시겠다는 말씀입니까?”
“아니.”
“그럼……?”
레스칼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델라르타에 왜 가야 하지?”
“네?”
“신관을 이곳으로 불러야지.”
“…….”
라실리아의 얼굴이 굳었다.
어쩐지.
너무 쉬웠다. 그렇게 쉬운 일이 될 리가 없었는데.
* * *
“엄청나게 실망하신 얼굴인데요.”
리얀이 곁으로 다가와 작게 속삭였다.
황후궁에 황제가 지낼 곳을 마련하는 중이었다. 방 하나를 새로 짓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비슷할 정도로 할 일이 많긴 했다.
옆방이 궁인과 시종들로 북적대는 가운데 리얀은 황제의 그림자가 되는 게 아니라 황후의 침실에 남았다.
“마치 델라르타에 가셔야 할 이유가 꼭 있었던 것처럼요.”
“……폐하의 관대함에 황송했던 것이겠지.”
라실리아가 델라르타로 가겠다고 끝까지 우길 수 없었던 이유였다.
황족이 몇 달씩이나 외국을 방문하는 일은 몹시 예외적이었다. 전쟁이나 그와 비슷한 이유가 있어야 했다.
특별한 기도이니만큼 신전에서 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했더니, 황제는 그렇다면 황궁 안에 델라르타의 신전을 하나 짓겠다고 했다.
이어서 황제궁의 시종장이 재빨리 움직였다.
마치 준비를 진작 마쳐 둔 것처럼 황제가 쓸 물건을 줄줄이 황후궁으로 옮겨 왔다.
“흐음……. 그렇게 나오시는군요. 뭐, 알겠습니다.”
리얀이 아직도 싱싱한 가데니아 꽃을 괜히 툭 건드렸다.
“그럼 황후 폐하는 황제 폐하께서 앞으로, 늘, 밤이나 낮이나 곁에 꼭 붙어 계신 것도 괜찮으신 모양입니다?”
아니, 괜찮을 리가 없었다.
다시 생각해도 시종장 페르손 백작에게는 화가 날 지경이었다.
그러나 더는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라실리아는 애써 좋은 면을 생각하기로 했다.
일단 신관이 오는 건 확실할 테니 델라르타의 소식은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운이 좋으면 대신관과 연락이 닿을지도 몰랐다.
지금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그게 최선이었다.
“그렇게 된 일이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거 참. 언제 이렇게 의연해지셨지. 전에는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있으면 당장 궁인들 모가지부터 자르고 드신 분께서요.”
황후가 궁인들을 공식적으로 처벌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고 들었다. 이유야 다양했고, 도둑질이나 모욕죄 같은 것은 아무래도 죽이기 위한 핑계라는 말이 많았다.
라실리아는 그 이유가 어쩌면 표식에 대해 감추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유감이군. 비난을 달게 받아야 할 내가 지금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게.”
“어차피 멀쩡한 양심을 가진 분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리얀의 언사에는 거리낌이 없었다.
확실했다. 그림자 기사들은 황후를 싫어했다. 황후와 사이가 좋았다는 황제의 말이 터무니없는 거짓말이라는 증거였다.
“그 맹세라는 것도 터무니없잖습니까. 기억이 돌아오면 접촉을 하겠다니. 당장 내일이라도 블루문이 뜰 수 있는데. 폐하께서는 또 자신을 방 안에 가둬 놓고 며칠씩이나 그 끔찍한 고통을 인내하셔야겠지요.”
“…….”
황제가 어떤 고통을 겪는지 라실리아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인간의 육신이 견뎌 내지 못하는 고통이라니, 자신이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더 자신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야 했다. 가짜가 사라져야 황제도 진짜 반려를 찾게 될 것이다.
“그대는 믿지 못하겠지만, 나는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아, 최선이 기억상실입니까?”
“빈정대는 것은 그대 마음이듯이 듣기 편치 않은 것은 내 마음이겠지. 마땅한 볼일이 없으면 이만 나가도록.”
“뭐, 쫓아내시니 쫓겨나야지요.”
리얀이 훌쩍 몸을 돌렸다.
그러나 문을 열기 전, 리얀은 라실리아를 한 번 돌아보았다.
“제가 일전에 드린 말씀은 잘 기억하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황후 폐하. 황제 폐하께 드린 맹세만큼이나.”
“……물론 기억한다.”
“그러셔야 할 겁니다.”
쿵!
리얀이 문을 닫고 사라졌다.
* * *
삐익 삑!
구우우!
리얀이 나가자마자 새들이 창문을 콕콕 쪼아 대며 울었다.
라실리아는 닫힌 문을 한 번 더 살핀 뒤 창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야? 부르지도 않았는데.”
-그 여자, 그 여자.
-심술 맞아, 심술 맞아.
-괴롭혀, 괴롭혀.
라실리아가 피식 웃었다.
“그래서 또 쫓아내 주려고 온 거야? 괜찮아. 벌써 갔어.”
-벌써 갔다? 갔다?
-안 돼, 안 돼.
이번에는 까만 새가 나섰다.
-괴롭혀, 괴롭혀!
푸드덕!
라실리아가 말릴 틈도 없이 까만 새가 훌쩍 날아갔다.
“아냐, 그러지 마!”
라실리아가 소리쳤지만 뒤늦은 일이었다.
“별로 괴롭히지도 않았는데. 말 몇 마디 한 게 고작인 걸. ……뭐, 아직은.”
아직은. 그러니까 자신이 가짜라는 걸 들키지 않은 아직까지는.
그 이후라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게 문제긴 했다.
라실리아가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너희들이 가서 좀 말려 줘.”
그러자 남은 새들이 날개를 푸드덕대며 소리를 질렀다.
-왜, 왜?
-그 여자 그 여자 심술 맞아.
“아니야. 꼭 그런 건 아냐. 황제한테 아주 충성스러워서 그럴 뿐이야. 그게 그 사람 일인데 자기 일을 너무 열심히 했다고 벌을 주는 건 공정하지 않아. 가서 검은 새를 말려 줘.”
-이상해, 이상해.
-공정해, 공정해.
새들은 열심히 항의해 봤지만 라실리아가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탁하자 결국 검은 새를 뒤쫓아 갔다.
창틀에 떨어진 깃털 몇 개를 주우며 라실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나를 좋아한다더니, 좀 맹목적인 구석이 있네. 대체 이유가 뭘까.”
이곳은 여전히 모르는 일투성이였다.
저 새들이 정확히 어떤 존재인지도 모르는 일 중 하나였다.
그래도 하나는 알 것 같았다.
“……닮았어.”
맹목적인 성격은 어쩐지 황제를 연상시켰다.
신전에 가야 하면 차라리 신전을 하나 짓겠다고 말하는 그를.
* * *
“그게 뭐야, 리얀?”
“이거?”
휙!
황후궁을 벗어난 리얀이 뭔가를 허공으로 던졌다 받았다.
“나도 몰라.”
“뭐? 그런데 뭘 그렇게 꼭 쥐고 있어?”
“황후 폐하 거야.”
리얀이 씩 웃으며 무언가를 쥐고 있던 손바닥을 폈다.
“……돌?”
“생긴 걸 보면 돌 같긴 하지. 그러니까 되게 이상하지 않아? 돌 같은 걸 곱게 간직할 만큼 섬세한 감수성을 가졌을 리가 없잖아. 우리 악독한 황후 폐하께서.”
세르벤이 갑자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황후 폐하가 너한테 주셨을 리 없고……. 설마 훔친 거야?”
“훔쳤다기보다는 주운 것에 가까워.”
“그게 그거지.”
“아냐. 달라.”
휙!
리얀이 다시 장난처럼 돌을 던졌다 받았다. 말이 장난이지, 어마어마한 팔 힘으로 던져 낸 돌은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올라갔다가 한참 뒤에야 떨어졌다. 리얀은 보지도 않고 손을 뻗어 돌을 착 받아냈다.
“황후 폐하와 잠깐 같이 있었거든. 화장대 서랍을 슬쩍 열었더니 이게 나오지 뭐야. 몰래 꺼낸 김에 손에 들고 있었는데 보고도 아무 말 안 하시더라고. 그건 뭐, 그냥 가지라는 소리지.”
“야, 아무리 그래도……. ……아니다. 네가 한 짓이니 이유가 있겠지. 설마 기억상실이 정말인지 시험해 본 거야?”
“겸사겸사.”
휘잉!
다시 돌이 날아갔다.
“일단 사람이 달라지긴 했어. 수상할 정도로 상식적이고 고상해. 내가 대놓고 비아냥거려도 우아하게 되받아치더라니까. 그게 말이 돼? 우리 성질 더럽고 표독스러운 황후 폐하께서?”
“그만큼 자기 포장에도 능하시잖아.”
“나하고 둘이 있는데 괜한 재능 낭비를 하실 분이 아니지.”
“아, 그 말은 반박할 수 없겠는데.”
“그래서 이젠 나도 좀 헷갈리더라니까. 기억상실에 걸리면 사람이 싹 돌변하기도 하고 그러나?”
“난들 알겠냐.”
“대체 어떻게 된 건지. 황후 폐하만 딴 사람이 된 게 아니라 폐하도 그러시잖아. 아까 피엘리온 소공작을 걷어차실 때 봤어? 아무리 폐하라도 귀족을 발로 미는 건 예법에 어긋나지 않아?”
“많이 어긋나지.”
“그걸 모르시는 분도 아니고, 새삼 왜 그런 짓을 하시냔 말이야. 마치 아내가 다른 남자와 있는 현장을 목격해서 화를 주체 못 하는 의처증 남편 같……. ……아니, 그런데 내 돌! 내 돌 어디 갔지? 떨어질 때가 됐는……,”
리얀이 돌을 찾아 눈을 크게 뜨고 허공을 살피던 중이었다.
“까아아악!”
팟!
어디선가 바람을 쌩 가르며 나타난 검은 새가 붉은 돌을 부리로 홱 가로챘다.
“악! 저거 그때 그 미친 새 아냐! 야 이 미친 것아! 새 주제에 돌을 먹기라도 하겠다는 거냐!”
리얀이 다급하게 칼을 뽑아 들고 달려갔다.
“까악!”
까만 새는 리얀을 비웃듯 저 높이 날아갔다.
“거기 서! 잡히면 털 다 뽑아 버린다!”
곧이어 리얀도 하나의 점이 되었다.
혼자 남은 세르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나저나 진짜 돌을 왜 갖고 계셨던 거지. 진짜 안 어울리게.”
보석도 아닌 돌을 소중하게 간직하는 황후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보통 돌이 아닌가?”
답은 리얀이 무사히 돌을 찾아오면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리얀은 끝내 까만 새를 잡지 못했다.
까만 새 역시 그 돌을 라실리아에게 돌려주지 못했다. 마침 그 시간 황제가 짧은 이사를 마치고 황후에게 돌아온 탓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