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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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추문
2022.10.09.
황제가 꽃다발을 들고 있는 게 아니라 꽃밭 속에 그가 서 있는 것 같았다.
금색과 붉은색의 조화는 너무 현란한 나머지 눈이 아플 정도였다.
보통 황제가 왔다면 시종들이 앞서서 방문을 알리기 마련이었다. 지금은 그런 것도 없었다.
당연히 놀랐다. 그런데 방으로 들어서는 황제도 태연해 보이지는 않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뒤 우뚝 멈춰 섰던 황제가 곧 이쪽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아, 황제 폐하를 뵙습……,”
뒤늦게 테르나덴이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취했다.
“인사는 됐고.”
퍽!
레스칼이 손에 든 묵직한 꽃다발을 테르나덴에게 떠넘겼다.
“윽, 무거,”
쿵!
엉겁결에 꽃다발을 떠안게 된 테르나덴이 주춤대다 뒤로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러자 레스칼이 넘어진 테르나덴을 발로 퍽 밀었다.
“윽!”
신음을 토하는 테르나덴에게 레스칼이 말했다.
“그걸 부탁하지. 화병에 꽂아 놓도록.”
“……네? 지금 뭐라고,”
테르나덴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다는 이해하지 못했다.
황제가 저를 짐짝처럼 끌어냈다. 피엘리온의 소공작을, 피엘리온 가문 출신의 황후 앞에서.
그리고 그건 그림자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봤어? 방금 폐하께서,”
세르벤이 리얀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귓속말을 건네려 하자 리얀이 빠르게 말을 잘랐다.
“응. 나도 안 믿기는데 일단 소공작부터 끌어내야 할 것 같지 않아?”
“아, 그건 그래.”
두 기사들이 재빠르게 움직이는 바람에 다행히도 이해하지 못할 일은 거기에서 그쳤다.
* * *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라실리아가 아는 한 황제는 가장 비상식적인 인물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무표정으로 그는 가장 위협적인 표정을 만들어 냈다.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라실리아는 그가 지금 몹시 위험해 보인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방해가 됐나?”
몇 호흡이 흐른 뒤 들려온 말이었다.
방해가 되긴 했다.
“한창 담소를 나누던 중이었습니다. 아쉽긴 하지만 다음에도 기회가 있겠지요.”
황후에 대해 더 알 수 있는 기회였다. 얘기가 중간에 끊긴 것은 아쉬웠지만 피엘리온 소공작이라는 인물이 있다는 것을 알아 다행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황후와 아주 가까운 인물이었고, 기억상실을 믿었다.
“다음이라고.”
작게 중얼댄 황제가 털썩, 테르나덴이 앉았던 바로 그 자리에 앉았다.
테르나덴은 라실리아에게 귓속말을 할 정도로 가까이 앉아 있었다. 그러니 황제도 그만큼이나 가까이 있다는 뜻이었다.
“너무 가깝습니다, 폐하. 그리고 어쩐 일로 오셨,”
황제가 뒷말을 뚝 잘랐다.
“소공작과는 더 가까웠다.”
“아니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더 가까웠어.”
입술이 닿을 것처럼 황제의 얼굴이 휙 가까워졌다.
“이 정도로 가까웠다.”
‘전혀 아니었는데. 그리고 거리가 뭐가 중요한데.’
라실리아가 몸을 젖혀 거리를 벌렸다.
“원하시면 그렇다고 하십시오.”
“그리고 손도 잡았어.”
그 말과 동시에 황제가 라실리아의 손을 붙잡았다. 라실리아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레스칼을 바라보았다.
“……제 의지는 아니었습니다만 그런 일이 있긴 했습니다. 그럼 이제 손을 놓고 거리를 벌려 주시겠습니까? 너무 가깝습니다.”
황제는 움직일 생각이 아예 없어 보였다.
“그에게도 이렇게 말했나?”
“네?”
“기억을 잃었고, 낯선 사내일 뿐이니 불편하고, 그래서 건드리지 말고 멀리 떨어져 있으라고. 그렇게 말했나?”
잠깐 기억을 되짚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말을 하는 대신 손을 잡아 뺐을 뿐이었다.
“아니요.”
“왜?”
그렇지 않아도 너무 가까운 거리가 더 가까워졌다.
코앞에서 보이는 금안이 부담스러운 것을 넘어 시야를 어지럽혔다.
“왜 내게는 멀어지라 하면서, 소공작은 아니지?”
“그런 말을 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정말인가?”
“네?”
“기회가 있었으면 소공작도 거절했겠냐고.”
저절로 눈이 깜박거렸다.
‘왜 이러지. 소공작과 무슨 문제라도 있나? ……아, 그게 아니라 내가 기억을 정말 잃은 건지 의심해서 묻는 거겠군. 황후와 소공작은 원래부터 친한 사이로 보였으니까.’
그러자니 표식을 여러 번 본 적이 있었다는 말이 엄청나게 거슬리긴 했다.
그걸 그저 친한 오누이 사이로 볼 수 있는 게 맞는 걸까.
“네, 그게 답니다.”
“앞으로도 소공작이 손을 잡으면 놓으라고 할 건가?”
“물론 그럴 겁니다. 저에게는 소공작도 무척 낯섭니다.”
“……. ……그렇다면.”
그 말을 듣고 나서야 황제가 느릿느릿 손을 놓아주었다.
종이 한 장 차이만큼 떨어져 있던 거리도 책 한 권 정도로 벌어졌다.
겨우 그 거리만큼 떨어지는 게 전부냐는 표정으로 황제를 쳐다보니 그가 제 눈을 마주하며 이렇게 말했다.
“다음부터는 손을 놓으라는 말을 먼저 하도록. 기회가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 말에 책 한 권이 책 두 권으로 늘어났다.
여전히 너무 가까웠지만, 그래도 이제 숨을 좀 쉴 것 같았다.
“소공작은 무슨 일로 왔나?”
여전히 시선을 떼지 않은 채 황제가 물었다. 나란히, 책 두 권만큼 떨어진 자세에서 눈을 마주하며 얘기를 나누는 건 의외로 불편한 일이었다.
“병문안을 왔습니다. 소식을 이제 들은 모양입니다.”
대꾸를 하며 라실리아가 몸을 일으켰다.
“그 자리가 좋으시다면 제가 옮겨 앉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다. 그냥 앉아 있어도 돼.”
“제가 옮기고 싶습니다.”
그 말에 황제가 미간을 구겼다. 하지만 안 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원한다면.”
“네.”
자리를 옮기자 한결 편해졌다.
저도 모르게 숨소리를 내는 라실리아를 보며 레스칼이 입술 끝을 실룩였다.
“병문안이라니 이상하군. 평소 그대가 아팠을 때에도 소공작이 찾아온 일은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병문안이 아니라 표식에 대해 물으려고 온 것이었다. 라실리아가 은근슬쩍 말을 돌렸다.
“그러는 폐하께서도 병문안을 오진 않으셨습니다.”
순간 금안이 번뜩였다.
“그걸 어떻게 알지? 혹시 기억이 돌아온 건가?”
……그럴 리가.
“소공작에게 지난 일을 들었습니다.”
“나를 두고 대화를 했다고? 무슨 말을 했나?”
“자주 병문안을 올 만큼 폐하와 제가 돈독한 사이는 아니었다고 하더군요.”
정확히는 그보다 더 끔찍한 사이였다. 황후는 황제를 사랑했고, 황제는 무관심했다. 하지만 황제는 황후를 필요로 했고, 황후는 그 필요를 채워 줄 수 없기에 거짓으로 자신을 감추었다.
표식이 완전해지지 않는 한 나아질 방법이 도무지 없던 관계였다.
그러나 입을 다물고 제 눈을 빤히 바라보던 황제가 이렇게 말했다.
“거짓말이야.”
* * *
거짓말이라니.
“소공작이 거짓말을 했다. 그대와 나는 소원하지 않았어. 굉장히 사이가 좋았다.”
“…….”
조금, 어이가 없었다.
“믿기 어렵군요. 굉장히 좋은 사이였다면서 이제껏 초야도 치르지 않았다니.”
“그게 사이가 좋았다는 증거겠지.”
황제는 눈을 빤히 들여다보면서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인간이었다.
“어째서 그렇게 되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초야를 치르지 않은 건 그대가 원해서였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청이지만 이제껏 성실히 따르고 있다는 게 우리 사이가 몹시 돈독했다는 증거라고 보는데.”
말이 안 되는 소리였는데, 너무 당당하게 내뱉으니 말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 혼란스러운 기분이었다.
“……피엘리온 소공작이나 시녀들의 말과는 다르군요.”
“그자들이 나보다 더 우리 사이를 잘 안다는 말을 하는 건 아니겠지.”
그들만이 아니라 리얀도 있었다.
“폐하의 그림자 기사라고 해도 말입니까?”
“내 그림자 기사라도.”
“…….”
이유가 있을 것이다. 저렇게 안 믿을 게 뻔한 거짓말을 하는 이유가.
‘대체 왜……. 아, 블루문 때문에.’
기억상실은 어쩌면 황제에게는 기회일지도 몰랐다.
더 이상 접촉을 미룰 수 없는 황제는 황후에게 접촉을 강요해야 하는 입장이었고, 황후는 시기적절하게 기억을 잃었다.
원래 사이가 좋았다고 하면 황후는 앞으로 접촉을 거부할 이유를 찾기가 어려워질 것이다.
‘하아……. 머리가 좋은 사람이었네. 내가 내 입으로 과거가 그렇지 않았다는 말은 못 할 테니까. 이대로 꼼짝없이 휘둘릴 수밖에 없다는 걸 계산했겠지.’
정답이었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내게 너무 가깝다는 말은 하지 말았으면 한다. 우리는 늘 나란히 한 의자에 앉았어. 이렇게 가깝게.”
한 의자에 딱 달라붙어 앉아 있는 게 시작일 것이다.
“……그렇다면 폐하.”
다행히도 라실리아에게는 미리 생각해 둔 수가 있었다.
“치유의 기도를 받고 싶습니다. 기억을 되찾기 위해.”
“치유의 기도?”
“네. 피엘리온 소공작이 알려 주었습니다. 델라르타 왕국에 치유력을 지닌 신관들이 있다고요.”
예언자와 거짓말만큼 안 어울리는 조합도 없을 테지만, 지금은 할 수 있었다. 황제가 저렇게 나오는 이상 자신도 거짓말쯤은 할 수 있어야 했다.
피엘리온 소공작은 황후의 편인 듯했으니 뒤늦게라도 어떻게든 장단을 맞춰 줄 것이다.
“델라르타에 가고 싶습니다.”
* * *
“자요. 받으십시오.”
“……?”
세르벤이 커다란 화병을 내밀고, 리얀이 말했다.
테르나덴이 황당한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걸 받아서…… 어떻게 하라고?”
“폐하께서 친히 명을 내리셨잖습니까. 화병에 꽂아 놓으라고요. 꽂으십시오.”
“그러니까 이걸 지금 나한테…… 진짜로 하라는…… 그런 말이냐?”
“황명인데요. 설마 거부할 생각이셨습니까? 이런. 간도 크시지. 안 그래, 세르벤?”
“그러게.”
테르나덴이 울컥 화를 냈다.
이제껏 그림자 기사들을 개인적으로 마주칠 일은 없었지만 들어 둔 얘기는 있었다. 황제의 비호를 등에 업고 황족인 것처럼 안하무인으로 군다더니, 그 말이 딱이었다.
카르타헤나가 그림자 기사라면 괜히 이를 가는 게 아니었다.
“……너희들의 이름을 기억해 둘 것이다. 언제까지 그렇게 굴 건지 두고 보자.”
“뭐, 그건 마음대로 하시고요.”
리얀이 시큰둥하게 콧바람을 흘렸다.
“그보다 황명에 열과 성을 다하시길. 저희는 폐하의 뜻을 따라 일절 거들지 못함을 알아 두시고요.”
말을 마친 그림자 기사들은 보란 듯 뒤편의 의자에 편히 다리를 꼬고 앉았다.
그러니까 피엘리온의 소공작이 팔자에도 없는 꽃꽂이를 하는 동안 그걸 구경이나 하고 있겠다는 뜻이었다.
“……이,”
테르나덴이 속으로 온갖 욕을 삼켜댔다.
붉으락푸르락 일그러지는 얼굴이 뻔히 보일 텐데도 그림자 기사들은 눈 한 번 끔벅대지 않았다.
“너희들…… 내게 이러는 이유가 무엇이냐.”
장미 가시에 손가락을 세 번째 찔렸을 때, 도무지 참지 못한 테르나덴이 홱 돌아서서 그림자 기사들을 노려보았다.
“아, 딱히 이유랄 건 없고.”
리얀이 깍지 낀 손으로 뒤통수를 받친 자세로 테르나덴을 마주했다.
“최근 황후 폐하께서 좀 큰 사고를 치셨달까. 그렇습니다.”
“뭐, 뭐라고? 그게 지금 황후 폐하를 두고 할 말이냐?”
“그러니 자연히 혼인 전 추문 상대에게, 물론 소공작께서는 먼 친척에다 입양아라 아예 연애를 못 할 상대는 아니었다지만, 하여간 애먼 화살이 날아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 아닙니까. 그냥 받아들이세요.”
테르나덴의 안색이 휙 변했다.
“그, 그게 무슨…… 추문이라니…….”
“그걸 또 폐하께서 모르시는 바가 아니기도 하고. 그렇지, 세르벤?”
세르벤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르실 리가 없지. 혼인 전에 이미 다 알아보셨을 걸.”
“그러니까 좀, 가뜩이나 블루문이 다가오면서 심기가 불편하실 폐하에게 본인이 어떤 존재일지 한 번 신경을 썼으면 좋겠다는 얘기였습니다. 아, 그러니까 황후 폐하를 독대한답시고 한 소파에 앉아 손을 붙잡고 있기 전에 말입니다.”
“…….”
테르나덴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럼 꽃꽂이 마저 하십시오. 소질 있는 것처럼 보이시는데.”
내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으니 우리 폐하 짜증나게 하지 말라는 말을 제법 예의 있게 돌려 말했다고 생각한 리얀이 느긋하게 등받이에 기대는 순간이었다.
“리얀.”
옆방, 그러니까 황후와 단둘이 남게 된 사실에서 레스칼이 리얀을 불렀다.
“네, 폐하.”
두 기사가 말도 안 되는 속도로 움직여 옆방으로 들어갔다.
문이 도로 닫히기 전, 테르나덴의 귀에 이런 말이 들려왔다.
“델라르타가 여기서 얼마나 걸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