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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표식 (10/96)


10. 표식
2022.10.05.



“대체 왜 말을 하지 않았지?”

황제가 떠난 뒤, 시녀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목욕을 마치고 옷을 갈아입은 라실리아는 부끄러워 죽을 것 같다는 표정을 억지로 감추며 파샤드 후작 부인에게 물었다.


“그것이…… 황후 폐하께서 그것이 초야의 잠옷임을 모를 리 없다 여겼사옵니다.”

후작 부인의 목소리가 저 멀리 기어들어 갔다.


“거듭 여쭤도 초야의 잠옷이 마음에 든다고 하시기에……,”

“그만. 무슨 말인지 알겠다.”

라실리아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간 황후가 뻔한 거짓말을 반복해 온 대가였다. 아무도 황후가 하는 말을 진실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들 알다시피 나는 기억을 잃었다. 잠옷 같은 사소한 일 하나까지 기억이 나지 않아. 내가 오늘 같은 실수를 하게 된다면 반드시 나서서 말려야 한다.”

“그게……. 알겠나이다, 황후 폐하.”

대답은 공손했지만 어쩐지 썩 믿음이 가진 않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시녀들은 황후가 거짓말을 하는 건지 아닌지 갈팡질팡하는 중일 것이다.


‘할 수 없지. 더 주의하는 수밖에.’

아무리 생각해도 이곳을 빨리 떠나는 수밖에 없었다. 가짜라는 말을 하는 순간 곧장 칼을 뽑아 들던 그림자 기사들이 떠올랐다. 리얀이 자신을 따로 찾아와 했던 협박은 괜한 게 아니었다.


‘하루라도 빨리 델라르타로 돌아가야 해. 자연스럽게 치유의 기도에 관한 얘기를 꺼낼 계기를 만들어야 할 텐데…….’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였다.

똑똑.


“황후 폐하.”

계기가 제 발로 라실리아를 찾아왔다.


“테르나덴 피엘리온 소공작께서 뵙기를 청하십니다.”

 

* * *

피엘리온의 소공작은 황후의 손아래 동기였다.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나이 차이는 그리 많지 않아 보였다. 검은 머리와 차가운 청색 눈을 한 서늘한 인상의 미남자는 작위를 잇기 위해 입양한 먼 친척뻘이라고 하는 말이 무섭게 황후와 닮아 있었다.

그가 라실리아의 앞에 공손히 무릎을 굽히고 앉아 손등에 정중하게 입술을 댔다.


“신께서 폐하의 변치 않는 아름다움을 축복하시길.”

“……감사를, 피엘리온 공. 그만 일어나도록.”

“뜻대로.”

테르나덴이 몸을 일으켰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시녀들이 조용히 방을 떠났다.


“……?”

라실리아가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는 사이, 테르나덴이 훌쩍 곁으로 다가와 아직 반쯤 젖어 있는 머리칼을 한 움큼 쥐고 향을 맡았다.


“흐음. 오늘은 레몬향이네. 내가 별로 안 좋아한다는 걸 알면서. 누이는 상큼한 건 안 어울려.”

탓!

놀란 라실리아가 테르나덴의 손을 쳐 냈다.


“무슨 짓인가?”

“누이야말로 무슨 짓인데? 아프잖아.”

빨개진 손등을 쥔 테르나덴이 혀를 찼다. 그 말투나 동작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두 사람이 아주 친했다는 사실을 짐작했다.


“내가 기억을 잃었다는 얘기를 아직 듣지 못한 모양이지. 공이 누군지는 전해 들었지만 유감스럽게도 공과 함께 한 시간은 조금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낯선 사람으로 대해도 이해하기 바란다.”

“하……? 이건 또 뭐야. 지금 나한테까지 기억상실인 척하겠다는 거야?”

말하는 걸 들어 보니 기억상실 얘기를 전해 듣긴 한 모양이었다.


“동기간이라 해도 예의를 지켜 줬으면 하는데.”

“예의……? 정말이지 기가 차네.”

테르나덴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고 싶은 건 라실리아도 마찬가지였다.

한 집안 사람조차 황후의 말을 믿어 주지 않았다. 델라르타로 돌아가는 길이 아주 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성큼 앞으로 다가온 테르나덴이 라실리아의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무슨 짓인가?”

“진심이야. 재미없으니까 관둬, 이런 짓. 그냥 말을 해. 나한테 화난 거야? 주술이 효과가 없었어?”

“주술……?”

테르나덴 피엘리온은 황후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 이제야 시녀들이 방을 나선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황후는 그와 비밀을 나누는 데 익숙했을 것이다. 두 사람이 있을 때는 자리를 비우는 일이 시녀들에게 명령보다 앞서는 습관이 될 정도로.


‘황후가 주술을 사용했다고? 대체 왜?’

라실리아는 테르나덴을 돌려보내려던 생각을 바꾸었다. 테르나덴 피엘리온은 황후에 관해 누구도 알지 못하는 이야기를 해 줄 수 있었다.


“누이가 내게 화를 낼 일이라면 그것밖에 없잖아. 주술이 아직 효과가 없는 건가? 그래서 나를 벌주려는 거야?”

“…….”

라실리아가 아무 말 없이 있자 테르나덴이 라실리아의 손을 잡아 제 뺨에 댔다. 일그러지는 눈매가 고통스러워 보였다.


“제발, 누이……. 내게 이러지 마. 나는 누이를 위해 최선을 다했어. 직접 트리니다드까지 가서 가장 영험하다는 주술사를 데려왔다는 걸 누이도 알잖아.”

 

 
주술이 활발히 통용되던 시절은 까마득한 옛날 일이었다. 언젠가부터 주술은 신성력이나 마법에 비해 실체가 없는 불안정한 힘으로 인식되었다.

주술을 익히기 위해 필요한 너무 방대한 지식도 주술을 더 난해하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

어설픈 지식으로 시도하는 반쪽짜리 주술의 결과는 처참한 경우가 더 많았다.

결국 주술사들의 숫자는 계속 줄었고, 세상에서 잊혀 갔다.

트리니다드는 대륙에 얼마 남지 않은 주술사들이 과거의 명맥을 잇는 도시였다.


“주술사가 다녀간 지 이제 고작 일주일 됐어. 효과가 나타나려면 시간이 필요해. 주술사도 그렇게 말했잖아. 당장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을 거라고.”

“……그 말을 내가 언제까지 믿어야 하는데?”

라실리아가 손을 잡아 빼며 말투를 바꾸었다.

테르나덴의 태도를 보면 낯선 사람으로 대하는 일은 별 의미가 없을 듯싶었다.


“황제의 서른 살 생일까지.”

잠시 망설이던 테르나덴이 이런 답을 내뱉었다.


“그전에는 반드시 효과가 나타날 거야.”

앞으로 일 년 뒤의 일이었다. 기다리기에는 너무 긴 시간이었다. 그리고 라실리아는 일 년씩이나 더 제국에 머무를 수도 없었다.

테르나덴이 다시 라실리아의 손을 움켜쥐었다.


“나를 믿어. 그리고 그만 나를 용서해. 자주 보지도 못하는데 이럴 건 없잖아.”

간절한 목소리였다.

다른 건 몰라도, 그가 황후의 편이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라실리아가 다시 손을 잡아 뺐다. 테르나덴이 안타까운 눈으로 멀어지는 손을 좇았다.


“용서에 앞서 공이 알아야 할 게 있는데.”

“뭔데? 뭐든 말해. 하라면 뭐든 할게.”

“내가 기억상실이라는 건 진짜야.”

“……뭐?”

“그러니 말해 봐. 그 주술은 뭐를 위한 것이었는지.”

 

* * *



“어처구니가 없군. ……설마 주술의 부작용인가?”

테르나덴은 거듭 되묻고 나서야 라실리아의 말을 믿었다.


“큰 주술일수록 부작용이나 반동이 있다고 듣긴 했는데……. 미친, 그렇다고 기억상실이라니.”

테르나덴은 제 턱을 쥐고 부산스럽게 방 안을 왔다 갔다 했다.


“그러지 말고 앉아. 앉아서 얘기를 마저 해.”

라실리아가 카우치를 가리켰다. 걸음을 멈춘 테르나덴이 라실리아를 한참 쳐다보다 카우치로 돌아왔다.


“그러니까…… 정말로 아무것도 모른다고? 나하고 한 짓도 전부 다?”

“몰라. 그중 내가 꼭 알아야 하는 게 있나?”

“제기랄. 전부 다 알아야지! 그걸 말이라고 해?”

테르나덴이 울컥 화를 냈다. 사실 화라기보다는 겁을 먹은 것에 더 가까워 보였다.

그가 황후와 꼭 닮은 검은 머리칼을 잡아 뜯듯이 움켜쥐었다.


“대체 이걸……. 하아, 하필이면 기억을 잃다니. 지금처럼 위태로운 시기에.”

다시 고개를 들어 올린 테르나덴이 머리칼을 놓고 라실리아를 간절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 눈은 진심처럼 보였다.


“잘 들어, 누이.”

“듣고 있어.”

“누이는 표식을 잃었어.”

충분히 당황스러운 얘기였다.

표식은 반려의 증거였다. 그걸 잃었다면 황후로서는 당연히 무슨 짓이든지 해야 했을 것이다.


“표식을 잃을 수도 있어? 표식은 물건 같은 것이었나?”

“뭐……?”

테르나덴이 쓰게 웃었다.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모양이군. 표식을 되찾으려 주술사를 불렀으면서 정작 표식이 뭔지도 잊어버리다니.”

테르나덴이 손가락으로 제 몸 어딘가를 가리켰다.

하필 그곳이 엉덩이 사이라 난처했는데, 테르나덴의 얼굴은 진지했다.


“누이의 표식은 여기에 있어. 반려가 아니고서야 볼 일이 없는 곳에.”

“…….”

표식은 몸 안쪽 깊숙한 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황후도 스스로 볼 수 없었다. 아주 내밀한 관계에 속한 자만이 볼 수 있는 위치에 존재했다.

예외가 있다면 목욕 시중을 드는 시녀였다.

어느 날 유난히 공을 들여 몸을 깨끗이 씻기던 시녀가 표식이 달라진 것을 발견했다. 레스칼과 혼인식을 올리기 한 달 전이었다.

그 한 달 사이 표식은 절반도 넘게 사라졌다.

혼인식 당일에는 누가 봐도 표식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지워져 있었다.

이대로 초야를 치를 수 없었다. 황제에게 들켜서는 안 됐으니까.


“그래서 매번 그렇게…… 피했던 모양이군. 황제를 싫어해서가 아니라.”

“싫어해?”

테르나덴이 조소를 터트렸다.


“누이가, 레스칼을? 사랑이 먹는 거였다면 누이는 레스칼을 머리카락 한 올까지 전부 먹어치웠을걸. 배가 터져서 죽는다고 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사랑한다고 해도…… 계속 감출 수는 없는 일이었잖아. 그래도 혼인을 감행했다는 거야?”

“내가 누이를 안 말렸을 것 같아?”

테르나덴의 표정이 비틀렸다.


“몇 번이고 말했어. 너무 위태로운 일이라고. 황후 자리는 포기해야 한다고. 못 하겠으면 최소한 방법을 찾을 때까지 혼인을 연기해야 한다고.”

그래도 소용이 없었다는 말이었다.


“황제는 의심하지 않았나? 그렇게 접촉을 거부했으면 의심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게 문제야.”

테르나덴이 구겨진 얼굴로 한숨을 내뱉었다.


“매달리고 애원해야 하는 쪽은 누가 봐도 레스칼인데, 정작 그 인간은 태평하다는 게.”

반려가 반려라고 불리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황후가 황제를 전부 씹어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사랑하듯, 황제도 그렇게 황후를 사랑해야 했다.

그러나 레스칼은 그러지 않았다. 먼저 동침을 바란 적도, 애정을 갈구하거나 요구한 적도 없었다. 카르타헤나는 그에게 아무런 감정을 이끌어내지 못하는 다른 인간들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럴수록 황후는 자신이 진짜 반려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에 몸부림쳤다.

막다른 길에 달한 황후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주술사를 찾았고, 주술을 치렀다. 피엘리온 공작이 가문의 재산으로 막대한 대금을 지불했다.

그 결과는 아직 누구도 알지 못했다.

초조하게 머리칼을 쓸어 넘기던 테르나덴이 제안을 했다.


“지금 표식을 확인해 보자. 주술이 성공했을 수도 있으니까.”

이건 황후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자칫 피엘리온 공작가 전체가 가짜 반려를 황후로 들인 죄를 받아야 할지도 몰랐다.


“엘리아든의 피는 반려가 없이 서른을 넘기지 못해. 진짜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최초의 계약에는 그렇게 명시되어 있다고 했어. 레스칼은 그전까지 어떻게든 접촉을 하려고 들 거야. 지금까지는 방치했지만 더는 그럴 수 없겠지. 그게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전까지 누이는 반드시 반려의 표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야.”

“그건 알겠어. 그런데……,”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표식이 되돌아오는 걸 확인하고 주술사를 돌려보냈어야 하는 건데. 이제껏 연락이 없기에 성공한 줄 알고 있었어. 설마 누이가 기억을 잃을 줄이야. 하여간 지금 확인해야 해.”

테르나덴이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바람에 표식이 어디에 있다는 말을 잠시 잊어버릴 뻔했다.


“어서, 누이. 돌아서서 옷을 벗어.”

“뭐……?”

“그래야 보지.”

하지만 도무지 잊어서는 안 되는 위치였다. 라실리아가 당황을 감추기 위해 손을 내저었다.


“잠깐. 확인은 내가 할게.”

“누이는 못 보는 곳에 있다니까. ……아, 설마 이것도 잊은 건가?”

테르나덴이 북받치는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낸 채 라실리아를 바라보았다.


“나는 이미 여러 번 본 적이 있어. 새삼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야.”

“그게 무슨 뜻이지? 내가 왜,”

“기억 안 나?”

테르나덴이 훌쩍 다가섰다. 금방이라도 입술이 닿을 듯 가까운 거리였다.


“누이하고 내가, 어떤 사이였는지?”

그때였다.

철컥, 쾅!

아무런 예고도 없이 두 사람이 있는 사실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들어서는 사람은 말도 안 되는 크기의 장미 꽃다발을 들고 있는 황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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