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서로의 맹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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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서로의 맹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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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서로의 맹세
2022.10.02.
바닥은 딱딱했지만 두툼한 카펫은 푹신했다. 그러다 보니 얼떨결에 잠이 든 모양이었다.
“아……. 잤나 보네. 지금 몇 시지?”
희미한 아침 해에 눈을 뜬 라실리아가 눈을 끔벅대며 시계를 찾았다. 시간은 여섯 시가 되기 조금 전이었다.
“아, 돌아가야겠다.”
라실리아가 부스럭대며 몸을 일으키자 횃대에서 자고 있던 앵무새도 부스스 눈을 떴다.
“엣헴. 이 몸은 슈라이든 1세! 좋은 아침!”
“그래, 좋은 아침이야. 덕분에 무사히 하루를 넘겼어. 그럼 다음에 또 봐.”
“천만의 말씀! 좋은 아침!”
“안녕, 공작님. 잘 있어.”
라실리아가 슈라이든 1세의 방을 떠나 문을 닫고 계단을 내려왔다. 다행히도 북쪽 탑을 전부 다 내려올 때까지 마주치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황후궁으로 가는 길은 아니었다.
“…….”
파란 새가 알려 준 대로, 그림이 걸린 벽 뒤에 숨겨진 작은 문을 열고 발을 내딛는 순간 뭔가가 잘못됐다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황후 폐하……?”
올 때만 해도 인기척이 없던 방에 근위대와 궁인들이 가득했다.
“아, 하……. 길을, 잃어서…….”
라실리아의 멋쩍은 변명은 근위대의 고함 소리에 묻히게 되었다.
“황후 폐하를 찾았습니다!”
* * *
‘핑계가 안 먹힐 것 같아.’
라실리아는 어젯밤의 결정을 살짝 후회했다.
‘당황해서 잘못된 판단을 내렸나 봐. 생각이 짧았어.’
막연하게 먼저 잠이 든 쪽은 황제였으니 큰 문제가 되지 않으리라 여겼다. 어쨌거나 자신은 약속을 지켰고, 황후궁으로 돌아가겠다는 말도 남겨 두었다.
잠에서 깨자마자 자신을 찾기 위해 밤을 새워 황궁 전체를 뒤집어엎을 줄은 몰랐다.
‘이전에는 황후가 아프다고 핑계를 대면 그냥 넘어갔다고 하지 않았나……. 그냥 그런 정도일 줄 알았는데.’
지금 황후궁에 깔린 근위대의 숫자를 보면 매번 접촉을 피해 갔다는 황후가 용할 지경이었다.
‘피하는 건 소용이 없으려나 봐.’
그리고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카르타헤나 황후는 이 모든 위험을 감수할 정도로 황제와 접촉하는 일을 진심으로 싫어했으리라는 것을.
“황제 폐하, 황후 폐하가 오셨습니다.”
계속 복잡해지는 생각과는 아랑곳없이, 결국은 황후의 침실에 도달했다. 앞뒤 양옆을 어제보다 세 배나 많은 숫자의 근위대가 에워쌌다.
“들여보내.”
끼이익.
문이 양옆으로 열렸다.
어젯밤 화려하게 치장한 모습 그대로인 황제가 방 안에 서 있었다.
아니, 화려하지만 화려하지 않았다. 머리는 헝클어지고 옷은 흐트러져 있었다. 눈은 충혈된 것처럼 핏발이 섰고, 눈가는 어두웠다.
라실리아가 마른침을 삼켰다.
‘……좀 무서운데.’
원래도 저 미친 생김새 탓에 보는 사람을 이유 모르게 긴장하게 만드는 이가 황제였다.
지금은 긴장을 넘어서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황제의 등 뒤에서 두 그림자 기사가 자신을 물어뜯고 싶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는 중이었지만 그런 건 황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길을 잃었습니다. 부끄럽게도.”
라실리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대로 분위기에 휩쓸리면 겁을 먹게 될 것 같아서였다.
“…….”
저벅.
황제는 말을 대신해 이쪽을 향해 다가왔다.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가 이렇게 크게 들린 적은 처음이었다.
“잠이 오지 않아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보면 혹시 생각나는 곳이 있을까 싶었는데 아니더군요.”
“…….”
저벅.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러다 붙잡힐 것 같았다. 라실리아는 저도 모르게 도망칠 곳을 찾는 사람처럼 뒤를 힐긋 돌아보았다.
“제 불찰로…… 괜한 염려를 끼친 것 같습니다. 송구합니다.”
“…….”
저벅.
마침내 걸음이 멎었다. 황제가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이해할 수가 없어.”
핏발 선 눈이 제 모습을 비추는 동안 황제가 입을 열었다.
“왜 달아났지? 먼저 동침의 뜻을 보인 것은 그대였는데.”
“……네?”
처음에는 잘못 알아들은 줄 알았다.
“동침…… 이라고요? 대체 언제,”
“하지만 달아났지. 내게 약을 먹이고.”
황제는 그 열매가 문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슴이 뜨끔했지만 라실리아는 애써 고개를 저었다.
“폐하. 오해하신 듯합니다. 저는 동침을 뜻한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거짓말까지.”
붉어진 금안이 피식, 날카로운 숨소리를 뱉어 냈다.
“그대가 이제까지 한 수많은 짓들 중에 오늘 일이 가장 저급했다. 방금 전까지 오늘은 도무지 용납할 수 없다고 생각하던 중이었는데,”
그렇게 말한 황제가 갑자기 제 몸을 덥석 끌어안았다.
라실리아가 당황해 버둥거렸다.
“읏, 폐하.”
“얼굴을 보니……. ……이상해. 더는 화가 나지 않아.”
“…….”
“이상해.”
“…….”
계속 이상하다고 말하는 황제처럼, 라실리아도 이상했다.
끌어안는 힘이 너무 강해 숨이 막히는 것 같은데 그를 밀어낼 수가 없었다.
‘너무 간절해 보여.’
그건 이해했다. 그에게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 그래서 간절할 수밖에 없다는 것.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을 죽일지도 모르는 황제가 안타까워 보이는 것은 문제였다.
‘알잖아. 나는 여기 있어서는 안 돼. 내가 황제에게 해 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이제는 말을 해야 할 때였다. 시간을 끌어 봤자 좋을 게 없었다. 게다가 라실리아는 자신이 예언처럼 황제에게 연민 이상의 감정을 품게 될까 봐 걱정스러웠다.
“폐하.”
라실리아가 입을 열자 레스칼이 숨을 한 번 들이쉬었다.
“놓으라고 하지 마. 지금은 놓을 생각 없다.”
“그게 아니라……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이대로 해.”
불편함과 미안함을 동시에 느끼며, 라실리아가 말했다.
“저는 폐하의 운명이 아닙니다.”
* * *
“뭐?”
“뭐라고?”
레스칼보다 먼저 반응한 것은 그림자 기사들이었다. 놀람과 절망, 분노와 불신이 두 사람의 얼굴 위에 빠르게 교차했다.
하지만 그건 아주 잠시였다.
“이제야 솔직해질 마음이 드셨나 보군요.”
스르릉.
리얀이 검을 뽑아 들고 있었다. 그 옆에 선 다른 기사의 표정도 칼을 쥔 사람 못지않았다.
‘솔직하게 말하는 건 무리겠군.’
예상은 하고 있었기에 당황은 덜했다. 잠깐 소름이 돌긴 했지만 겁을 먹을 정도는 아니었다.
“칼을 거둬라. 무슨 말을 하고 있나.”
레스칼이 몸을 떼어내며 그림자 기사들을 등으로 막아섰다.
라실리아는 침착하게 레스칼을 향해 마저 말을 이었다.
“저는 폐하의 반려가 아닙니다. 기억을 잃었으니까요.”
“…….”
이런 말이 통할지는 라실리아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이 방법이 최선이었다.
“운명의 반려라는 건 날 때부터 서로에게 속한 존재들을 두고 하는 말일 겁니다. 하지만 기억을 잃은 제게 폐하는 그저 낯선 사람일 뿐입니다. 저는 폐하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게 없고, 아무런 감정도 없습니다. 폐하께서 제 곁에 오실 때마다 어색하고 두려워 몸이 굳습니다. 그런 걸 두고 어떻게 운명의 반려라 할 수 있겠습니까.”
레스칼이 천천히 라실리아의 말을 따라 했다.
“……아무것도 없다고.”
“저는 접촉이 무엇인지도 시녀들에게서 전해 들었습니다. 그런 제가 폐하께 도움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말했듯이, 시간이 필요합니다. 기억을 되찾으면 달라질 것입니다.”
“기억을 되찾으면 말이지.”
레스칼이 턱을 한 번 갸웃댔다.
다음 순간 그가 라실리아의 손을 잡았다. 잡는다 싶더니 가볍게 손목을 돌려 제 손목을 쥔 라실리아의 손에 깍지를 끼웠다.
순식간에 손을 꽉 마주잡은 자세가 되었다.
“내게 시간을 얻어내고 싶으면 그대도 맹세를 해 줘야겠어.”
가까운 거리에서 손을 마주잡은 자세는 생각보다 불편하거나 어렵지 않았다. 그래서 당황스러웠다.
“어떤 맹세 말입니까.”
“기억을 되찾으면, 반드시 내 운명의 반려로 돌아오겠다는 맹세.”
맹세라는 말은 무게를 지녔다. 예언자에게 맹세의 의미는 남들보다 몇 배나 더 무거웠다.
하지만 받아들일 수 있었다.
기억을 잃은 적이 없으니 되찾을 수도 없었다.
애초에 지킬 수가 없는 맹세였다.
“맹세하겠습니다.”
“그렇다면 그대가 원하는 대로 시간을 허락하겠다.”
“감사합니다, 폐하.”
레스칼이 제 손가락에 얽혀 있는 라실리아의 손을 끌어당겼다.
다음 순간 입술이 아주 부드럽게 손등을 눌렀다. 뺨에 하는 키스보다 더 당황스러웠다. 지금처럼 눈을 빤히 보며 하는 키스는 낯설다는 감각을 부정할 수도 없었다.
레스칼은 손등에서 입술을 떼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그 시간 동안 나는 그대의 기억이 돌아오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
* * *
“이게 끝이라고요? 그게 말이 되는 처사입니까, 폐하?”
리얀은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폐하께 약을 먹였습니다! 그리고 도망친 황후 폐하께 아무런 처벌도 내리지 않으시겠다는 말입니까? 당연히 안 됩니다!”
세르벤도 거들고 나섰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폐하. 이번 건 그간의 만행과는 또 다른 일인지라……,”
“완전 다른 일입니다!”
리얀은 화를 참지 못한 나머지 발끝을 세워 쿡쿡 바닥을 찍었다.
황후궁에서 돌아오는 순간부터, 아니 황제가 벌을 내려도 시원찮은 황후에게 맹세니 뭐니 하며 키스를 할 때부터 이 말을 하고 싶어 미칠 노릇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레스칼은 달랐다.
이미 말했던 대로, 그는 황후가 되돌아온 순간 화를 잊었다. 화가 아니라 오히려 다른 감정이 생겨났다.
초조해졌다.
다시는 황후가 사라지는 일을 겪고 싶지 않았다. 쓸데없이 화를 내느니 황후를 확실하게 붙잡아 둘 방법을 찾아야 했다.
“너희가 잘못 아는 게 있는데, 잠이 드는 열매를 먹은 건 나야.”
“네……? 폐하께서 직접 드셨다고요?”
“황후는 내게 먹으라는 말은 하지 않았어. 자기가 먹고 싶다고 했지.”
“아니, 그럼…… 드시고 싶다는 걸 폐하께서 빼앗아 드셨다는 겁니까?”
“모르는 열매라서. 황후가 탈이 날 수도 있었다.”
“아니, 그게…….”
리얀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벙긋댔다.
이상하게도 레스칼의 저 말은 황후를 끔찍하게 아낀 나머지 차라리 제 몸을 상하게 하고 말겠다는, 그런 정신 나간 팔불출이 하는 소리로 들려왔다.
“그래서 탈이 나지 않으셨습니까. 폐하께서.”
“나는 황후가 나를 잠재우고 달아나려고 했던 사실을 잊었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니다.”
탁!
레스칼이 어깨를 누르던 망토를 벗어 발치에 떨어트렸다. 이제야 망토를 벗을 생각이 들었다는 건 밤을 새우는 내내 완전히 정신이 없었다는 뜻이었다.
“벌을 내리는 것보다 맹세를 하게 만드는 게 효과적이라는 말을 하는 거야.”
“어떻게 그렇게 됩니까? 황후 폐하께서는 내킬 때까지 기억상실을 연기하실 텐데요.”
“기억을 잃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으면 돼. 아주 사소한 거라도.”
레스칼이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이상하게도 그 얼굴이 웃는 것 같았다.
“그럼 황후는 더 이상 나를 거부할 수 없어. 맹세를 했으니까.”
“…….”
“…….”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그림자 기사들이 차례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겠군요……. 그런데 기억을 잃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아내는 방법이 쉬울 것 같진 않습니다. 황후 폐하를 스물네 시간 내내 감시할 수도 없고.”
레스칼이 세르벤의 말을 뚝 잘랐다.
“왜 안 되는데?”
“네?”
“스물네 시간 감시하는 게 왜 안 되냐고.”
“그러려면 누군가 내내 같이 있어야 한다는……,”
레스칼이 세르벤의 말을 끊었다. 마치 이게 본심이었다는 듯, 뚜렷하게 미소 짓는 얼굴로.
“내가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