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슈라이든 1세
(8/96)
8. 슈라이든 1세
(8/96)
8. 슈라이든 1세
2022.09.28.
스르륵…… 쿵.
마침내 황제의 몸이 옆으로 넘어갔다.
열매를 먹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황제는 눈꺼풀을 느슨하게 늘어트렸다.
잠이 오는 것 같, 까지 말했을 때 황제의 머리가 그대로 내려와 라실리아의 어깨를 짓눌렀다.
넘어지지 않도록 붙잡아 주려고 하긴 했다. 그러기에는 체격 차이가 엄청났다. 옷자락을 붙들어 봤지만 어깨에 기댄 황제는 그대로 주르륵 미끄러져 의자와 함께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나마 옷을 잡고 있었기에 머리가 심하게 부딪치는 일은 가까스로 피할 수 있었다.
“하아……. 안 되겠어. 너무 무거워.”
침대로 옮겨 주는 일도 불가능했다. 라실리아는 어찌어찌 황제를 똑바로 바닥에 눕게 한 뒤 베개를 가져와 머리 밑에 넣어 주었다.
“무슨 열매인지는 모르겠지만 효과가 아주 좋네.”
라실리아가 잠이 든 황제를 곁에서 쳐다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생각보다 쉽게 먹일 수 있었어. 다행이야. 그런데……,”
그런데 왜 황제는 자신이 먼저 맛을 보겠다고 한 걸까.
다행이긴 했지만 그 이유가 조금 궁금하긴 했다.
“사이가 안 좋은 걸 몰랐으면 황제가 황후를 위해 먼저 위험을 무릅썼다고 생각했을지도 몰라.”
이상하고 낯설고, 난해하고 두려운 황제가 조금쯤 인간적으로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이대로 접촉을 했다고 착각해 주면 좋을 텐데. ……아, 그러면 옷을 조금 벗겨 두는 게 나을지도.”
거기까지 생각한 라실리아가 황제의 몸에 손을 대는 순간이었다.
“……앗!”
갑자기 황제가 몸에 닿은 손을 홱 움켜쥐는 바람에 라실리아는 심장이 떨어질 듯 놀랐다. 그가 잠에서 깨어난 줄 알았다.
다행히도 황제는 잠에서 깨어난 게 아니었다. 단지 손을 꽉 쥐고 있을 뿐이었다.
‘뭐야. 자면서 어떻게 이럴 수 있지.’
라실리아는 손을 빼내려고 버둥거렸다. 잠결이란 게 무색할 정도로 힘이 셌다. 결국 손가락을 하나하나 펼쳐서 간신히 손을 빼낼 수 있었다.
‘아파.’
손등에 멍이 들지 않을까 싶었다. 그가 또 언제 어디를 움켜쥘지 몰라 라실리아는 재빨리 거리를 벌렸다. 라실리아가 멀어지자 분명히 잠들어 있는 눈꺼풀이 꿈틀거렸다.
‘아, 그러고 보니 효과가 얼마나 지속되는지는 모르고 있잖아.’
잠은 들었지만 황제가 언제 깨어날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한두 시간 안에 깨어난다면 그 뒤로도 충분히 접촉을 시도할 만했다.
‘내일 아침까지는 어딘가에 숨어 있어야겠어. 기억을 잃었으니 황궁 안에서 길을 잃었다고 하면 변명이 되겠지.’
결정은 빨랐고, 행동도 빨랐다.
라실리아는 즉시 문으로 다가갔다.
예상했던 대로 문을 열자 두 명의 근위대가 의아하다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황후 폐하?”
“폐하께서 잠이 드셨다.”
“아……?”
“깨어나실 때까지 내 방에 가 있겠다.”
“아, 그…… 저희는 어떻게 하라는 명령을 받지 못했습니다.”
근위대가 일단 가로막고 나섰지만 예상하지 못했던 건 아니었다.
“깨어나신 뒤 나를 찾으시면 다시 오겠다.”
그러자 근위대도 더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라실리아는 근위대의 호위와 함께 황후궁으로 돌아왔다.
* * *
쿵.
문이 닫혔다.
방 안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거듭 확인한 라실리아가 창문을 열었다.
“부르면 온다고 했지. 지금 와 줄 수 있겠니?”
잠시 기다리자 기특한 새들이 날아왔다.
이번에는 숫자가 더 많았다. 새들이 저마다 다른 음성으로 떠드는 바람에 조금 시끄러웠다.
“쉿. 혹시 누가 들을지 몰라.”
새들이 금방 조용해졌다.
“내일 아침까지 숨어 있을 만한 곳이 필요해. 혹시 여기서 들키지 않고 갈 수 있는 곳에 그럴 만한 장소가 있을까?”
새들이 자기들끼리 한참 말을 주고받았다. 그러다 결론이 난 듯, 곧 힘차게 고개를 끄덕여 댔다.
-있어, 있어.
-네, 네. 거기라면 괜찮아, 괜찮아.
라실리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다행이다. 안내를 부탁해도 될까?”
새들이 자기들끼리 또 한참 얘기를 하더니, 이번에는 파란색 깃털을 가진 새가 창문 안으로 폴짝 뛰어들어 왔다.
-내가, 내가.
“네가 안내해 주겠다는 말이겠구나. 고마워. 어디로 가야 하지?”
-이쪽, 이쪽.
자그마한 파란 새가 후드득 날아올랐다.
다른 새들에게도 고맙다는 인사를 남긴 라실리아가 파란 새를 따라갔다.
* * *
이 새들은 확실히 뭔가가 있었다.
말을 한다는 것부터 평범하진 않았지만 몹시 영리한데다 황궁의 구석구석을 알고 있었다.
파란 새는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통로를 잘도 찾아내 라실리아를 북쪽 탑으로 데려갔다. 황궁 안이 어찌나 넓은지 이동하는 데만도 한 시간 정도가 걸린 듯했다.
북쪽 탑에 들어서자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다.
분명 황궁의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화려하고 먼지 한 톨 없이 잘 닦여 있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고즈넉했다.
꼭 이곳만 시간이 멈춰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여기가 어딘데?”
-여기, 사람들 없어. 안 와.
“왜?”
-여기, 주인이 있어.
“응? 주인이라니?”
파란 새는 대답 대신 직접 보라는 듯, 닫혀 있는 문을 부리로 콕콕 찍었다.
“여기로 들어가면 돼?”
-네, 네.
라실리아가 문을 열었다. 새들이 영리한 걸 알기 때문에 아무런 의심도 없었다.
그러나 문을 열자마자 누군가가 소리쳤다.
“누구냐!”
“앗,”
라실리아가 손잡이를 잡은 채 동작을 멈췄다. 살짝 열려진 문 틈새로 파란 새가 쏙 들어가 버렸다.
“잠깐! 거기 들어가면 안,”
“으응?”
파란 새가 들어갔으니 혼자서 달아날 수도 없었다. 한숨을 탁 내뱉은 라실리아는 새만 데리고 나올 생각으로 다시 문을 열었다.
“누구냐! 누구냐!”
“아……,”
누구냐고 외치는 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몹시 커다란 앵무새였다. 앵무새가 앉아 있는 곳은 거의 천장까지 닿는 커다란 새장이었고, 새장은 문이 열려 있었다. 새가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그렇게 놔둔 모양이었다.
그리고 새장은 전부 싯누런 황금이었다. 대체 얼마나 많은 금이 쓰였을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새가…… 여기 주인이라고 한 거야?”
파란 새가 작은 머리를 끄덕였다.
-응, 여기. 새, 살아.
“아하……. 왜 여기 사는데?”
그 말에 대답을 한 건 앵무새였다.
“엣헴! 이 몸은 키르네 탑의 슈라이든 1세! 슈라이든 공작이다!”
“응……?”
“공작 합하시다! 인사를 해라!”
앵무새가 날개를 푸드덕대며 시끄럽게 소리를 쳤다. 그러자 파란 새가 후다닥 새장 안으로 날아가 앵무새의 머리를 작은 발로 퍽 후려쳤다.
시끄러우니까 조용히 하라는 뜻 같았다.
파란 새는 작고 앵무새는 어마어마하게 컸지만, 놀랍게도 앵무새는 얌전해졌다.
그게 다가 아니라 두툼한 금 횃대에서 슬그머니 바닥으로 내려오기도 했다. 횃대를 당당히 차지한 파란 새는 그 옆 모이통으로 날아가 모이를 쪼아 먹었다.
“그래도…… 되는 거야?”
라실리아가 새장 앞으로 가서 물었다.
-네, 네.
“이 앵무새는 왜 이렇게 얌전해?”
-그냥 새, 새라서.
“너도 새잖아.”
-우리는 아냐. 우리는 달라.
“어떻게 다른데?”
-달라, 달라.
“그러니까 어떻게 다른데?”
-우리는 달라. 달라.
“음……. 거기까지 얘기하는 건 무린가.”
아주 영리한 새들이었지만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는 데는 한계가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것만 해도 충분히 놀라웠다.
“대체 너희들은 누구니…….”
라실리아가 파란 새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쓰다듬자 새가 눈을 감고 목을 길게 뺐다.
-더, 더. 더, 더.
계속해서 만져 달라는 듯 손바닥 안으로 파고들기도 했다.
“사람을 좋아하는구나.”
-아니, 아니. 사람, 아니.
“사람은 안 좋아한다는 말이야?”
-응. 안 좋아, 안 좋아.
“그럼 나를 좋아한다는 말이겠네?”
-네, 네.
‘참 이상하지. 황후를 좋아했던 건가. 그럼 황후가 키우는 새들이었을까. ……아, 그건 아니겠구나.’
황후의 방에는 새장 같은 새 물건이 하나도 없었다. 새들은 늘 밖에서 날아왔으니 딱히 사람의 손을 탄 것 같진 않았다.
“너희들, 혹시 내가 누군지 알고 있니?”
혹시나 싶어 이렇게 물었다.
-네, 네. 알아, 알아.
“그러니까, 진짜 누군지 알고 있다는 거야?”
-네, 네. 진짜, 진짜.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거짓말 같진 않았다.
파란 새를 쓰다듬는 라실리아의 손이 순간 가늘게 떨렸다.
어쩌면 이 새들이 열쇠일지도 몰랐다. 자신에게 벌어진 이상한 일들의 해답이 든 상자를 열 수 있는.
“그럼 혹시…… 내가 왜 여기로 왔는지도 알아?”
기분 좋은 듯 눈을 감고 있던 파란 새가 그 순간 눈을 떴다.
-진짜가 왔으니까 이제 곧 그분도 깨어나.
“그분?”
-그분.
“그게 누군데?”
-그분.
거기까지 말한 파란 새가 훌쩍 날아올랐다.
-부르시면 또 온다, 온다.
같은 말을 남긴 파란 새가 어디론가 포르르 날아가 버렸다.
“더 난해해졌어.”
파란 새를 붙잡으려는 듯 손을 뻗던 라실리아가 동작을 멈추고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분이 대체 누군데. 누가 온다는 거야.”
어쨌거나 새들의 말대로 이곳은 사람이 오지 않는 곳이었다. 내일 아침까지 마음을 놓고 있을 수 있었다.
침대며 의자 같은 사람을 위한 가구가 하나도 없는 방이라 라실리아는 편하게 바닥에 앉아 벽에 등을 기댔다.
“엣헴. 이 몸은 슈라이든 1세! 슈라이든 공작이 인사를 올립니다.”
조용히 어깨를 움츠리고 있던 앵무새가 라실리아의 옆으로 뒤뚱뒤뚱 걸어왔다.
라실리아가 피식 웃었다.
“아까는 인사를 하랬으면서 지금은 인사를 올리는 거야?”
“엣헴. 인사 올립니다.”
“그래, 안녕. 반가워. 갑자기 들어와서 놀랐을 텐데 머물게 해 줘서 고마워.”
머리를 쓰다듬자 앵무새가 기분 좋은 표정으로 날개 끝을 파닥였다.
“엣헴. 별말씀을. 나는 슈라이든 1세! 아침 식사는 신선한 야채와 땅콩으로! 매일 정각 여섯 시에!”
“여섯 시…… 그 시간에는 사람이 온다는 말이겠네.”
그전까지 숨어 있다 돌아가야 한다는 뜻이었다. 파란 새를 따라온 길을 얼추 기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 열 시간 정도 남은 건가. 그때까지 사이좋게 지내도록 해요, 공작님.”
라실리아가 웃으며 말하자 슈라이든 1세가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 * *
레스칼이 잠에서 깨어난 건 한 시간쯤 뒤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틀 정도는 잤겠지만 마족의 피가 섞인 몸은 여러모로 인간의 것과 달랐다.
잠에서 깨어난 그는 즉시 황후를 찾았다. 자신이 잠들어 황후가 방으로 돌아갔다는 얘기를 듣고는 그림자 기사들도 대동하지 않은 채 곧장 황후궁으로 향했다.
레스칼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텅 빈 침실이었다.
황후궁에 배속된 근위대는 황후가 어디를, 언제, 어떻게 가게 됐는지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말 그대로 사라졌다.
“……믿을 수가 없네.”
뒤늦게 헐레벌떡 달려온 세르벤이 중얼거렸다.
리얀이 얼굴을 구긴 채 있는 힘껏 주먹을 움켜쥐었다.
“설마 또 이러는 건가? 마음을 고쳐먹은 게 아니었어?”
그 주먹으로 누구든 팰 기세였다.
“이건 폐하 입장에서는 고문이나 다를 바 없다고! 그 여자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세르벤이 당황해 근위대를 돌아보며 리얀의 입을 막기 전이었다.
퍽!
소파 하나가 쓰러졌다.
방금 전까지 일인용 소파에 멀쩡히 달려 있던 팔걸이가 뜯겨나간 채 레스칼의 손에 들려 있었다.
“찾아와.”
레스칼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황후의 침실 안을 울렸다.
“지금, 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