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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동침을 안전하게 거절하는 법 (2)
2022.09.25.



“일단 식사를 하고 싶습니다.”

겉으로는 침착해 보였지만 라실리아의 머릿속은 지진이 난 상태였다.


‘접촉이라는 건 블루문일 때 필요한 거잖아. 그럼 오늘은 아직 그런 건 아니지 않을까. 낮에도 그냥 입술만 대고 갔잖아. 접촉이 꼭 필요하다면 그랬을까? ……그래, 그러니까 오늘은 아니야.’

물론 자신이 하지 말라며 밀쳐 내긴 했다.


‘아닐 거야……. 분명히 저녁 때 보자고 했잖아. 동침…… 그러니까 접촉이 필요했다면 밤에 보자고 했겠지. 그렇지 않아?’

레스칼은 저녁 식사를 의미하긴 했다. 그걸 괜히 지금 같은 분위기로 바꿔 놓은 것은, 라실리아가 아무것도 모르고 골라 든 첫날밤 잠옷이었다. 라실리아가 그 점을 까맣게 모르고 있다는 게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래. 침착하자. 오늘은 아니야. ……응, 정말 아니야.’

“그렇다면.”

라실리아의 머릿속에서 무슨 생각이 오갈지 하나도 모르고 있을 레스칼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까지는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

황후가 기억상실에 걸린 뒤부터 레스칼은 이상하게도 황후가 하는 말을 잘 듣고 있었다. 레스칼이 스스로도 아직 인지하지 못하는 변화였다.


“여기 앉도록.”

레스칼이 식탁 앞의 의자를 뺐다.

팔을 움직이는 바람에 페르손이 절묘하게 노출 정도를 맞춘 가운이 흐트러져 가슴팍이 얼핏 드러났다.

라실리아가 당황해 저도 모르게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왜 그러지?”

라실리아는 애써 시선을 허공에 고정시킨 채 답했다.


“원래 그렇게 허술한 차림새로 식사를 하십니까?”

“…….”

레스칼이 잠깐 굳었다.


“마음에 안 드나?”

“기억을 잃어 모든 게 낯설군요. 식사하기에 그리 좋은 차림새가 아닐 것 같아 물었습니다.”

“…….”

레스칼이 또 잠깐 굳었다.


“썩 편하진 않을지도.”

“그러니까요.”

“하지만 동침을 할 땐 편할 텐데. 이것 말고는 더 이상 벗길 게 없으니.”

“무슨, ……!”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오늘은 아니긴 뭐가 아냐. 너무나도 그런 거였잖아.’

이번에는 라실리아가 굳었다.

아무 말이 없는 라실리아를 바라보던 레스칼이 고맙게도 이런 말을 했다.


“갈아입으면 되겠나?”

“지금, 말입니까?”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면.”

기회였다.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네.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렇군.”

끼이익.

레스칼이 의자를 마저 뺐다.


“앉아서 기다리고 있어.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네.”

하지만 금방이라도 나가서 시종장을 어떻게 할 것만 같았던 레스칼은 의자 등받이에 손을 댄 채 가만히 있었다.


“……?”

“와서 앉도록.”

“아…….”

라실리아가 긴장된 걸음을 천천히 옮겼다.

스륵.

라실리아가 마침내 의자에 앉는 것을 보고 레스칼이 천천히 의자를 앞으로 밀어 주었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의자를 밀어 주는 동안 고개를 기울여 머리칼에 대고 숨을 들이쉬었다. 라실리아는 낮에 그가 한 짓을 떠올리며 흠칫 몸을 옆으로 피했다.

레스칼이 작게 중얼거렸다.


“……어떻게 알았지. 몸에 닿지도 않았는데.”

“…….”

그러니까 저 말은, 아까처럼 냄새를 맡다가 몸 어딘가에 입술을 대려고 했는데 그전에 라실리아가 알아차렸다는 뜻 같았다.


‘뭐야, 대체. 사이가 안 좋을 텐데.’

지금 황제가 하는 짓을 보면 조금도 그런 느낌이 아니었다.

남녀 간에 벌어지는 일에 무지한 건 라실리아도 마찬가지였지만, 적어도 틈만 나면 몸에 닿고 싶어 하는 저런 습관이 사이가 안 좋다는 말과는 정반대라는 것 정도는 알았다.


‘왜 저렇게 안달복달하는 것 같지. 신전 마당에서 키우던 개처럼.’

강아지라 하기에 엘리아든의 황제는 너무 크고 눈부셨지만, 어쨌거나 하는 짓은 조금 닮은 구석이 있었다.

목줄을 묶어 마당에 놔둔 개는 라실리아가 지나갈 때마다 끙끙대며 달려들려고 안달을 했다. 한 번 안아 주면 온몸을 핥아대고 꼬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흔들어 댔다.


“……아니, 그래도 역시 하고 싶어.”

이런 말을 작게 내뱉은 황제가 고개를 옆으로 숙여 라실리아의 뺨에 재빨리 입을 맞췄다.


“흣,”

라실리아가 휙 머리를 젖혔지만 늦은 일이었다. 뺨에는 따스하다 못해 뜨거운 입술의 감촉이 남았다.


“그럼 다녀오겠다.”

황제가 몸에 닿으면 입술만큼이나 뜨거울 것 같은 시선으로 저를 바라보다 미적미적 몸을 돌렸다.


“……. 안 되겠어!”

황제가 자리를 뜨자마자 라실리아가 벌떡 일어섰다. 손이 저도 모르게 입술이 닿았던 뺨을 마구 문질러 대는 중이었다.

싫고 좋다는 판단을 떠나 그 낯선 감촉은 너무 뜨거웠다. 라실리아는 이런 걸 한 번도 겪어 본 적이 없었고, 그래서 혼란스러웠다.

정체를 알게 되면 자신을 죽일지도 모르는 남자가 자신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게 두려웠다.


“여기 더 있으면 안 돼.”

생각은 나중이었다.

지금은 이 자리를 피하는 게 우선이었다.

다시 보니 이 방이 이렇게 어둑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등유 대신 촛불만 켜 놓은 아늑한 방은 볼에 하는 키스보다 더 끈적하고 농밀한 것을 암시하고 있었다.

방금 황제가 사라진 문을 향하던 라실리아가 걸음을 뚝 멈췄다.

생각해 보니 지키는 사람이 없을 리 없었다. 방금 전에도 황후궁에 그 많은 근위대를 보냈던 황제였다.

달칵, 쿵!

반대편으로 몸을 돌린 라실리아는 창문을 열었다. 황후의 침실이 그렇듯, 황제의 침실에도 턱이 있을 것이다. 그림자 기사가 창문으로 오갔으니 자신도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없어.”

하지만 당황스럽게도 황제의 침실 창은 돌출된 창틀이나 장식 하나 없이 매끄럽기만 했다. 벽이 촘촘히 조각되어 있긴 했지만 발을 디딜 만한 곳은 없었다.


“어쩌지?”

라실리아가 창백해진 얼굴로 당혹을 내뱉는 순간이었다.


“구구! 구구!”

“까아옥!”

이제는 생김새를 알 것 같은 새들이 날아왔다.


“설마…… 일부러 와 준 거니?”

-온다, 온다. 우리는 온다. 부르시면 온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새들은 말을 할 뿐만 아니라 자신을 돕고 있었다.


“이 자리를 벗어나야 해. 그런데 문은 사람들이 지키고 있을 것 같아. 혹시 다른 길은 없을까?”

미친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라실리아는 새들에게 물었다.


-없어, 없어. 인간은 날개가 없어.

-여긴 높아, 높아. 인간은 떨어져, 떨어져.

“그럼…… 반대로 황제가 못 오게 하는 방법은 없을까?”

-없어, 없어.

-우리는 못 해, 못 해. 죽을 거야.

-네, 네. 황제, 성격 나빠. 나빠.

라실리아가 다급히 말을 이었다.


“지금 황제와 단둘이 있으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래. 잠깐 숨어 있거나…… 단둘이 있지만 않으면 돼.”

-……?

새들이 고개를 갸웃대다 서로 눈짓을 주고받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럼 있어, 있어.

푸드득!

윤기가 자르르 도는 까만 깃털을 가진 새가 훌쩍 날아갔다. 잠시 허공으로 사라진 새가 가져온 것은 수상할 정도로 빨간 열매였다.

톡.

새가 그것을 라실리아의 손 옆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먹으면 자. 잠이 들어.

-그럼 단둘이 있어도 혼자 있는 거야.

라실리아가 활짝 웃었다.


“맞아. 너희들, 정말 똑똑하구나. 그래, 이거면 되겠어.”

칭찬이 기쁜지 새들이 우쭐우쭐 꼬리 깃털을 흔들었다.


-기뻐, 기뻐.

-고마워, 고마워.

-부르시면 우리 온다, 온다.

새들은 기특한 말을 남기고 떠났다.

라실리아가 창문을 닫고 식탁으로 돌아가 과일 접시에 까만 새가 가져온 열매를 자연스럽게 섞었을 때, 황제가 돌아왔다.


“오래 걸리지 않았지? 말한 대로.”

그러면서 들어서는 황제는 눈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각을 맞춘 성장을 하고 있었다.

좀 전까지는 자연스럽게 이마를 덮었던 앞머리가 말끔히 뒤로 넘어갔다. 소매에는 보석 커프스를, 성장 위에 걸치는 실내용 망토에는 색을 맞춰 팬던트를 늘어트렸다.


‘눈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모르겠네.’

라실리아는 완전히 달라진 황제의 모습에 눈을 깜박댔다.


‘왠지 부담스러워.’

낮에 봤을 때도 저 정도로 화려한 차림새를 하진 않았다. 방금 전까지는 개 같던 황제가 이제는 한껏 꼬리를 세운 공작새 같았다.


“아니면, 오래 걸렸나?”

황제가 맞은편의 의자를 훅 잡아 뽑더니, 앉으려다 말고 의자를 끌어와 라실리아의 옆에 앉았다.


“……아니요.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당연하지. 서둘렀으니까. 말한 대로.”

“…….”

그래서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

라실리아는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부담스러운 얼굴에서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그런데 왜 옆에 앉으신 겁니까?”

“……. 맞은편에 앉으면 거리가 머니까.”

“옆에 앉으면 식사하기가 어려울 텐데요.”

그 말에 황제가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그럴지도.”

“그럼 맞은편으로 가세요.”

“그건 됐어.”

뭐가 됐다는 걸까.


“이대로 앉겠다는 말입니까?”

“불편해도 괜찮을 것 같아서. 감당하겠다.”

“…….”

이제 황제는 공작새가 아니라 화려한 개처럼 느껴졌다.


“그럼 식사를 하지.”

“…….”

정말 이상한 인간이었다.


‘황후와 사이가 안 좋다고 했던 건 뜬소문이었나. ……아니, 그렇지 않아. 파샤드 후작 부인의 반응을 보면 사이가 나빴던 게 확실해.’

결국 황제가 감정과는 상관없이 다른 태도를 취하기 시작했다는 뜻이었다.


‘시차 때문이겠지. 블루문이 다가온다고 했으니까. 황제는 접촉을 하기 위해 필사적인 거야.’

처음으로 황제에게 두려움이 아닌 다른 감정이 느껴졌다. 이름을 붙이자면 연민이 될 것이다.

하지만 연민과는 별개로, 자신이 진짜 운명의 반려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을 때 문제는 매우 심각할 것이다.


“제가 음식을 담아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저 열매를 먹여야 했다.

라실리아가 제 앞에 놓인 빈 접시를 들어 음식들을 담았다. 골고루 담는 척하면서 새가 가져다준 열매도 잊지 않았다.


“그건 빼도록.”

하지만 열매를 먹이는 일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라실리아가 열매를 손에 든 채 눈으로 이유를 물었다.


“처음 보는 과일이다. 그런 건 먹지 않도록 되어 있어.”

“아……. 황실의 법도입니까?”

“어떤 게 들어 있을지 모르니.”

황족이니 음식에 까다로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안 먹으면 곤란한데.’

잠시 생각을 하던 라실리아는 어쨌거나 지금은 자신도 황족이라는 점을 떠올렸다.


“그럼 제가 먹어 보겠습니다.”

“안 먹는 게 좋을 텐데.”

“조금만요. 제가 먹고 괜찮다면 폐하께서도 드실 수 있지 않을까요?”

그때 레스칼이 라실리아의 손에서 열매를 가로챘다.


“그 반대로 하지.”

“네?”

“내가 먼저 맛을 보고, 괜찮으면 그대가 먹는 걸로.”

방금 전 모르는 건 안 먹는다고 했던 황제가 손톱만 한 크기의 새빨간 열매를 입에 넣었다.


‘과연…….’

라실리아는 마른침을 삼키며, 열매를 씹어 삼키는 황제를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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