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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동침을 안전하게 거절하는 법 (1) (6/96)


6. 동침을 안전하게 거절하는 법 (1)
2022.09.21.



 
맹세해도 좋았다. 레스칼이 저렇게 웃는 건 결코 본 적이 없었다.

레스칼과 가장 가까운 그림자 기사들조차 본 적이 없었으니 다른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폐하. 기분이…… 좋으신 겁니까?”

세르벤이 얼떨떨한 얼굴로 물었다.


“기분이 좋으냐고? 그런 걸 왜 묻나.”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레스칼 본인조차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자신이 웃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야 기분이 좋아 보이시니까요.”

“그런지는 딱히 모르겠는데.”

“아……. 그러시군요.”

누가 봐도 기분 좋은 얼굴을 하고 있는 레스칼이 그런 말을 하자 그림자 기사들이 애써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잠옷을 입으신 게 왜 기억상실과 연관이 있다는 말인데?”

잠시 후 어색함을 털어낸 세르벤이 물었다. 리얀은 딴 얘기가 반가웠는지 냉큼 입을 열었다.


“네가 어떤 사람하고 사이가 더럽게 나쁘다고 쳐. 하지만 안 볼 수도 없고, 계속 그대로 지낼 수도 없어. 그럼 어떻게 할래?”

“흠……. 뭐, 일단은 대화를 해 보려고 하지 않을까.”

“만약 네가 더럽게도 꼬인 성격이라서 차마 그런 말을 못 하는 경우라면?”

“음? 그런 사람도 있어?”

“있지, 우리 황후 폐하.”

“아……. 아!”

뭔가 알았다는 듯, 세르벤이 제 손을 탁 쳤다.


“관계를 바꾸고 싶은데, 먼저 나서서 잘못했다, 앞으로 잘 해보자 이런 말은 죽어도 못 하겠다면 말이야……. 아예 사이가 나쁜 적이 없었던 것처럼 시침을 딱 떼는 거지.”

“그래서 기억상실을 꺼내 드신 거로군.”

“아무래도 그런 게 아닐까 싶어.”

리얀이 레스칼을 향해 조금 짓궂게 웃었다.


“뭐, 황후 폐하의 심경 변화야 제가 짐작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 있지만 말입니다. 그래도 폐하와의 관계를 어떻게든 개선해 보려는 노력을 나름대로 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렇군.”

레스칼이 또 웃었다.

본인은 모르고 있겠지만, 두 기사의 눈에는 뚜렷이 보일 정도로.


“그러니까 폐하께서도 조금 노력을 해 보시는 게 어떨까요?”

“어떤 노력을?”

“음……. 다른 남편들처럼 꽃을 보내신다거나.”

세르벤이 끼어들었다.


“황후 폐하께서는 가데니아를 좋아하십니다.”

리얀이 놀라서 세르벤을 쳐다보았다.


“뭐? 그런 걸 어떻게 알고 있는데?”

“우연히. 작년 겨울에 황후궁의 궁인들이 가데니아 꽃을 못 구해서 난리가 났었거든.”

“난리? 누가 죽기라도 했어?”

“정원사가 셋이나 갈렸다고 들었어.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모르겠고.”

“그런 거라면 죽었다고 봐야지. ……예, 하여간 폐하. 가데니아요.”

놀랍게도 레스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

“알겠습니다, 폐하.”

냉큼 대답한 리얀이 세르벤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다녀와.”

“……오냐, 그래.”

평소 같으면 귀찮은 일을 떠밀지 말라며 일단 저항했을 세르벤이 오늘만큼은 토를 달지 않았다.

그러기엔 너무 중요한 날이었다.

* * *



“……뭐?”

라실리아는 방금 들은 말을 믿을 수 없어서 한 번 더 되물었다.


“접촉에 그런 의미가…… 있다고?”

“네, 황후 폐하.”

시녀들은 이유도 모른 채 황후의 눈치를 살폈다.

기억상실이 거짓말이라는 걸 뻔히 아는데 뭘 또 이렇게까지 모른 척을 하시냐는 생각을 할 법도 한데, 그러질 못했다.

지금 황후의 놀라는 얼굴은 너무 진심으로 보였다.


“그러니까 그게…… 기본적으로 부부 관계, 라는 말이고.”

“네, 황후 폐하.”

“그걸…… 그러니까 블루문에는……,”

“네, 황후 폐하.”

“…….”

라실리아가 결국 입을 다물었다.


‘엘리아든 황실에 마족의 피가 흐른다는 얘기가 사실이었나. 그냥 오래된 설화 같은 건 줄 알았는데.’

하긴, 그 금안은 마족의 피가 아니고서는 설명할 길이 없긴 했다.


‘그래서, 그랬던 거였어.’

낮에 황제가 침실로 찾아와 했던 짓이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그림자 기사 중 하나가 제 역할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될 거라는 협박을 한 이유도 알 수 있었다.


‘그럼 진짜 큰일인데.’

부부관계를 떠나 자신은 진짜 황후가 아니었다.

그러니 운명의 반려도 될 수 없었다. 갑자기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그 꿈……. 설마 내가 진짜가 아닌 것을 알아서…… 죽이는 건가.’

꿈속에서 자신은 필사적으로 사랑한다고 했다. 황제는 그런 사랑은 필요가 없다고 했다.

죽지 않기 위해서였다고 한다면 그 절박함이 이해되었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야.’

라실리아가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자신이 가짜라는 건 몹시 심각한 일이었다. 운명의 반려가 없이는 마족의 피를 다스리지 못한다고 했다. 서른 살 생일을 넘겨 황제가 완전히 마족으로 변이한다면, 그다음에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대체 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

블루문은 며칠 안에 뜰 것이라고 했다.

그 며칠 안에 방법을 찾아야 했다.

똑똑!


“황후 폐하. 황제 폐하께서 선물을 내리셨습니다!”

생각의 틈을,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파고들었다.


“뭐라고?”

“무슨 일이지?”

라실리아보다 시녀들이 더 놀라 웅성거렸다.

문이 양옆으로 열리고 어마어마한 양의 꽃이 세숫대야만큼 큰 화병에 담겨 줄줄이 들어왔다.


“세상에…….”

황제궁에서 보낸 시종들이 물러간 뒤 황후의 침실은 온통 꽃밭이 되었다. 가데니아 꽃의 진한 향기가 사람을 질식시킬 것 같아 궁인들이 재빨리 창문을 열어야 할 정도였다.


“너무나도 행복하시겠습니다, 황후 폐하.”

파샤드 후작 부인이 남의 속도 모르고 말을 건넸다.


“다른 꽃도 아니고, 황후 폐하께서 좋아하시는 꽃을 이렇게나 많이 보내시다니요. 이제껏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황제 폐하께서 드디어 황후 폐하를 연모하게 되었다는 뜻이 아닐는지요.”

라실리아는 이를 한 번 질끈 물고 난 뒤 입을 열었다.


“그건 말이 안 되는 것 같은데.”

“……네, 황후 폐하?”

“드디어 연모하게 되었다는 말을 쓰는 걸 보면 그동안은 연모하지 않았다는 말이지. 기억상실이 사람을 연모할 이유가 되지 못하듯이, 폐하께도 새삼 나를 연모할 이유가 없다. 꽃은 아마도 위로의 뜻이겠지.”

“그, 그게…….”

파샤드 후작 부인이 입술을 우물대며 말을 끝맺지 못했다.

그걸 보니 황제와 황후가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게 더 실감이 들었다.

그저 좋지 않았던 게 아니라 서로를 공공연히 감시하는 사이였다.


‘제국의 황제가 황후를 학대한다는 소문은 델라르타에도 있었어. 소문은 과장됐을지 모른다고 해도 문제가 있긴 했을 거야. 아까 그 기사가 그간 황후가 제 역할을 안 했다고 한 걸 보니 그게 학대를 불러왔을 수도 있겠네.’

대체 이유가 뭐였을까. 황제와 황후는 어떤 부부였던 걸까.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 와중에 시간은 저녁을 향해 착실히 흘러갔다.

* * *

황제궁의 시종장 페르손 백작은 몹시 유능한 자였다.

두 그림자 기사에 가려져 존재감은 미미했지만 제 역할을 확실히 하는 자였다.

그 역시 기사들보다 조금 늦긴 했지만 황후가 황제를 찾아올 것이라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황제가 황후에게 정원의 가데니아 꽃을 전부 따서 보내게 했다는 사실도 물론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정원사들을 미친 듯이 부렸던 게 바로 그였다.

하여간 그래서 사 년 만의 첫 동침이 이루어질지도 모르는 오늘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황제의 침실에는 수십 개의 초를 밝혀 두었고, 창문에는 모두 커튼을 내렸다.

아예 식탁을 하나 옮겨 와 두 분이 드실 음식을 차렸고 황궁에서 가장 달콤한 맛을 내는 포도주를 올려 두었다.

무엇보다 공을 들인 것은 황제의 의상이었다.

황후 폐하께서 첫날밤에 입지 못하셨던 잠옷을 입으셨다 하셨으니 마땅히 황제도 비슷하게 입어야 했다.

애석하게도 첫날밤에 입기 위해 따로 지은 잠옷은 없었다. 하지만 새 잠옷이라면 발에 치일 만큼 많았다.

몇십 벌의 잠옷을 늘어 두고 고민고민하던 페르손은 잠옷 대신 나이트가운을 권하기로 했다.

그 휘황찬란한 금안과 금발을 살리기 위해서 가운은 반드시 검은색이어야 했다.

자수가 들어가되 금사는 너무 과할 수도 있으니 은사로 해야 했다. 무늬는 너무 크지 않게, 그러나 너무 수수해서도 안 되었다.

고심 끝에 고른 나이트가운에 페르손은 가데니아 꽃을 원료로 한 향수를 뿌렸다.

맨몸 위에 가운을 입으시라고 하자 레스칼이 제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크흠, 큼. 아주 보기 좋으실 겁니다, 폐하.”

페르손은 이 황궁 안에서 제 미적 감각을 따라올 자가 없다고 자부하는 인물이었다.


“침실 안의 은은하고 관능적인 분위기와 어우러져 황후 폐하께서는 오늘 밤 다른 곳에서 주무시고 싶어지지 않으실 겁니다.”

“……그렇다면.”

결국 레스칼은 가운 안에 팔을 집어넣었다.


 
적당히 느슨하게, 그러나 절대로 의도한 것처럼은 보이지 않게 가운 끈을 돌려 묶은 페르손이 궁인들을 대신해 직접 레스칼의 머리를 손질했다.


“오늘은 앞머리를 내리시는 게 좋겠습니다, 폐하.”

“알아서 해.”

허락이 떨어지자 페르손의 손이 날쌔게 움직였다. 자칫 콧노래가 나올 것 같아 페르손은 이를 악물고 정중한 표정을 유지했다.


“다 됐습니다, 폐하.”

손을 떼면서도 페르손은 자신이 지금 갓 완성한 모습에 한없는 자부심을 느꼈다.


“황후 폐하께서 틀림없이 반하게 되실 겁니다.”

황후 폐하의 성격이 개차반인 것은 페르손도 알았다. 하지만 아무리 배배 꼬이고 비틀린 여인이더라도 저 눈부신 미모에는 마음이 녹을 수밖에 없었고, 또 반드시 그래야 했다.

이대로 황제의 서른 살 생신을 맞이할 수는 없었으니까.

황제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기에 이제껏 방치해 두다시피 한 부부관계를 회복하려고 애쓰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제 한 몸 불살라 거드는 것이 도리였다.

하지만 이어서 레스칼이 툭 내뱉는 말은 페르손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만일 황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면 네가 책임져라.”

“허, 헛……. 폐. 폐하…….”

파랗게 질리는 페르손에게서 무심하게 고개를 돌린 레스칼이 벽시계를 쳐다보았다.

곧 황후가 올 시간이었다.

* * *

피할 방법은 없었다.

사실 어딘가 숨어 있을까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황제는 집요하게도 미리 사람을 보내 침실에서 이어지는 통로에 빈틈없이 세워 두었다.


“황후 폐하. 시간이 되었사옵니다.”

“…….”

라실리아는 황제궁의 시종장이라고 하는 키 작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황후궁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남은 시간을 초단위로 재고 있는 게, 반드시 황후를 황제의 앞으로 끌고 가겠다는 의지가 다부진 표정에서 느껴졌다.


‘그간 매번 거부해 왔다니 이럴 만도 하겠지. ……피할 수는 없겠어.’

할 수 없었다.

황제를 대면하는 일을 피할 수 없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라실리아는 마른침을 삼킨 뒤 고개를 끄덕였다.


“안내하도록.”

“예, 황후 폐하.”

시녀들과 시종들, 황실의 근위대가 라실리아를 앞 뒤 옆으로 에워싼 채 황제궁으로 향했다.

인원이 어찌나 많은지 누가 보면 황제를 만나러 가는 게 아니라 어디 전쟁이라도 치르러 가는 줄 알았을 것이다.

타악.

어쨌거나 황제궁에 도착했고, 서로 주고받아야 할 예법도 주고받았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물러간 뒤 등 뒤로 문이 닫혔다.


“…….”

라실리아는 예언자의 방보다 더욱 어둑한 황제의 침실이 어쩐지 답답하다고 느꼈다. 다른 곳에 비하면 몇 배나 무거운 공기가 제 온몸을 납작하게 누르는 것 같았다.

그 가운데 가장 묵직한 존재감을 지닌 남자가 이 어둑한 곳에서도 저 혼자서 반짝이는 금발을 쓸어 올리며 자신을 향해 입술을 열었다.


“그럼 이제,”

“…….”

“뭘 하면 좋을지 말해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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