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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잠옷의 의미 (5/96)


5. 잠옷의 의미
2022.09.18.



 


“이, 이건…….”

라실리아가 골라 든 것은 얄궂게도 잠옷이었다.

결혼식 첫날밤에 입도록 화려하게 지어진 잠옷이라 엘리아든의 복식에 익숙하지 않은 라실리아에게는 그저 조금 편할 뿐, 보통의 드레스처럼 보였다.

물론 그 잠옷이 입혀진 일은 없었다.

황후와 황제가 동침한 일은 이제껏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다. 첫날밤을 위해 공을 들여 지은 잠옷은 새 옷으로 남아 옷걸이에 고이 걸려 있을 뿐이었다.


“저, 정말이옵니까?”

시녀들이 미친 듯이 눈짓을 주고받았다.

라실리아가 자신이 고른 옷을 살피느라 그걸 놓친 게 유감이었다.


“응. 이게 제일 마음에 들어.”

“그, 그런…… 그, 그렇다면.”

당연한 말이었지만, 시녀들조차 황후의 기억상실이 진짜라고 믿지 않았다.

황후가 이제껏 갖다 붙였던 온갖 병명이 사실은 다 거짓이었음을 가장 잘 아는 이들도 시녀들이었다. 목숨이 귀하니 필사적으로 장단을 맞추고 있는 것에 불과했다.

시녀들은 황후가 기억상실에 걸려 잠옷도 못 알아볼 거라는 의심 따위는 추호도 하지 않았다.


“알겠나이다, 황후 폐하. 고르신 옷에 맞춰 단장을 해 드리겠나이다. 이리 앉으소서.”

“그래.”

라실리아는 시녀들이 가리키는 대로 화장대 앞에 앉았다.

시녀들의 눈짓에 따라 궁인들이 들러붙어 빗질을 시작했다.

잠옷이니 화장이 화려할 이유도, 머리를 공들여 땋을 필요도 없었다.

라실리아의 긴 머리를 고이 빗겨 놓은 궁인들은 머리칼을 반만 모아 느슨하게 묶은 다음 보석 핀을 하나 꽂았다.


“부족한 점은 없는지요, 황후 폐하.”

궁인들이 손을 떼고 나자 파샤드 후작 부인이 화장대 옆으로 다가서서 물었다.

단언컨대 그런 건 없었다.

옅은 복숭아색 실크에 반짝대는 은사를 섞어 촘촘하게 수를 놓은 드레스는 옷걸이에 걸렸을 때보다 입었을 때가 훨씬 더 아름다웠다.

늘 엇비슷한 예언자복만 입고 지냈던 라실리아에게는 살갗에 매끈하게 휘감기는 실크의 감촉부터 사치였다.


“너무 예쁘게 보이는 거 아닐까.”

라실리아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야 어떤 모습으로 계셔도 아름다우시니까요.”

파샤드 후작 부인의 말에 라실리아의 뺨이 조금 붉어졌다.

거울을 보고 예쁘니 어쩌니 중얼거렸으니 제 얼굴을 자화자찬하는 사람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건 황후한테 하는 말이었는데.’

희한하게도 이 아름다운 얼굴에 참지 못할 정도로 괴리감이 드는 건 아니었다.

어쩌면 머리 모양이 비슷해서일지도 몰랐다. 라실리아도 황후처럼 긴 검은 머리를 하고 있었다. 제 얼굴은 황후처럼 아름답지 않았겠지만 그 외에는 조금 비슷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딱히 키가 크거나 작아진 느낌도 없었고 체형이 크게 다르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기왕이면 동정심이라도 자아내게 아주 아픈 사람처럼 보였으면 싶지만…… 이 얼굴로는 이게 최선일 거야. 드레스도 이 중에서는 가장 수수한 거잖아.’

라실리아가 후작 부인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됐어. 다들 수고했다.”

“화, 황후 폐……,”

수고했다는 말을 들은 시녀와 궁인들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별일이 없었다면 라실리아조차 그 반응이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구구, 구구구!

츠츠츳!

까악!

그러나 별일이 생겼다.

창밖에서 새들이 난리를 피워 대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힐끗 보이는 깃털 색깔이 오늘 아침의 그 말하는 새들하고 비슷했다.

라실리아가 벌떡 일어나서 창가로 향했다.

몸단장을 다 마친 황후가 창문을 여는 것을 본 시녀들이 입만 딱 벌린 채 어쩔 줄 몰라 했다.

덜컥, 끼이익!

라실리아가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보게 된 것은, 꽤나 이상한 광경이었다.


“……윽, 이 미친 새들이! 저리 좀 가!”

비좁은 창틀이 무색하게 사뿐히 엉덩이를 걸치고 있던 누군가에게 새들이 달려들고 있었다.

그 누군가는 낮에 보았던 황제의 두 기사 중 하나였다.


“그만해.”

일단 라실리아가 새들을 말렸다. 저러다 아래로 떨어지지 않을까 싶었다.

생각에 앞서 자연스럽게 말이 나갔고, 새들은 그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하던 짓을 뚝 멈추었다.


“……이런. 감사합니다, 황후 폐하. 이런 자비를 베풀어 주실 줄은 몰랐는데요.”

붉은 기가 감도는 금발을 짧게 잘라 시원하게 귓불을 드러낸 기사는 이렇게 보니 굉장히 인상적인 미인이었다.

낮에 봤을 때는 황제의 미친 외모에 가려져 생김새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게 누구든, 제 방 창문을 열자 사람이 보였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내 방에 볼일이 있었나 보군.”

이름이 리얀이라고 했던 기사가 웃음으로 난처함을 지웠다.


“그리고 이렇게 들킬 줄도 몰랐습니다. 갑자기 미친 새들이 소리를 질러 댈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에이, 들키면 안 되는 일이었는데.”

“…….”

미인의 넉살 좋은 웃음은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었지만, 잠깐만 생각하면 소름이 끼치는 일이었다.


‘날 감시하고 있었던 거야. ……기억상실이 거짓인지 아닌지 알아내려고.’

라실리아가 흐트러지려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잠시라도 방심하면 안 되겠어.’

마음이 통한 것처럼 새들은 뾰족해진 눈으로 계속 리얀을 쳐다보았다. 금방이라도 다시 덤벼들 것 같은 분위기였다.


“새들이 미친 게 아니라, 있지 말아야 할 곳에 있는 사람이 문제였을 테지.”

“으음……. 뭐, 틀린 말은 아니군요. 그래서 어떻게 하고 싶으십니까?”

리얀이 웃음을 지우고 물었다.


“적당한 선이라면 처벌을 받아들이겠습니다. 들킨 건 제 실수가 맞으니까요.”

덩달아 라실리아의 표정도 굳었다.

감시하던 것을 들킨 사람치고 너무 당당했다. 게다가 감시하던 게 잘못이 아니라 들킨 것을 실수라고 했다.


“잘못한 일은 하나도 없다는 식이로군.”

“에이,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황후 폐하께서도 황후궁을 살피는 눈이 없을 거라는 순진한 생각은 하지 않으셨을 텐데요. 하지만 제 칼을 걸고 말씀드리는데, 살피는 눈이 있어 봤자 황후 폐하께서 평소에 폐하께 하는 것에 비하면 절반도 안 되는 수준일 겁니다.”

“…….”

그 말이 맞다면 황제는 황후를, 황후도 황제를 서로서로 감시하고 살았다는 의미였다.


‘대체 왜. 그렇게나 서로를 믿지 못하겠다면 혼인은 왜 한 걸까.’

알면 알수록 이상한 곳이었다.


“그런데 뭐 하나 여쭤도 됩니까?”

리얀이 뜬금없이 제 옷을 가리켰다.


“제가 여기서 듣기로는 이따 저녁의 만남을 위해 옷을 갈아입으신 듯한데…… 그걸 입고 가시겠다는 겁니까?”

“내 차림새를 따져 묻는 이유가 더 궁금하군. 황제의 호위기사가 하는 일은 원래 그런 것인가?”

“아니요, 그게 아니라…….”

리얀은 중간에 한 번 말을 끊었다.


“……음, 무슨 이유로 마음을 바꾸신 건지 궁금해서요.”

“마음을 바꾸다니?”

“이제 접촉을 허용하시겠다는 뜻 아닙니까. 갑자기 달라지신 이유가 뭡니까?”

“접촉……?”

라실리아는 리얀이 하는 말을 조금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게 무슨 의미지?”

“아, 이런. 설마 접촉에 대한 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실 참입니까?”

“말했듯이, 나는 기억을 잃었다. 무엇도 기억하지 못해.”

“흐음…….”

리얀이 찌르는 것 같은 눈으로 라실리아의 표정 구석구석을 살폈다.

그러더니 갑자기 씨익 웃었다.


“뭐, 그것도 나쁘지 않겠습니다. 무엇보다 폐하께서도 달라지신 것 같으니까.”

리얀이 고개를 쑥 빼 들어 라실리아의 귓가에 입술을 갖다 대고 속삭였다.


“잘 들으세요, 황후 폐하. 저는 이유야 어쨌든 황후 폐하께서 마음을 고쳐먹으셨다면 대환영입니다. 그간 한 짓은 깨끗하게 잊어 드릴 테니 이제라도 제 역할을 다해 주시기 바랍니다.”

라실리아 말고는 아무도 들을 수 없는 뒷말이 빠르게 이어졌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저 사기극이라면, 내 칼을 걸고 맹세하는데 황후 폐하께서는 반드시 대가를 치르시게 될 겁니다.”

뒷말은 명백한 협박이었다.


 
할 말을 마친 리얀이 재빠르게 몸을 떼어 냈다.


“그럼 이만 물러가겠나이다.”

휘익, 탓!

리얀이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아래층 테라스 난간을 발끝으로 찍고는 그 반동을 이용해 다시 아래로 내려갔다.

뭘 어떻게 해 보기에는 너무 신속한 동작이었다.


-나쁜 사람, 나쁜 사람!

-혼내 줘, 혼내 줘!

하지만 새들은 할 수 있었다. 언짢아하는 표정을 읽기라도 한 듯, 새들이 날쌔게 리얀의 뒤를 쫓아갔다.


“아악! 이 미친 새들! 그만하지 못해!”

두 손으로 난간을 잡은 터라 리얀은 고스란히 새들에게 쪼여야 했다. 차분했던 머리가 엉망이 되었다. 리얀은 순식간에 까치집이 된 머리를 한 채 사라졌다.


“…….”

리얀이 사라진 자리를 보고 있던 라실리아가 마침내 창가에서 몸을 돌렸다.

확실히 이곳은 이상했다.

새들이 말을 하는 게 확실할 뿐 아니라, 제 편을 들고 있었다.


‘아, 내 편이 아니라 황후의 편을 드는 건가? 이 새들은 황후에게 속해 있는 존재였던 걸까?’

또다시 알 수 없는 일이 늘어났다.

그중에서도 가장 라실리아를 괴롭히는 일은, 접촉이었다.


“황후 폐하. 괜찮으시온지요.”

파샤드 후작 부인이 조심스레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차를 대령할까요? 아니면 악사나 시인을……,”

“그건 괜찮아. 대신 묻고 싶은 게 있다.”

“말씀하시옵소서, 황후 폐하.”

공손히 고개를 숙이는 후작 부인에게 라실리아가 물었다.


“접촉이란 게 대체 무슨 의미지?”

 

* * *



“기가 막힌 소식이야!”

리얀이 흥분해서 황제의 집무실로 뛰어들었다. 이번에도 정식 문이 아닌 창문을 이용한 출입이었다.

리얀의 말에 의하면 종종 그게 더 빠를 때가 있다고 했다.


“쉿. 폐하께서 아직 주무셔.”

“회복 중이시잖아. 이럴 땐 아무리 큰 소리가 들려도 안 깨어나셔. 아니, 내 말 못 들었어? 끝내주는 소식이 있다니까.”

리얀은 창문을 닫자마자 세르벤의 어깨를 와락 움켜쥐고 말했다. 쌍둥이 여동생이 얼마나 흥분했는지 안 세르벤도 덩달아 설레기 시작했다.

저런 표정이면 나쁜 소식은 아닐 것이다. 황후가 진짜라는 증거를 찾은 것인지도 몰랐다.


“뭔데? 빨리 말해.”

“오늘 저녁을 위해 황후 폐하께서 옷을 갈아입으셨지. 뭘 입으셨는지 맞춰 봐.”

“아니, 그러지 말고 그냥 말해 줘. 내가 그런 데 소질이 없는 걸 알잖아.”

“잠옷.”

리얀은 사실 세르벤을 좀 더 애태우고 싶었지만, 그러자니 입이 너무 근질대서 참지 못했다.


“잠옷? 그건 낮에도 입고 계셨잖아.”

“그게 아니라 첫날밤에 입는 잠옷을 꺼내 입으셨어.”

“어…… 뭐라고?”

세르벤이 잠시 눈을 끔벅댔다.


“그게 그러니까……,”

대답은 두 사람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나와 동침을 하겠다는 뜻인가?”

레스칼이었다.


“폐하!”

어느새 눈을 떴는지 소파에 앉은 자세로, 레스칼이 천천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기대되는군. 오늘 저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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