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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접촉 (4/96)


4. 접촉
2022.09.14.



 


‘믿을 수가 없어…….’

라실리아는 거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벌써 삼십 분째였다.

거울 속의 여인, 카르타헤나 황후는 아름다웠다.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아름다움을 끌어와 정성을 다해 빚어낸 사람 같았다.

풍성하고 매끄러운 검은 머리와 대리석 같은 피부에 아이올라이트처럼 선명한 보랏빛 눈이 더해지자 비현실적인 미모가 만들어졌다. 하다못해 귓불과 손톱 같은 곳도 다 예뻤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꿈에서 본 그 여자야. 그 여자가 제국의 황후였어.

가슴에서 피를 흘린 채 죽어 가던 여자가 거울 속에 있었다. 이제는 그 얼굴이 제 얼굴이라고 했다.

몇 차례고 거듭 심호흡을 하고 난 후에야 라실리아는 이 말도 안 되는 현실을 받아들였다.

자신은 황후가 되었다.


‘그럼 그 꿈은…… 예언일지도 몰라.’

진짜 황후가 죽었다는 말은 없었다. 그러니 황후의 죽음은 아직 벌어지지 않은, 미래에서 벌어질 일이었다.

황후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황제 앞에서 죽어 갔다.

황제는 그 모습을 아무런 감흥 없이 지켜보았다. 황후는 애절하게 사랑을 말했지만 황제는 소름이 끼치도록 무심했다.


‘내가 황제를 사랑하게 되고…… 그렇게 죽을 거라는 말일까.’

칼에 찔리지 않은 가슴이 섬뜩해졌다.

라실리아가 눈을 질끈 감고 가슴을 문질렀다.


‘아니. 그렇게 죽을 수는 없어.’

플로타의 배신으로 죽은 자신에게는 가장 끔찍한 죽음일 것이다.

배신하기 전까지 플로타는 이 세상에서 라실리아에게 가장 가까운 존재였다. 가장 깊은 정을 준 사람이 자신을 죽였다.

다른 사람으로 태어나서도 같은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면 너무 비참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여기를 벗어나자. 어떻게 해서든.’

되살아났다고 해서 자신이 다른 사람이 된 것은 아니었다. 라실리아가 생각하는 자신은 여전히 예언자였다.

예언자는 신을 대신해 세상의 틀어진 일들을 바로잡는 사람이었다.

리카르도 왕제의 반역은 그런 것 중 하나였다. 신께서 왕제의 반역을 보여 주셨으니 자신에게는 그것을 막아야 할 의무가 있었다.


‘델라르타로 돌아가야 해. 시간이 지났으니 리카르도 왕제는 벌써 반역을 일으켰을 거야. 왕은 죽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내게는 그 반역을 되돌릴 수단이 있어.’

예언자가 실재하는 나라인 델라르타에서는 다음 왕 또한 예언자의 꿈에 나타나야 했다.

리카르도 왕제가 반역이라는 수를 썼어도 신께서 그를 왕으로 인정했다면 마땅히 라실리아를 통해 왕이 된 리카르도의 모습을 보여 주었을 것이다.

라실리아가 그런 적이 없다고 하면 리카르도는 대관식을 치를 수 없었다.

문제는 델라르타로 돌아가기 위한 방법이었다.


‘황후가 갑자기 교류도 없는 작고 먼 왕국으로 간다고 하면 아무래도 이상하겠지.’

라실리아는 눈을 감은 채 오래도록 생각을 이었다.


‘만일 내가 예언자라는 걸 말한다면? ……아니, 그건 너무 위험해. 그리고 아무도 믿지 않을 거야. 그럼 대체 어떻게…… 아!’

라실리아가 눈을 반짝 떴다.

방법이 있었다. 자신을 믿게 할 방법은 아니었지만, 델라르타로 갈 수 있는 방법이.


“어쨌거나 황후는 기억을 잃은 거잖아.”

그러니 황후가 해야 할 일은 기억을 되찾기 위한 노력일 것이다.

델라르타의 신전은 치유의 기도로 돈을 벌었다. 실제로 치유의 능력을 가진 신관들은 많지 않았지만, 기도의 효과는 분명히 있었다.


“기도를 받는다고 해 보자.”

마침 황제는 저녁 때 다시 보자는 말을 남겼다.

어떻게든 거절할 생각이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기회로 삼아야 했다.

기억을 되찾기 위해 치유의 기도가 꼭 필요하다고 하면 황제도 델라르타로 가겠다는 청을 거절할 수 없을 것이다.

라실리아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돌아갈 수 있었다.

* * *



“졸려.”

집무실로 돌아와 아무 일 없다는 듯 다시 펜을 잡던 레스칼이 갑자기 툭 내뱉었다.


“엇,”

“이런.”

평소처럼 집무실 바닥에 누워 뒹굴대던 리얀과, 그 옆에 서서 검술을 연마하던 세르벤이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레스칼이 펜을 놓았을 때, 세르벤은 이미 레스칼의 망토를 들어 대기하는 중이었다.


“침실로 가실 겁니까?”

“음. 그게 좋……, ……아니, 소파가 낫겠어.”

레스칼이 집무실 한 쪽에 놓인 긴 카우치로 걸어갔다.

옆으로 눕는 그를 보며 리얀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불편하실 텐데요. 소파가 폐하보다 짧습니다.”

“너무 편하면 곤란해.”

레스칼이 눈을 감은 채 중얼댔다.


“편하면 곤란하시다고요?”

“저녁 때 만나기로 했으니까. 그 전까지는 깨어나야 해.”

“누구를……. ……아, 황후 폐하.”

“…….”

그새 잠이 들었는지 레스칼에게서는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세르벤이 어이가 없다는 듯 작게 중얼거렸다.


“황후 폐하를 다시 보기 위해 굳이 불편하게 쪽잠을 주무신다는 폐하라……. 도무지 믿을 수가 없네.”

지난 사 년간 레스칼과 카르타헤나 황후의 관계는 도무지 부부라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레스칼은 황후를 싫어했다. 정확히 말하면 다른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접촉이 필요한 쪽은 레스칼이었다. 그래서 황후가 접촉을 무기삼아 휘두르며 황궁을 제멋대로 휘젓는 걸 묵인해야 했다.

반면에 황후는 레스칼을 원했다. 정확히 말하면 레스칼이 자신을 운명의 반려로 바라보길 원했다. 접촉은 피하는 주제에 자살소동 따위로 레스칼의 관심을 끌려는 짓은 서슴지 않았다.

유감스럽게도 레스칼은 황후에게 일말의 관심도 없었다. 블루문의 고통에 시달릴 때도 황후에게 강제로 접촉을 시도하지 않았다. 그럴 마음조차 들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오늘 벌어진 일은 충격적이었다.


“믿을 수 없어도 믿어야지. 어쨌거나 벌어진 일이니까. 그리고 이건 아무래도 그거겠지?”

레스칼이 잠든 카우치 근처에 주저앉은 리얀이 말했다.

세르벤은 그사이 일인용 소파를 끌어와 카우치 팔걸이 밖으로 늘어진 레스칼의 다리를 올려놓았다.


“그거라니?”

“급작스럽게 주무시는 거 말이야. 몸이 회복되려고 그러는 거 맞지?”

“그럴걸.”

리얀이 조심조심 레스칼의 소매를 들췄다.


“진짜 신기하네. 그새 다 사라졌어.”

“뭐? 그렇게 빨리?”

“응.”

세르벤도 곁으로 다가와 소매 안을 들여다보았다. 비늘은 돋아났던 흔적도 없었다.

블루문이 와서 변이의 흔적이 생기고 나면 레스칼은 죽은 듯 잠에 빠졌다.

마성을 인간의 육신으로 감당해 내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생기는 일이라 이해했다.


“변이가 이렇게 빨리, 그것도 별다른 고통 없이 사라진 적은 이제껏 한 번도 없었어.”

“그렇지.”

“그럼 황후 폐하가 사기를 치고 있다는 내 생각이 틀렸던 걸까?”

리얀의 질문에 세르벤이 턱을 문질렀다.


“글쎄……. 나는 황후 폐하께서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지 통 모르겠으니. 그냥 사악하게 뒤틀린 인간이라는 것만 알겠어.”

“황후 폐하를 이해할 수 있는 인간이 어디 있으려고……. 하, 사기가 아니라면 더 열이 받는데? 그럼 이제껏 접촉을 할 수 있는데도 계속 외면하고 있었다는 소리잖아? 대체 왜?”

“음……. 가진 게 그것밖에 없어서?”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세르벤이 미간에 주름을 잡은 채 말을 이었다.


“사실 잘은 모르겠는데…… 황후 폐하도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었잖아. 기억나? 혼인 초기에는 황제궁에도 열심히 기웃대고 하셨어. 폐하께서 아무런 관심도 안 보이시니 태도를 바꾼 거지. 그런 걸 따지면 괘씸해서가 아닐까? 황후 폐하께서 휘두를 수 있는 건 사실 접촉밖에 없잖아. 그것도 아니라면 황후 폐하께서 황궁에 존재할 이유가 없으니까.”

“어……? 그럴듯해. 오늘 좀 똑똑한데.”

“별말을.”

“그러면 악독하고 음산한데 실은 애정결핍증이었던 황후 폐하께서 이제 마음을 좀 고쳐먹었던 건가? 오늘은 왜……. 가만,”

리얀이 뭔가를 짚어 냈다.


“아니, 아니야. 황후 폐하는 오늘도 접촉을 거부하려고 했어. 피하려고 하는 걸 폐하께서 강제로 붙잡으셨지.”

“아, 그건……. 그러고 보니 그러네.”

“그전까지는 폐하께서 그 정도의 시도도 하지 않으셨던 거고.”

“그렇지. 옷자락이 스치는 것도 싫어하셨으니까.”

“어쩌면 황후 폐하는 내내 진짜였는데 폐하께서 이제야 깨닫게 되신 걸지도.”

“흐음.”

세르벤이 생각에 잠겼다.


“그럴 수도 있나? 운명의 반려는 태어날 때부터 한 쌍이잖아. 보자마자 느낄 수 있다고 했는데 말이야. 사 년씩이나 몰라볼 수가 있었을까? 애초에 그래서 너와 내가 황후 폐하를 사기꾼이라고 여긴 거잖아.”

“뭐가 됐든 기억상실과 연관이 있을 거야.”

리얀이 눈을 반짝였다.


“생각해 봐. 황후 폐하가 그간 블루문 때마다 갖은 꾀병을 다 지어냈어도 기억상실은 처음이란 말이야. 왜 하필 기억상실일까? 기억상실은 꾀병이라고 해도 너무 거짓말 같지 않아?”

“그러게. 나도 그게 궁금했어.”

“게다가 내 눈에는 오늘 황후 폐하가 어딘가 달라 보였다고. 폐하가 오시는데 잠옷 차림이라니. 자살소동을 벌일 때조차 완벽하게 치장하고 있던 분께서 말이야. 완벽하지 않은 자신을 내보이는 건 죽어도 못 견디는 성격이 아니셨나?”

“그건 전적으로 동감해.”

“그러니까 기억상실이 문제라고.”

잠시 생각하던 세르벤이 인상을 썼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돼. 자다가 갑자기 기억상실에 걸리는 사람이 어딨는데?”

“그게 진짜라는 말은 안 했어. 기억상실이어야 하는 이유가 있을 거라는 뜻이지.”

리얀이 씩 웃더니 몸을 훌쩍 일으켰다.


“하여간 그래서 나는 지금부터 자리를 좀 비울게.”

“뭐? 어딜 가려고?”

“기억을 잃은 황후 폐하가 너무 걱정돼서.”

세르벤이 혀를 찼다.


“걱정은 무슨. 뒤를 캐겠다는 거잖아.”

“어차피 내가 아니어도 황후 폐하의 일거수일투족을 폐하께 보고하는 자는 있어. 나 하나 더 끼어든다고 다를 것도 없어.”

리얀이 세르벤을 툭 쳤다.


“너도 알고 싶을 거 아냐. 그냥 눈 딱 감고 협조해.”

“……젠장, 아니라고는 못 하겠네. 그럼 조심해서 다녀와. 황후 폐하는 너를 싫어한다는 점을 잊지 말고. 들키면 폐하께서 골치 아파지셔.”

“싫어하는 걸로 치자면 황후 폐하는 나를 못 따라오지. 안 들켜, 절대.”

리얀이 허리의 검을 달랑대며 레스칼이 잠든 집무실을 떠났다.

* * *

촤르르륵!

방 안에 옷들이 끝도 없이 늘어섰다.

라실리아가 질렸다는 식으로 입을 약간 벌린 채 옷걸이에 걸린 산더미 같은 옷들을 바라보았다.


“새 옷을 전부 가져왔습니다. 고르시지요, 황후 폐하.”

엘리아든의 황제가 저녁에 보자는 다정한 말 같은 걸 하는 남편이 아니라는 건 황후궁의 모두가 알고 있었다.

황후궁의 시녀들은 지난 사 년간 황후가 저지르는 짓들을 지겹도록, 때로는 무서움에 떨며 지켜본 이들이었다.

황후는 무심한 황제를 원망했고, 원망하고 슬퍼하다 못해 악에 받쳤고, 그래서 황제가 자신을 필요로 하는 블루문에는 오히려 제 방문을 닫아걸었다.

그 모든 게 처절한 갈구였지만 황제는 단 한 번도 황후를 바라봐 주지 않았다.

그래서 황제와 황후의 저녁 만남이 정해진 오늘, 황후궁의 시녀들과 궁인들은 어깨가 저릴 정도로 다들 긴장을 하고 있었다.

행여나 오늘 몸단장에 깨알처럼 작은 실수라도 있으면 황후가 부릴 신경질을 아무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너무 많아. 적당한 걸로 골라 주면 좋겠어.”

그러나 저들을 쥐 잡듯이 몰아세웠어야 할 황후는 이상하게도 평온했다.


“골라 달라고 하셨나이까?”

제1시녀 파샤드 후작 부인이 물었다. 살짝 말을 더듬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럼 좋겠는데.”

“하, 하오나…… 하오나 제가 어찌 감히…… 그럴 수 있겠습니까. 당치 않으신 말씀이옵니다, 황후 폐하.”

파샤드 후작 부인은 재빠르게 발을 뺐다.

혹시라도 오늘 저녁 만남이 잘못된다면, 황후는 분명 드레스를 잘못 고른 탓을 할 것이다. 그게 자신이 되고 싶진 않았다.


“하고 싶지 않다는 말이겠군.”

라실리아는 후작 부인이 난처해하는 기색을 읽었다.

황후가 어땠을지 몰라도 라실리아는 남에게 싫은 일을 강요할 마음은 없었다.


“그렇다면 이걸로.”

라실리아가 옷 하나를 가리켰다.

사실 황후의 옷은 전부 다 과할 정도로 화려해 자신이 선뜻 고르기 애매한 점도 있었다.

라실리아는 끝도 없이 걸린 옷 중에서 그나마 제일 장식이 덜해 보이는 옷을 골랐다. 보기만 해도 숨이 막힐 정도로 허리를 조여서 윗가슴을 부풀리는 형태가 아니라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이, 이걸 입으시겠다고요?”

라실리아가 골라 든 옷을 확인한 시녀들의 안색이 새파래졌다.


“이, 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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